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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시는 경기도의 동남부에 위치한 한강 어귀의 지역이다. 동쪽으로 강원도 원주시와 충청북도 충주시, 남쪽으로 음성군과 경기도 안성시, 서쪽으로 이천시와 광주시, 북쪽으로 양평군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산세로는 충청북도 접경에 오갑산(609m), 강원도 접경에 관모봉(362m)과 당산(541m), 양평군 접경에 고래산(503m)과 옥녀봉(419m), 광주시 접경에 앵자봉(667m)과 양자산(710m)이 있고 섬강(蟾江)과 달천(達川)이 합수(合水)되는 한강(漢江)을 중앙으로 서남으로 점동면(占東面)과 가남읍(加南邑), 서쪽으로 능서면(陵西面)과 흥천면(興川面), 서북으로 금사면(金沙面)과 산북면(山北面)이 위치하고 있다.

 

수계는 한남정맥(漢南正脈) 한강수계의 터전인 경기 동남부지역 일원에 해당한다. 충청북도 충주시를 관통하는 달천(達川, 달래강)과 강원도와의 경계에서 유입되는 섬강이 합수되는 절묘한 지형으로 한강이 시작되는 곳이다. 한강이 여주의 중앙부를 관류(貫流)하여 강남과 강북으로 나누어지는데 이 한강 어귀의 강북지역 강원도와의 접경이 강천면(康川面)이다. 북으로 양평군과 경계를 이루면서 북내면(北內面), 대신면(大神面)이 위치하고 있다. 한강을 중앙으로 여주지역을 누비며 유입되는 지천(支川)으로는 남서부 평지를 흐르는 청미천(淸渼川), 금곡천, 삼승천, 대신천, 매류천, 양화천(楊花川), 복하천(福河川)이 있고 북부산지에서 발원하는 금당천, 계장천(桂章川), 금사천(金沙川), 주어천, 용담천이 북서방향으로 군의 중앙부를 관류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동북에는 강천면의 부평천, 가정천(稼亭川), 원심천, 곡수천(曲水川), 완장천, 금당천, 한천(寒川), 후포천(後浦川), 장풍천(長豊川), 계림천(桂林川)이 한강으로 유입되고 있다.

 

경기 제일의 농경문화를 꽃피운 산하의 면모에서 비옥한 터전임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뿐만 아니라 여주의 한강유역은 중요 지점마다 나루터가 있어 교통은 물론 문화의 집산으로 국가경제의 한몫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주목조」에 “본래 고구려의 골내근현(骨乃斤縣)이다. 신라 경덕왕이 황효(黃驍)로 고쳐 기천군(沂川郡)의 속현으로 삼았다”로 되어 있다. 한강유역을 발판으로 백제가 고대국가로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삼국쟁패기 고구려의 골내근현이 되기 전 여주지역과 관련된 지명을 보면 여주 이포와 여주 흥천 지역은 백제 초기 술천성(述川城)으로 비정하고 있다. 백제 초기의 가장 큰 외적은 말갈세력이었다. 이들의 공격방향은 백제의 중심권인 한강 하류였으나 시대가 내려오면서 동북지역까지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을 오늘날의 행정구역에 비교해 보면 경기도 동북부 일원인 연천, 포천, 양주, 양평, 여주 등지에 해당되었음이 여러 유적조사 결과 밝혀지고 있다.

여주의 술천성지(述川城址)는 『백제본기(百濟本紀)』의 술천성 기사와 관련하여 여주 일원이 주목을 받아온 곳이다. 금사면 이포리와 외평리의 경계인 태봉(285m)에 위치한 술천성은 남한강변에 위치하여 강 건너에 있는 파사산성(婆娑山城)과 함께 주변이 한눈에 보이는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성이 『백제본기』에 나오는 술천성과 같은 것인지는 좀 더 연구되어야 할 여지가 남아 있으나 여주의 옛 지명이 술천(述川)이었다는 데서 당시의 술천성으로 보아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 성은 인근의 신지리성지(新池里城址)와 함께 같은 생활권인 강 건너의 파사성에 대응하는 성격이 강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백제본기』에 나오는 말갈의 술천성 공격기사와 관련하여 볼 때 백제의 전진기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성지로 추정된다. 능서면 신지리 북성산(北城山)에 위치한 신지리성지는 넓은 평야의 한복판에 있는 지리적 여건으로 볼 때 오래전부터 군사적 요충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성지(城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5 「지리조」에 “기천군은 본시 고구려의 술천군(述川郡)인데, 지금 천령군(川寧郡)이다. 황효현(黃驍縣)은 본시 고구려의 골내근현으로 경덕왕(景德王)이 황효로 개명(改名)하였으니 지금의 황려현(黃驪縣)이다”라고 한 기록으로 볼 때 신라가 3국을 통일하고 경기, 강원, 황해, 충청 일원을 한산주(漢山州)로 개편, 687년(신문왕 7) 전국을 9주 5소경(九州五小京)으로 할 때 한강의 요충지에 설치하였던 군사기지 골내근정(骨乃斤停)이 지금의 북성산 정상에 남아 있는 성지(城址)로 추정해 본다. 『문화유적총람 경기도편』 「여주군」의 신지리성지 기술 내용에 “둘레 약 450m의 석축으로 신라시대 축성이라는 전설이 있지만 확실히 알 수 없고 능서면 동북방에 위치한 북성산(묵밭골) 3~4개소에 성(城)의 흔적만 남아 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의 내용도 신라시대의 성이라고 하였으나 주위의 술천성 및 파사성과 비교하여 볼 때 성(城)의 초축(初築)은 백제 초기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성의 둘레는 약 3.2㎞이며 규모가 상당히 큰 석축성(石築城)으로 정상부에 평지가 있고 우물이 1개소 있으며 삼국시대의 경질토기편(硬質土器片)과 기와조각[瓦片]이 채집되고 있다. 따라서 현재 남아 있는 유구로 보아 이 성지의 축조연대를 5세기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만 주변의 지리적 여건을 고려하여 본다면 초축 연대는 그 이전으로 올려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위의 두 성지는 『백제본기』의 술천성 및 동부관계기사와 관련지어 볼 때 동북지역의 유력한 소국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러한 상대적 우월성의 바탕은 이 지역에 넓게 펼쳐진 평야를 토대로 일찍부터 형성된 경제적인 우월성에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차제에 여주지역에 설치되었던 골내근정의 위치도 밝혀야 할 과제라고 본다. 여주 지역은 말갈과의 관계에서 전초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인근 지역의 지석묘 분포와 매룡동, 상동 등의 고분 분포 그리고 북내면 석우리 선돌[石隅里立石], 점동면 처리 선돌[處里立石] 등의 분포로 미루어 볼 때 여주지역은 오래 전부터 소국(小國)의 중심지로서 손색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대신면 천서리에 있는 파사산성도 평야지대의 한복판에 위치한 독립된 산으로 사방이 조망되는 지리적 여건을 지니고 있다. 이 성의 이름이 파사성이기 때문에 파사이사금과 연결지어 신라의 한강 진출과 관련, 축조연대를 신라 중기로 추정하나 이 지역 일대를 중심으로 마한(馬韓) 소국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생각되므로 AD 1~2세기까지 올려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성의 위치가 강 건너의 술천성 및 신지리성지와 대응적인 성격이 강한 점 등으로 미루어 초기에는 백제의 영향권에 있었다기보다는 백제에 적대하는 말갈의 영향권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참고로 경기문화재단부설 기전문화연구원에서 3차 발굴조사로 확인된 파사성의 출토유물 중 4세기경 백제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화덕과 토기편이 발굴되어 축조시대와 관련하여 여주지역의 지리적 위치에도 영향이 미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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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