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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영 신도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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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영(曺漢英) 신도비명(神道碑銘)1)

회곡(晦谷) 조공(曺公)이 세상을 떠난 지 이미 23년이 되었는데 묘도(墓道)에 아직까지 신도비를 세우지 못하였다. 사자(嗣子) 헌주(憲周)와 출후(出后)한 아들 전주(殿周)가 그 명성과 덕행이 혹 세월이 오래되면 매몰(昧沒)될 것을 크게 두려워하여 빗돌을 마련하고 나에게 명문(銘文)을 청하였다.

아! 내가 공에게는 까마득한 후진(後進)이다. 뵙고 가르침을 받은 것이 겨우 한두 번 뿐이거늘, 이제 그 두 아들이 곧 공의 사후(死後)의 일에 늦추고 또 늦추다가 마지막에 와서 나에게 명하니 이것이 어찌 좋아하는 바에 아첨하는 것을 나에게 바라는 것이겠는가. 반드시 내가 공변되히 칭송하여 사실을 바로 쓰리라고 여겨서 일 것이다. 내가 여기에 어찌 감히 한 자라도 지나치거나 숨겨서 그 부탁하는 뜻을 저버리는 바가 있을 수 있겠는가. 대개 공의 평일 주장한 논의와 몸가지는 방법에 있어 기록할 만한 것 중에 가장 큰 것이 세 가지가 있다. 인조(仁祖) 무인(戊寅, 인조 16, 1638)년을 당하여 우리나라에서 청인(淸人)을 도와 서쪽을 침범하는 군사 출동이 있었는데 왕세자(王世子)2)가 심양(瀋陽)으로부터 귀근(歸覲)3)하고 청인(淸人)이 원손(元孫)4)을 대신 보내게 하였다.

공이 이때 지평(持平)으로 있었는데 분연(奮然)히 말하기를 “우리가 비록 저들에게 신하 노릇을 하기는 하나, 신하가 임금에게 있어서도 또한 따를 만한 것도 있고 따르지 못할 만한 것도 있는데 어찌 따르지 않을 일이 없이 모두 따라야 한단 말인가. 또 돌아와서는 장차 다시 갈 것이고 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니 이것은 모든 종족을 거느려 북쪽 연경(燕京)으로 가게 하려는 것이다.” 하며 만여언(萬餘言)의 소(疏)를 초(抄)하여 어서 큰 계책을 결단하기를 청하였으나 회답이 없었다. 마침 청인이 우리 재상 및 도승지 신득연(申得淵, 1585~?)을 불러다가 위협하여 묻기를 “듣건대, 너희 나라에 아직도 명(明)을 위하여 절의를 지키는 자가 있다 하는데 그 사람이 누구이냐?” 하였다. 신득연이 김공(金公) 상헌(尙憲, 1570~1652)과 공의 이름을 들어 대답하니, 청인(淸人)이 심히 다급하게 수색하였다. 공이 북쪽 청(淸)나라로 떠나갈 새, 임금이 궁중의 내시(內侍)를 보내어 위로하고 백금과 담비가죽 모자를 하사하였다.

청나라에 이르자, 청인이 군대의 위력을 펴고 협박하여 물었는데 답하기를 “내가 내나라 일을 논하는데 무엇 때문에 묻는 것이요?” 하니 죽이겠다고 위협하였으나, 동요하는 말이 없었다. 여러 호인(胡人)이 서로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상이(爽爾) 상이(爽爾)”라고 하였으니 곧 호인의 말로는 ‘훌륭하다’는 말이다. 드디어 공 등을 심양(瀋陽)에 가두어 버리니 아침저녁을 헤아릴 수 없고, 옥중의 사방 벽에 서리가 한 자 남짓 쌓였으나 공은 태연하게 처신하고 날마다 김공(金公)5)과 시로 창수(唱酬)하여 큰 책(冊)이 형성되었다. 김공(金公)이 제목 붙이기를 『설교집(雪窖集)』이라 하였다. 3년이 지난 뒤에 청인이 느슨히 하여 우리 경내(境內)의 의주(義州)에 옮겨 구류하였다가 또 한해 남짓하여 비로소 석방되었다.

효종(孝宗)때에 윤휴(尹鑴, 1617~1680)가 명예를 도둑질하여 자중한 체 하고 여러 차례 불렀어도 일어나지 않으니, 임금이 장차 포의(布衣)로 들어와 뵙는 것을 허락하려 하였다. 공이 시임(時任) 승지로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윤휴의 실지(實地)를 주상께서 반드시 스스로 그가 어떠한가를 모르실 터인데, 지금 곧 한 사람의 칭찬으로 세상에 드문 특이한 예우를 가벼이 내리시니 뒤에 만약 그 명성에 부합되지 않으면 어찌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에 그만두었다. 우암(尤庵) 송공(宋公)6)이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있을 때에 또 윤휴를 품계를 뛰어 올려 찬선(贊善)의 후보에 내신하려 하였는데 공이 그때 정석(政席)7)에 같이 있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인사 규정에 어긋남이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또 그 사람은 결코 써서는 안됨을 알고 있다.” 하고 극력 논쟁하니 송공(宋公)이 그 뜻을 꺾지 못하였다. 당시에 윤휴를 편드는 자가 왁자하게 공을 공격하였고, 심지어 송공(宋公)에게 공을 물리쳐 버리기를 권하는 자가 있기에 이르렀는데 공이 곧 전형(銓衡)의 직을 사양하여 체직되었다.

기해(己亥, 효종 10, 1659)년 봄에 공이 바야흐로 대사간(大司諫)의 직에 있었는데, 헌납(獻納) 민유중(悶維重, 1630~1687)이 입시(入侍)하여, 작고한 정승 김육(金堉, 1580~1658)의 장사에 수도(隧道)의 예를 쓴 것을 논하되, 개장(改葬)하게 하고 극중한 죄로 그 아들을 죄 주기를 청하였으며, 다른 계사(啓辭)도 다시 열 가지 일에 이르렀으나 모두 공에게 서면으로 물어 본적이 없었던 것이다. 공이 계(啓)를 올리기를 “일이 입시할 때에 나와서 동료에게 오고갈 수 없는 처지였다면 독계(獨啓)하는 것은 규례이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어찌 동료에게 의견을 묻지 않고 혼자 마음대로 논한단 말입니까!” 하였다. 대간(臺諫)의 논의도 모두 공의 주장하는 바가 옳은 것임을 알고, 또 말하는 자를 꺾는 것을 어렵게 여겨 양쪽을 다 옳다고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대각(臺閣)에는 본디 양쪽을 다 옳게 여겨 서로 용납하는 규례가 없다. 또 당초에 참여해 듣지 않았다가 뒤에 와서야 계(啓)에 참여하는 것은 결코 그런 도리가 없다.” 하고 병(窉)을 끌어 대어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정언(正言) 이익(李翊, 1629~1690)이, 공이 일을 회피한다고 논핵(論劾)하여 체직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시신(侍臣)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대사간이 잘못한 것이 없으니 이 일은 해괴한 일이다.” 하고 곧 공을 승지로 옮겼으니, 공의 처지를 위하여 그 언론의 예봉을 거듭 부딪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얼마 못가서 임금이 승하하니 공이 드디어 세상에서 경륜을 펴려던 뜻과 서로 어긋나게 되었다.

대개 공을 살펴보건대 설교(雪窖)에서 시종 굽히지 아니한 절개는 사람들이 진실로 감히 논의할 수 없는 것이고, 전형(銓衡) 자리에서의 논의와 사간원에서의 논의에 이르러서는 어떤 경우에 처음에는 헐뜯었으나 뒤에는 복종하였고 어떤 경우는 동조하는 자가 적고 동조하지 않은 자가 많았다. 그러나 나의 소견으로 말하면 의로써 항거하고 몸을 돌보지 아니하였으며 간사함을 배척하고 비방을 상관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지키고 구차히 따르지 않은 것이므로 뜻을 확립함이 환하게 분명하여 애초에 별다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서막(徐邈)의 통개(通介)8)에 대해 논하기를 “세상 사람은 상도(常道)가 없지만 서공(徐公)은 상도가 있다.”고 하였는데 나 또한 공에게 그렇게 말한다.

공의 휘는 한영(漢英)이고 자는 수이(守而)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니 대서(代序)가 멀리 있다. 고려 때에는 8대를 서로 이어서 평장사(平章事)를 하였고,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명신(名臣)과 석덕(碩德)이 이어졌다. 증조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이니 휘(諱)가 대건(大乾)이고, 조부는 사도시주부(司導寺主簿)로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이니 휘가 경인(景仁)이고, 아버지는 공조참판 하녕군(夏寧君)으로 증이조판서이니 휘가 문수(文秀)이다. 어머니는 전주 이씨(全州 李氏)이니 우찬성(右贊成) 정간공(貞簡公) 직언(直言)의 따님이다.

공은 만력(萬曆)9) 무신(戊申, 선조 41, 1608)년에 태어났다. 5세 때 『시경(詩經)』에 통달하고, 12세 때 저술에 능하였다. 20세에 생원시(生員試) 1등에 합격하고, 30세 때 정시(庭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의 전적(典籍), 직강(直講)과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를 지내고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홍문관(弘文館), 이조(吏曹), 중서성(中書省)10)의 낭관(郎官), 사복시정(司僕寺正), 지제교(知製敎) 겸교서관교리(兼校書館校理), 한학교수(漢學敎授)를 두루 지내고 인조실록청도감(仁祖實錄廳都監) 낭관의 노고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승지, 대사간, 대사성 그리고 이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참의를 지내고 승문원(承文院) 부제조(副提調)를 겸하였다.

기해(己亥, 효종 10, 1659)년 이후에는 관직을 제수하면 문득 사양하였고 조정에 있는 것이 편치 아니 하여 외직을 요구해서 춘천부사(春川府使)로 나갔다. 정미(丁未, 현종 8, 1667)년에 대신의 천거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임명되고 하흥군(夏興君)에 습봉(襲封)되었다. 형조, 예조의 참판을 지내면서 겸오위도총부부총관(兼五衛都摠府副摠管)한후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를 지냈다. 경술(庚戌, 현종 11, 1670)년 8월 좌윤(左尹)에 재직시 자택에서 세상을 마치니 나라에서 조문과 제사를 예대로 내렸다. 그해 10월에 여주(驪州) 오룡곡(五龍谷) 간방(艮方)을 등진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성주 이씨(星州 李氏)이니 참의 지선(祗先)의 따님이다. 부덕(婦德)을 구비하였으며, 총명하고 식감(識鑑)이 있었다. 그래서 부군(夫君)의 뜻을 어김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내조(內助)가 많았다. 공보다 2년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장지는 공의 묘소 왼쪽에 합부(合祔)하였다. 아들 셋을 낳았다. 통덕랑(通德郞) 건주(建周)는 일찍 죽었고 전주(殿周)는 시임(時任) 면천군수(沔川郡守)이니 곧 출후(出後)한 사람이고, 헌주(憲周)는 전(前) 금구현령(金溝縣令)이니 곧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다. 딸 여섯을 두었다. 정(正) 임좌(任座), 도정(都正) 김수증(金壽增, 1624~1701), 정랑 박내장(朴乃章), 사인(士人) 신세장(申世壯), 교관(敎官) 홍석보(洪碩普), 봉사(奉事) 홍만종(洪萬宗, 1643~1725)이 그 사위이다. 건주(建周)는 아들이 없고 사위가 있으니 부제학(副題學) 임영(林泳, 1649~1696)인데 바로 공의 묘지(墓誌)를 지었다. 헌주(憲周)는 아들 다섯을 두었으니 하중(夏重), 하성(夏盛), 하망(夏望), 하종(夏鍾), 하정(夏挺)이며 손자, 손녀 및 외손 남녀가 또 약간인이 있다. 전주(殿周)는 아들 셋을 두었으니 하언(夏彦), 하기(夏奇)인데 모두 성균진사(成均進仕)가 되었으며 막내는 하장(夏章)이다.

공은 부모를 섬기되 생전이나 사후(死後)에나 예를 다하였고 가정안의 조행이 매우 잘 닦여져서 관직에 임하여 결백하였다. 소시에 택당(澤堂) 이판서(李判書)11)에게 고문(古文)을 배우고 사계(沙溪) 김선생(金先生)12)에게 예학을 배웠는데 이공(二公)은 모두 장후(奬詡)함이 지극하였다. 조정에 벼슬하게 되어서는 깊은 학문과 뛰어난 문장이 일시에 우러름을 받아 문형(文衡)13)의 선발을 당할 적마다 사람들이 모두 공에게 뜻을 두었으나 만년의 환로(宦路)가 어긋나서 임명되지 못하니 사림(士林)이 그를 위해 슬퍼하고 억울하게 여겼다.

하녕군(夏寧君)14)은 글씨가 온 세상에 뛰어났고 공도 또한 일찍부터 선대(先代)의 재예(才藝)를 계승하였다는 칭찬이 있었는데 중년 이후부터 그만두고 힘쓰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옛날 어떤 사람이 우계(牛溪)15)의 필법(筆法)이 청송(聽松)16)보다 못하지 않다 함이 있었는데 우계가 이로 인하여 서예(書藝)로써 자임(自任)하지 않았다 하니 이것은 본받을 만한 것이다.” 하였다. 아! 공의 대방(大方)17)은 내가 이미 앞에서 서술하였거니와 또 그 작은 행실을 살펴보고자 한다면 또한 이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인조대왕 중흥하자,
준걸(俊傑)이 감화됐네,
만년에 이루어 주니,
후일 등용 위함이네.
아름다운 우리 조공(曺公),
문과에 장원인데,
문질(文質)도 구비하고
효자집에 충신이네.
의로운 소(疏) 그 한 장에,
포로 생활 삼년인데,
송백(松柏)같은 그 절개는
위협에도 변치 않네.
심양(瀋陽)에서 풀려난 뒤,
명예 더욱 드날리니,
효종대왕(孝宗大王) 즉위하자,
옥당(玉堂)에 들어갔네.
경연(經筵)에서 경사(經史)를 강론하며,
내 포부 다 하거니,
시종신(侍從臣)이 드리는 말,
육률(六律)처럼 경청(傾聽)하네.
재변(災變)으로 올린 경계 글에,
말과 이치 합당하니,
성상(聖上)이 아름답게 여겨,
표범 가죽 하사했네.
소인이 명예 훔치니,
온 세상이 따라가네,
그의 진로 가로 막고,
뭇 비방 상관 않네.
슬프다! 저 소년이,
언론 행동 모가 나니,18)
그들과 쟁변하랴,
달갑게 물러나리.
왕의 감식(鑑識) 더욱 밝아,
그 충심 살피시니,
승지(承旨)로 벼슬 옮겨,
그 칼날 피하게 했네.
효종대왕 승하 만나,
시세의 길 어긋나니,
한직(閒職)에 전전타가,
춘천부사(春川府使) 자청했네.
강직 용납 어려움은,
예로부터 그러한데,
밖에서 오는 비방,
근심하고 허물하랴.
만년에 미치어서,
봉군(封君) 작호(爵號) 내려지니,
나이 이미 노쇠하고,
세상 분란(紛亂) 싫어졌네.
없어지지 않는 바는,
문장이 있을 뿐이니,
천고의 장단득실(長短得失)이,
서적에 실려 있네.
공의 시종(始終) 논한다면,
완전하다 하겠거니,
밝은 임금 지우(知遇)받고,
대로(大老)19)와 절의 같네.
그 밖의 불우(不遇)한 일,
슬퍼할 것 무엇이랴,
시를 지어 후세에 고하노니,
부끄러운 빛 없도다.

아! 슬프다. 아버지20) 배청(排淸)의 절의를 지킨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께서 작은 아버지 금구공(金溝公)21)과 이 비석 세우는 일을 경영하였는데 금구공(金溝公)이 돌을 다듬어 운반하였다. 병자(丙子, 숙종 22, 1696)년에 아버지께서 담양부사(潭陽府使)로 부임하여 각자(刻字)를 시작하다가 문득 세상을 버리시니 내가 선친의 뜻을 받들어 완료하게 되었다. 비액(碑額)의 전자(篆字)에 이르러서는 아버지께서 평소에 전자 쓴 법을 익혀 일찍이 직접 쓰시고자 하다가 미처 이루지 못하였다. 내가 아버지께서 쓰신 글자를 모으고 또 빠진 글자를 보완하여 삼가 새겨서 아버지께서 경영하시던 성의에 부응하는 바이다. 손자 하언(夏彦)은 읍혈(泣血)하며 삼가 기록한다.

금상(今上) 37년 기축(己丑, 숙종 35, 1709)22) 7월에 연신(筵臣) 조태구(趙泰耉, 1660~1723)가 주상에게 아뢰기를 “고(故) 참판 조한영(曺漢英)의 경진(庚辰, 인조 18, 1640)년에 올린 소(疏)는 대의(大義)가 늠연(凜然)하니 호인(胡人)이 ‘황조(皇朝)23)를 위해 절의 지키는 사람이다’ 하여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과 일시에 북쪽으로 잡혀가서 3년 동안 연경(燕京)의 옥에 갇혔는데 시종 흔들리지 않고 『설교수창록(雪窖酬唱錄)』이 있어 세상에 전해집니다. 그 뒤에 또 일로 인하여 소를 올렸는데 효종(孝宗)께서 ‘사대부(士大夫)의 기절(氣節)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 하고 그를 칭찬하셨습니다. 조정에서 존주대의(尊周大義)를 지킨 제인(諸人)에게 그 표창한 바가 상례(常例)에 지남이 있었으나 홀로 이 사람에게만 빠뜨린 것은 진실로 흠전(欠典)24)입니다. 특명으로 품계를 올려 주고 시호(諡號)를 내리시면 실로 절의를 숭장(崇奬)하는 도리에 합당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 일은 포장(褒漿)하는 것이 합당한데 미처 시행하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좌상(左相) 서종태(徐宗泰, 1652~1719)가 아뢰기를 “조모(曺某)는 문장과 절의로 당시에 인망이 중대하였으나 천성이 높고 뻣뻣하여 교유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벼슬자리가 정체되었습니다. 국전(國典)에 벼슬이 조경(正卿)25)이라야 시호를 주게 되어 있으나 이 사람은 절의가 드러났으니 특별히 내리는 것도 불가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절의가 이와 같으니 증직(贈職)하고 증시(贈諡)하는 것이 좋다”하고 이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증직하고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아! 이는 세도(世道)의 중시함을 더해주고 사림(士林)의 기대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한 가지 일을 비문에 기록하지 않았으므로 삼가 간추려 기록하여 그 아래에 덧붙인다. 윤증(尹拯, 1629~1714)이 지었다.

曺漢英神道碑銘

晦谷曺公 捐館舍旣二十有三年 墓道尙闕顯刻 嗣子憲周 出後子殿周 大懼其名德 或昩於久遠 具石乞銘於余 噫余於公 藐然後進也 瞻顔承敎 僅一再而已 今其二胤 乃於公後事 遲之遲而及其卒 以命余 是豈以阿好 望余哉 必將謂余公誦而直書之也 余於此 何敢有浮隱於隻字 厚孤其見托之意也 盖言公 平日持論處己之方 其可紀之大者有三 當仁廟戊寅 我有助淸人西犯之兵而王世子自瀋中 歸覲 淸人 以元孫 替去 公時任持平 奮曰我雖爲臣虜於彼 臣之於君 亦有可從不可從 豈至於無所不從乎 且歸將復去 去將不歸 是將擧族北轅也 草疏萬餘言 請亟斷大計 不報 會淸人 召致我宰執及都承旨申得淵 脅問曰聞爾國 猶有爲明朝守節者 其人 爲雖 得淵 以金公尙憲及公名對 淸人 索之急 公且北行 上遣中使勞諭 賜白金貂帽 及至 淸人 設兵威脅問 答曰我論我國事 何以問爲 怵以死 無撓辭 群胡相顧曰此人 爽爾爽爾 卽胡語好好之云也 遂囚公等瀋中 朝夕不可測而獄中四壁 霜厚尺餘 公處之委順 曰與金公 酬唱詩章 積成巨帙 金公題之曰雪筶集 居三載 淸人緩之 移拘我境龍灣上 又歲餘 始得釋 孝廟時 尹鑴盜名自重 屢招不起 上將許以布衣 入見 公時任承旨 白上曰鑴之實地 上未必自知其如何 今乃以一人之譽 輕加曠世之異數 後若不副其名 則奈何 上乃止 尤庵宋公 判銓時 又欲超入資擬贊善望 公時同政席 曰此不但有違政規 吾且知其人 決不可用 爭之甚力 宋公 不能奪 一時 右鑴者譁然攻之 至有勸宋公斥去 公卽辭遞銓職 己亥春 公方任諫長 獻納閔維重 入侍 論故相金堉葬 用隧道 請改葬 以極罪 罪其子 他啓復至十事 皆未嘗簡問於公者也 公啓曰事發於入時之際 不容往復同僚則獨啓 例也 不然 何得不問而專論 臺議皆知公所執是 且以折言者 爲難 兩可之 公曰臺閣 本無兩可相容之規 且初不與聞 後乃參啓 決無是理 引疾不出 正言李翊 劾公避事 請遞 上顧謂侍臣曰大諫 無失 玆事可駭 旋移公承旨 所以爲公道地 不欲其重觸言鋒也 未幾 上棄群臣 公遂與世相左 盖觀 公始終雪筶不屈之節 人固不敢容議 至若銓席之議 諫院之論 或先則毁而後則服 或與則少而不與者多 雖然 以余言之 抗義而不顧身 斥邪而不恤謗 自守而不苟循 立志皎然 初無理致 昔人論徐邈之通介曰是 世人之無常而徐公之有常也 余於公 亦云 公諱漢英 字守而 系昌寧 遠有代序 在勝國 八世相繼爲平章事 入本朝名德蟬聯 曾祖僉知中樞府事諱大乾 祖司導寺主簿 贈吏曹判書諱景仁 考工曹參判夏寧君 贈吏曹判書諱文秀 妣全州李氏右贊成貞簡公直彦之女 公生于萬曆戊申 五歲通詩經 十二歲能述作 二十歲中生員一等 三十歲擢庭試壯元 歷成均館典籍直講江原道都事 遍遷栢府薇垣春坊玉堂天曹中書郞 司僕寺正知製敎 兼校書館校理漢學敎授 以仁祖實錄都郞勞 陞通政 歷承旨大司諫大司成吏禮兵刑工參議 兼承文院副提調 己亥後除職輒辭 不安在朝 求外出春川府使 丁未以大臣論薦 陞嘉善 拜漢城府右尹 襲封夏興君 歷刑禮參判 兼五衛都摠府副摠管京畿觀察使 庚戌八月 以左尹卒于第 吊祭贈如禮 十月葬于驪州五龍谷負艮之原 配星州李氏參議祗先女 婦德具備 聰明有識鑑 於君子 不但無違而多助焉 先公二年歿 葬祔公墓左 三男 曰通德郞建周早夭 曰殿周時任沔川郡守 卽出後者 曰憲周前金溝縣令 卽承祀者 六女正任座 都正金壽增 正郞朴乃章 士人申世壯 敎官洪碩普 奉事洪萬宗 其婿也 建周無男 有女婿 曰副提學林泳 實誌公墓 憲周五男 曰夏重夏盛夏望夏鍾夏挺 孫女及外孫男女又如干人 殿周有三男 曰夏彦夏奇 俱成進士 夏章 公事父母 盡禮於生死 內行甚修 莅官潔白 少時 學古文於澤堂李尙書 習禮服於沙溪金先生 二公將詡備至 及登朝 邃學高文 望臨一時 每當文衡之選 人皆屬意於公 而以晩塗差池 不果拜 士林爲之嗟菀 夏寧君 臨池之藝 妙一世而公亦早有趾美之譽 自中歲 廢而不事曰昔 人有謂牛溪筆法 不下於聽松 牛溪因此不以書自任 此其可則者也 嗚呼 公之大方 余旣叙之於前矣 又欲觀乎其細 亦可推類於此矣 銘曰

仁廟中興 俊乂風動 作成于晩 遺爲後用 有美曺公 闡科魁元 文與質備 忠求孝門 一疏扶義 三載南冠 靑靑松柏 獨也歲寒 歸自雪筶 譽聞益敭 孝廟嗣服 盛之玉堂 登筵勸講 底蘊是竭 侍臣有言 如聞六律 因災進箴 辭理俱到 聖心是嘉 錫以文豹 宵人竊名 擧世趨風 遏其進塗 不恤衆訌 嗟彼少年 磨淬圭角 難與共爭 自甘退伏 宸鑑孔昭 有諒其衷 爲之移官 俾避其鋒 遽遭天崩 遂左時路 依隱閑班 棲遲外府 抗直難容 從古以然 彼外至者 何疚何愆 及于季年 命德有頒 旣歎衰甚 且厭世紛 所不朽者 惟有文章 千古得失 載于縑緗 言公終始 亦云完好 結知明主 並節大老 餘外不遇 夫何爲慽 作詩詔後 可無媿色 嗚呼痛哉 先君 與季父金溝公 營此碑役而金溝公 治石搬運 逮丙子 先君 莅潭陽府 刻旣始而奄棄不肖 不肖遵奉先意 得以完了 至於額篆 先君 素閑籒法 嘗欲自寫而未及焉 不肖衰集遺字 且補闕漏 謹鐫刻用 副先君經紀之誠云爾 孫男夏彦 泣血謹識

上之三十有七年己丑七月 筵臣趙泰耉白上曰故參判曺漢英 庚辰一疏 大義凜然 虜以爲爲皇朝守節之人 與文正公金尙憲 一時北去 三年燕獄 終始不撓 有雪筶酬唱錄 行于世 其後 又因事有疏 孝廟以士夫氣節 當如是 稱之 朝家於尊周諸人 其所褒旌 有越常例 獨闕於此人 誠爲欠典 特命贈秩賜諡 實合於崇奬節義之道矣 上曰玆事合有褒嘉而未及爲之耶 左相徐宗泰曰曺某早以文章節義 望重於時而性 亢高 不喜交遊 以此 官位淹滯矣 國典 官正卿 乃贈諡而此則節義表著 特贈 恐無不可 上曰節義如此 贈職贈諡可也 於時贈資憲大夫吏曹判書諡文忠公 嗚呼 此可以增世道之重而慰士林之望矣 此一節 不載於碑文 故謹節錄而附其下云 尹拯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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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