도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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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에서 생산되는 청자, 백자, 분청 등 천년의 전통과 그 맥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습니다.
여주 도예촌은 여주시에서 강건너 서북쪽으로 여주시 오금동, 현암동, 오학동와 천송동, 지내리 일대에 약400여개의 도자기 공장 및 300여개의 개인 전시관이 밀집되어 있습니다.
기록에는 고려 초부터 도자기가 제조되었고 조선조 초기 부터는 도자기 공업이 발달 하였다는데, 이것은 대신면과 여주읍 경계의 싸리산 언저리를 중심으로 점토, 백토, 고령토 등 전국에서 제일 좋은 도자기 원료가 생산되었기 때문입니다.
“여주는 예부터 싸리산을 중심으로 도자기의 원료인 고령토와 백토 등이 출토되어 일찍이 대표적인 도자 산지로 발달해 왔습니다.
동국여지승람 같은 문헌에서는 자기와 도기를 여주의 특산물로 꼽았고 지금도 국내에서 가장 많은 도예 업체가 자리한 도자기의 고장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여주에 도요지가 조성된 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1999년 3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북내면 중암리에 고려 백자 가마터를 발견한 바 있으며 세종실록에 여주 자기에 대한 기록이 있는 점,
시중 골동품상에 여주 도자기가 현존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조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일설로는 여주 싸리산에서 생산되는 도자기 원료인 고령토를 광주분원까지 뱃길로 운반해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16세기 무렵 전국의 도기소와 자기소는 200여 군데였는데 여주에도 오금동과 금사면에 도기소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아 조선의 도예는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수많은 도공이 일본으로 잡혀갔고
대부분의 요장이 파괴되었습니다. 겨우 명맥을 유지한 백자는 광해군 말기에 이르러서야 그 빛을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여주 지역은 17세기 말부터 도자기 원료 공급이 용이한 곳으로 이름나기 시작하며 ‘백자의 고장’이 되었습니다.
이 무렵에는 도요지도 늘어나 북내면 운촌리, 상교리, 석우리와 산북면 상품리, 가남읍 삼군리, 능서면 번도리 등 여주 전역에서 도자기가 생산되었습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여주에서 도자기가 생산되었다는 뚜렷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1884년 광주분원이 파점하자 여주에 이주한 도공 김현채와 이희풍과 함께 오금동 출신 함기순, 한호석, 김문배 등이 요강과 막사발을 생산해서
전국에 공급했다는 것으로 보아 그동안에도 이름 없는 도공들의 도자기가 면면히 이어져 온 것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1932년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여주시험소의 직원으로 이임준 기술과장, 한호석 서무과장과 지순택, 고명순 등이 있었고, 조각사로 해강 유근형이 근무했었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유근형, 지순택 등이 젊은 시절
여주에서 도예를 배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이천 도예의 원류가 여주임을 반증하는 명백한 근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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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