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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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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사면에 있는 기천서원(沂川書院)에는 조선시대 유현(儒賢) 8명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그중의 한 사람이 정엽이다. 본관은 초계(草溪)이고 자는 시회(時晦), 호는 수몽(守夢) 또는 설촌(雪村)이며, 진사 정유성(鄭惟誠)의 아들이자 영의정 이산보(李山甫)의 사위이다. 3세 때 글을 배워 4세 때 시를 지음으로써 이이(李珥)와 정유길(鄭惟吉)로부터 신동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이지함(李之菡)의 주선으로 송익필(宋翼弼)에게서 수학하고 성혼(成渾)과 이이에게서도 가르침을 받았다. 송익필은 기묘사화 때 고변한 송사련(宋祀連)의 아들로 이산해(李山海), 최경창(崔慶昌) 등과 함께 8문장(八文章)으로 불리었으나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을 다룬 기축옥사에 개입함으로써 비난을 받은 사람이다. 이 일로 제자인 정엽도 구설수에 올랐다. 정엽은 1583년(선조 1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서 벼슬을 시작하였고 형조좌랑·황주판관·중화부사·서천군수·여주목사·성균관사성·수원부사·응교·집의·대사간 등을 지냈다.

1602년 정인홍(鄭仁弘)이 권력을 잡자 성혼의 문인이라는 혐의를 받고 종성부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정엽은 종성(鐘城)에서 학교교육을 크게 일으켰는가 하면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성에 올라가 수많은 오랑캐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기자헌(奇自獻)의 농간으로 동래(東萊)로 유배되었다가 1605년에 풀려나 성주목사·홍주목사가 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예조참의·대사성·충청감사·도승지를 역임하였다. 1617년(광해군 9) 폐모론이 제기되자 양양(襄陽)부사를 자원하였고 인목대비가 폐위되자 관직을 버리고 사저(私邸)가 있는 여주로 돌아와 지냈다. 이후 광해군이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인조가 즉위하자 특명으로 대사성과 대사간을 겸하였다. 성균관대사성으로서 타직을 겸하는 예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1625년(인조 3) 2월 유순익(柳舜翼), 김장생(金長生) 등과 함께 사노(私奴)로 환천되어 떠돌아다니다 죽은 스승 송익필의 신원을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한 채 두 달여 만에 죽었다. 저서로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와 『수몽집(守夢集)』이 있다. 사후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1760년에 편찬한 『여주목읍지』의 인물편에 등재되어 있다.

 

□ 참고문헌 : 『선조실록』, 『광해군일기』, 『인조실록』, 『수몽집』, 『여주목읍지』(1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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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