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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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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안동이며 김병룡(金炳龍)의 아들이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청(淸)이 내정에 개입하여 흥선대원군을 납치해 간 뒤 그를 귀국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민씨정권은 김명규를 문의관(問議官)으로 천진(天津)에 파견하여 반대 운동을 벌였다.

김명규는 1885년(고종 2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0월 여주목사가 되었다가 이듬해 10월 영변으로 이임하였다. 1889년에 천진 주재 독리통상사무(督理通商事務)의 직함을 가지고 주로 대외적인 일에 종사하였다. 1892년 협판내무부사를 지냈고, 그후 농상공부·학부대신 등을 역임하였다. 1898년 당시 의정부참정 박정양이 관민공동회 발기인 윤치호에게 정부 측 요인들이 관민공동회에 참석할 뜻을 비치자 이에 동의하여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그러나 수구파들이 관민공동회에 관계한 인사들을 모략하기 위해 이른바 익명서(匿名書) 사건을 조작하여 고종이 독립협회의 해산령을 내리고 관민공동회에 참가하여 ‘가(可)’자를 쓴 대신들을 해임시킬 때 함께 면직되었다. 뒤에 다시 복직되어 임시서리의정사무(臨時署理議政事務)·학부대신 등을 지냈다.

□ 참고문헌 : 『고종실록』, 『여주읍지』(1899 장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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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