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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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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순지(詢之)이고, 호는 졸암(拙庵) 또는 북천(北川)이다. 유세구(柳世龜)의 손자이자 유연(柳埏)의 아들이다. 1573년(선조 6) 생원시에 입격하고 1579년 식년시에 급제하였다. 1587년 동지사서장관으로 명(明)에 다녀와 장령과 우승지를 역임하였다. 1595년(선조 28) 참찬관에 재직시 둔장(屯長)의 설치와 관련하여 왕에게 진언하기를 “전일 이덕형(李德馨)의 차자 중 연강(沿江) 일대에 둔장(屯長)을 설치하여 방수할 계책에 대해서는 위에서 이미 비변사로 하여금 시행케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이 일찍이 여주에 우거할 때 오가며 보았는데, 변응성(邊應星)이 용진(龍津)에 진(陣)을 설치한 곳은 지세가 평이하여 의거할 만한 험지가 없고 진 앞에 얕은 여울이 있는데 인마(人馬)가 항상 통행하니 그것으로 험지를 삼기에는 부족했습니다. 변응성은 장목(長木)과 초석(草席)으로 여울을 막으려 하였으니, 그 계획은 매우 오활한 것이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어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는데 가속(家屬)을 도내에 유치해서 경거망동하고 또 수령을 통솔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 당하였다. 이듬해 병조참지로 기용되어 해서(海西)와 관서(關西)사이의 관문인 평산산성(平山山城)의 중요성을 들어 그 수축을 청하였다. 또한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김시헌(金時獻) 등과 함께 군량과 무기 등을 준비하고 장정 700명을 모아 복수군(復讐軍)을 조직하여 서울의 수성(守成)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1598년 다시 황해도관찰사, 1601년 성주목사와 이듬해 좌승지를 역임하였다. 1604년 정평부사가 되어 학교를 세우고 스스로 학동(學童)들을 가르쳤다. 이후 경상도관찰사를 지내고 한성부윤을 거쳐 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 참고문헌 : 『선조실록』,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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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