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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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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고려 971년(광종 22) 수원 갈양사(葛陽寺, 지금의 용주사에 있던 옛 사찰)에서 혜거국사가 처음으로 수륙재(水陸齋)를 시행하였다. 본관은 명주(溟州)인데 천령군 황려현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문하시중에 증직된 박윤영(朴允榮)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예불과 불경 듣기를 좋아했던 혜거는 신라 신덕왕(神德王) 3년(914) 봄에 북내면(北內面) 우두산(牛頭山) 개선사(開禪寺)에 가서 오심장로(悟心長老)에게 출가하였다. 3년 뒤인 경명왕(景明王) 1년(917) 금산사(金山寺) 의정 율사(義靜 律師)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922년(경명왕 6) 선운사(禪雲寺) 선불장(選佛場)에서 승과(僧科)가 열렸는데 이때 등단하여 설법을 하던 중 천화(天花)가 휘날려 모인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미륵사 개탑(開塔)을 계기로 열린 이 선불장은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주관한 승과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혜거는 신라 경애왕(景哀王)의 초청으로 분황사(芬皇寺) 주지를 맡았고 이어서 경순왕(敬順王)의 명으로 영묘사(靈妙寺)의 주지로 옮겨 법석을 개최하고 계단을 정비하며 불탑을 장식하는 등 많은 불사를 베풀었다. 태조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나서 혜거의 도덕과 불법을 흠모하여 세 번씩이나 초청하였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947년(정종 2) 거듭되는 왕의 청에 못 이겨 12월에 왕사(王師)가 되었고 이듬해 2월 홍화사(弘化寺)에서 전장법회(轉藏法會)를 주관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왕은 그에게 변지무애(辯智無碍)라는 호를 내렸다. 974년(광종 25) 2월 15일 마침내 혜거는 대중을 모아 “근원으로 돌아간다(還源)”고 밝히고 입적하니 향년 76세, 계랍(戒臘) 61년이었다. 부음을 들은 광종(光宗)은 좌승선 이경적(李敬迪)을 보내 상사(喪事)를 돌보게 하였고 3월 8일 다비(茶毗)한 뒤 사리 13과를 얻어 탑에 안치하였다.

□ 참고문헌 :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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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