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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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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이 개성 용수산(龍首山) 아래 살고 있을 때 대중 앞에서 신돈의 전횡을 비판한 일이 있었다. 이 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가족들과 함께 아버지를 등에 업고 남모르게 경북 영천(永川)에 있는 최원도(崔元道)의 집을 찾아갔다. 마침 그날 최원도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벌이고 있었는데 이집을 보자 짐짓 노한 기색을 띠우며 “이것은 화(禍)를 싣고 와서 서로 함께 하자는 것이다” 하고는 소리쳐 내쫓고 이집이 앉았던 사랑채까지 불 질러버렸다. 쫓겨난 이집은 “최우(崔友)는 나의 지심우(知心友, 서로 뜻이 통하는 친구)인데 이는 필시 나를 위하는 짓이라” 생각하고 가까운 숲 속에 머물며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과연 밤이 깊어지자 최원도가 지팡이를 끌고 이집이 있는 곳으로 와서 “이우(李友)는 여기 있는가” 하고 찾으니 서로 얼싸안고 집으로 돌아가 낮에는 다락 위에서 거처하고 밤에는 규중(閨中)에서 자게 되었다. 얼마 뒤 이집을 잡으려는 군사들이 영천까지 왔으나 문전박대를 받고 쫓겨났던 그가 다시 최원도의 집에 머물고 있는 줄은 까맣게 몰랐다. 이집은 이곳에서 3년간 은거하는데 1년이 채 되기 전에 이집의 아버지가 별세했다. 이집의 아버지를 극진히 봉양하던 최원도는 장례를 준비하고 슬퍼함에 있어서도 친부모와 다름없이 하였다. 최원도는 이집의 아버지를 자신의 선영에 모셨는데 그 후 이집의 후손들이 산 밑에 보은당(報恩堂)이라는 집을 지어놓고 최원도의 은혜를 추모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음력 10월 10일이 되면 영천의 나현(蘿峴)에서는 양가가 같은 날에 묘제를 지내면서 서로 상대방의 조상에게도 잔을 올리고 참배하고 있다.

이집의 본관은 광주(廣州), 초명은 원령(元齡), 자는 성노(成老), 호는 묵암자(墨巖子) 또는 남천(南川)이고 광주 향리 이당(李唐)의 아들이다. 1347년(충목왕 3) 문과에 급제하여 합포종사(合浦從事)를 거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이르렀다.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죽자 개성으로 돌아와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에게 이르기를 “지금 나는 마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 같은데 어찌 이름만 옛것을 쓸 수 있겠는가” 하고는 이름을 집(集), 자는 호연(浩然), 호는 둔촌(遁村)이라 하였다. 호연한 기운(浩然之氣)은 의가 모여야만 생긴다(集義所生)는 뜻으로 이름과 자를 정한 것이고 숨음(遁)으로써 난을 피할 수 있었기에 이를 잊지 않기 위하여 호를 지은 것이다. 벼슬에 뜻을 잃은 이집은 여주로 내려와 이포강가에서 살면서 시를 지으며 일생을 마쳤다. 많은 사람들과 교유하였는데 특히 이색, 정몽주, 이숭인, 김구용 등과 친분이 두터웠다. 저서로는 『둔촌유고(遁村遺稿)』가 있다. 1760년(영조 36)에 편찬한 『여주목읍지』의 인물편에 등재되어 있다.

□ 참고문헌 : 『둔촌유고』, 『여주목읍지』(1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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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