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충장공 원호 신도비명
  • 복사
  • 해당 서브 사이트명 qr코드

    모바일로 QR코드를 스캔하면
    이 페이지로 바로 접속 할 수있습니다.

조선국 가선대부(嘉善大夫) 행(行) 여주목사 겸 경기·강원 양도 방어사 증(贈) 순충보조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겸(純忠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 영경연사감(領經筵事監) 춘추관사(春秋館事) 세자전(世子傳) 원창부원군(原昌府院君) 시충장원공(諡忠壯元公) 신도비명병서(神道碑銘幷序)

대광보국숭암대부(大匡輔國崇岩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겸 영경연홍문관(領經筵弘文館)·예문관(藝文館)·춘추관(春秋館)·관상감사(觀象監事) 세제(世弟) 사치사(師致仕)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1) 찬(撰).

7대손 가선대부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겸 관리사(管理使) 인손(仁孫) 삼가 씀.

가선대부 호조참판겸동지성균관사(戶曹參判兼同知成均館事) 김시묵(金時默) 전액함.

임진란에 임금을 태운 수레가 파천하고 온 나라가 붕괴되니 동토 수 천리에 서쪽으로 평양까지 북으로는 경성까지 왜구들에게 유린당하니 마치 무인지경을 치닫는 듯하였다. 오직 강원도 조방장(助防將) 원공(元公) 호(豪)만이 외롭게 군대를 거느리고 홀로 적진 속에서 지탱하였고 다시 큰 적을 섬멸하여 한 모퉁이나마 보전하였으며 고개를 넘어오는 적을 감히 서쪽으로 향하고 서울로 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절제로서 인행을 마치니 사람의 지업(志業)이 아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도 성공하였으며, 절개를 본받고 죽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백여 년이나 지났건만 전해오는 그의 일들은 어제일 같이 분명하다.

슬프다! 정말로 눈물이 흐를 뿐이로다. 공은 원주인(原州人)이고 중영(仲英)은 그의 자(字)다. 가정(嘉靖) 계사(癸巳)년에 태어나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스스로 학문에 힘썼다. 이진(頤眞) 김공(金公)을 따라서 경사(經史)와 제자(諸子)를 통달하고 윤오음(尹梧蔭) 월정(月汀)과 이약포(李藥圃)와 더불어 서로 벗이 되어 친분이 두터웠는데 그들이 모두 벼슬에 나가자 탄식하여 말하되, “내가 저 소년배들을 따라서 머리를 숙이며 문필을 같이 논하는 게 옳은가!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수립한 것을 돌아보면 어떠한가? 하필 문(文)만을 하리오?”라 하고 정묘(丁卯)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으로부터 육품에 오르고 내외 요직을 두루 거쳤는데, 지금 기록할만한 것만 보더라도 경주(慶州)에서 통판(通判)이 되었고 운산(雲山), 단천(端川)에서 군수를 지냈으며 경흥(慶興), 경원(慶源)에서 부사(府使)를 지냈다. 경원에서 있을 때에 통정(通政)의 품계에 올랐다. 부중(府中)에 있을 때에 오랑캐의 난리가 있었다. 공이 소속 군대를 거느리고 북으로 깊이 쳐들어갔는데 그때 마침 매우 추었다. 종일토록 활을 쏘아 손가락이 모두 얼어서 떨어지니 일군(一軍)이 모두 놀랐다. 이광(李洸)이란 사람이 있어 복명(復命)이 내려 왔는데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고 거짓으로 보고하여 공을 파직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지 한해가 못되어 남방에 자주 소란이 일어나자 특별히 군사를 맡길 만한 장수를 세 사람을 뽑았는데 제일먼저 공을 전라우도 수군절도사로 삼으니 공은 더욱 감격하여 스스로 전력을 다하였다. 마침 좌도에 왜구의 침범이 있다고 보고하자 공은 장계를 올리지 않고 형편도 멀어 서로 도와주지 못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오히려 법으로 죄를 주어 귀양을 보냈다가 얼마쯤 지나서 석방되어 만포첨사(滿浦僉使) 평안우후(平安虞侯)를 역임하였다.

임신(壬辰)년에 이르러 공은 관직에서 해임되어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왜구가 침범했다는 말을 듣고 곧 성에 들어갔다. 마침내 공으로 강원도 조방장(助防將)이 되었다. 공은 명을 받고 동으로 가서 군대를 거두어 평해(平海)에 이르니 마침 이광(李洸)이 호남을 조사해 보고 적을 두려워하여 감히 나가 싸우지 못하였고 또 각처의 근왕병을 피하여 곧 격문을 옮겨 이르되 “아마도 왜병이 영을 넘어 왔으니 국가의 일은 이미 끝났다.” 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진영이 모두 무너지고 공의 군대도 놀라서 무너졌다. 마침내 원주와 여주에 돌아와, 고을의 군대 약간을 모아서 여주 신륵사에서 적을 공격하여 섬멸하였다.

이때에 임금은 서쪽으로 피난을 하였는데, 이 전공을 보고 받고 크게 기쁘게 여겨서 가선(嘉善)의 품계를 주고 여주목사 겸 경기, 강원의 양도 방어사로 삼았다. 적의 대군이 원주에 포진하여 있고 여주에 주둔한 군대들도 그 형세가 매우 강하고 거칠었다. 공이 밤에 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수백 명의 수급을 노획하고 살상시킨 것만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군대의 형세가 비록 크게 떨쳤고, 적의 왕래를 단절하여 이에 서쪽으로 이천, 광주와 북으로는 지제, 양주에 이르기까지 모두 편안하고 적의 칼을 보지 못하였으니 모두 공의 힘이다.

얼마쯤 지나서 강원순찰사 유영길(柳永吉)이 격문을 보내어, 공에게 북을 공격하게 하니 적은 공이 떠난 것을 알고 위로 진격하였으나 다시 방어하는 자가 없었다. 동으로 갔던 적들이 마침내 서울로 들어갔다. 공이 군사를 거느리고 김화(金化)에 이르러 갑자기 큰 적과 더불어 싸우다가 형세가 불리하여 대적할 수 없음을 알고 급히 군대를 거두어 산상으로 올라가 적을 방어하고 종일토록 싸워서 적을 죽인 수효가 많았으나 공의 군사도 쇠진하였다. 다만 휘하 장수 이돈(李暾)등 육·칠인이 공의 곁에 있어 기세 더욱 분격하여 활을 쏘아 적 수십명을 죽이니 적이 조금 후퇴하였다. 얼마 후 다시 크게 쳐들어오니 공은 화살도 다 떨어지고 힘도 다하였다. 공이 돈 등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 혼자 죽겠다. 너희들은 꼭 나와 함께 죽을 필요가 없다.”라 하고 마침내 스스로 천 길 낭떠러지에 몸을 던지니 적은 공이 항거함에 분노하여 공의 머리를 베어 현문에 달아 놓았다. 현의 백성들은 슬퍼하여 공의 시체에 표를 하였다가 밤에 몰래 공의 시신을 거두어 원주 서쪽 두산(頭山) 선영 을좌(乙坐)언덕에 장례를 지내 주었다.

황조(皇朝)에서 우리나라 순절인들에게 녹을 주었는데 공의 집에는 백금 이십 양을 하사하였다. 우리 선조대왕께서는 특별히 공을 병판(兵判)으로 추증하시고, 공의 부인에게 녹봉을 주었다. 효종조에 와서는 충장금화유사(忠將金化儒士)라고 시호를 내리고,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원주에서도 충렬사에 제사를 지냈다.

공은 효도로써 어머니를 섬기고 형 수사공(水使公) 양(亮)을 정성으로 받들었으며, 그의 친구를 공손한 태도로 대하였다. 수사공의 가산이 몰락하자 공은 자기 재물을 나누어 도와주고 공이 맛있는 음식이 한 가지 생기면 먼저 형에 드린 뒤에 먹었다. 자제들은 의로 가르치고 공이 조방(助防)의 명에 응해서는 공의 아들 원계공(原溪公)이 먼저 호서 지방으로 가게 되어 장차 떠나려 하면서 아버님께 청하여 이르되 “동남의 일은 모두가 군왕의 일인데, 대인들이 따르는 자 하나도 없으니 어찌 조정에 고하여 아버님과 함께 가지 않으리오.” 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그것은 불가하다. 소속의 일이 이미 서로 다르고 군법은 지엄하니 용납할 수 없다. 부자는 사사로움이다.” 라고 하고 마침내 울면서 이별하였다. 군에 있을 때에 친척집 아들이 명령에 게을리 한 자가 있었는데 공이 그 아비를 꾸짖어 말하기를, “이는 네가 아이를 가르치지 못한 죄이다. 내 남의 집일을 간섭하기 좋아하지 않으니 네가 대신 하여라.” 라고 하였다. 그 아버지가 황공하여 일을 진행하였다. 종친과 당을 은혜와 믿음으로 대하였으나 죄를 지은 데 대해서는 일찍이 조금도 용서함이 없으니 사림이 모두 두려워하면서도 그를 공경하였다. 오직 불의(不義)의 소문을 두려워하였다. 스승이 돌아가신 날에는 문득 제물을 차려 그 집을 위로함을 종신토록 약하게 하지 않았다. 성품이 청백하여 단체에 있을 적에 사랑하는 첩이 은가락지를 산 것을 보고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여기는 은이 생산되는 땅인데 내가 여기에 군수가 되었으니 어찌 집사람으로 하여금 이런 물건을 소지해서 되겠는가. 빨리 버려라.” 라고 하였다.

호남의 궐문에서 돌아왔을 때에 그의 행장에는 다만 몇 권의 책만 있었을 뿐 다른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이와 같이 청백하였으므로 서울과 시골에 한 채의 집도 없었고 의식도 모두 수사(水使)에서 의존하였다.

공은 천성이 어질고 남을 관용하였으므로 그는 가끔 남에게 해를 입었지만 일에 임해서는 사람의 말을 무턱대고 따르지 아니하였고 남의 앞에서는 권세 있고 귀한이라도 잘못되면 그대로 거절하여 비록 죄에 연루되는 한이 있어도 굽히지 아니하였다. 이 때문에 공을 아는 사람이 많았다.

공은 고려 시중 휘(諱) 홍필(弘弼)의 9대 손으로 본조 도관정랑(都官正郞) 황(滉)은 그의 5 대조이다. 할아버지의 휘는 팽조(彭祖)로 무과에 급제하여 도끼를 잡고 전쟁에 나간 일이 세 번이나 있었다. 아버지의 휘는 송수(松壽)이니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마침내 첨추(僉樞)에 이르렀고, 어머니는 순흥(順興) 안씨 성균생원 환(環)의 딸로 공조참의(工曹參議) 요향(堯鄕)의 손이다. 부인 김씨는 상주 대성이니 아버지는 승훈랑(承訓郞)인데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고 자제를 가르침에 엄숙하였다. 늘 공이 비명에 죽었음을 애통히 여겼다. 공이 죽은 뒤 23년 만에 죽으니 공의 묘소에 합장하였다.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으니 딸은 사인(士人) 봉량(奉良)에게 시집을 갔는데 아들이 없어 족친의 아들 벽(璧)을 양자로 삼았다. 아들 유남(裕南)은 무과에 급제하여 정사훈(靖社勳)에 봉해졌고 벼슬은 지중추(知中樞)에 이르렀으며 원계군(原溪君)에 봉해졌다. 은혜를 추급하여 공은 순충보조공신의(純忠補祚功臣議) 정원부좌의정(政原府左議政) 창부원군(昌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원계(原溪)는 이남일녀가 있었는데, 장남 두표(斗杓)는 정사공(靖社功)으로서 원평부원군(原平府院君)에 봉해졌고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다

둘째는 두추(斗樞)로 광주부사(廣州府事)를 지냈고 딸은 현감 윤우(尹堣)에게 출가했다. 원평은 아들 셋, 딸 하나를 두었는데 큰아들 만석은 황해감사이고, 둘째 만리(萬里)는 평안감사, 다음 만춘은 한성우윤이었으며 딸은 판서 이민서(李敏叙)에게 출가했다. 부윤은 딸만 셋을 낳고 아들이 없어서 형의 아들 만리(萬里)로 뒤를 잇게 하였다. 딸은 좌의정 박세채(朴世采)에게 출가했고, 다음은 참봉 신전(申銓)과 현감 홍수렴(洪受濂)에게 출가했다. 현감은 아들 하나가 있었으니 세미(世美)였고 황해감사는 아들이 없어 우윤(右尹)의 아들 몽전(夢殿)으로 양자를 삼았다. 평안감사는 두 아들과 두 딸이 있었다. 큰아들 몽린(夢鱗)은 흥평위(興平尉)이고 둘째 몽익(夢翼)은 현감을 지내고, 딸은 사인 이홍미(李弘美)와 참봉 김수지(金壽至)에게 출가했다. 우윤(右尹)은 아들 둘, 딸 셋을 두었는데, 큰아들 몽정(夢鼎)은 첨추(僉樞), 둘째는 몽은(夢殷), 딸은 판서 권상유(權尙游) 현감 이당(李簹), 참봉 이수(李秀)에게 출가했다. 공의 아들과 손자들은 모두 인각(麟閣)에 오르고 국가에 큰 공을 세웠다. 윤평공의 덕업은 크고 또 컸으며 당세의 명재상이었다 공의 형제의 행적을 살펴보면 모두 한결같이 조정에 현달하였고 이제 후생들도 모두 법도를 지켰다 아! 아! 공의 업적이 이처럼 멀리 내려온다. 몸을 죽여 인을 성취하니 반드시 근본이 있을 것이다.

비명에 이르기를 적을 막은 공로는 매우 높고 의리는 매우 깊도다. 임금을 위하여 순직하였다. 공을 이룩함이 저와 같으니 하필 문학만을 숭상하랴! 공의 일생을 살펴보면 후덕하기 그지없다. 이에 그 후손도 현달하여 경사 거듭하였다. 능을 골짜기에 옮기어 사람을 한결같이 칭송한다. 내 이 돌에 새기어 자손 대대로 추모하게 한다.

숭정(崇禎) 기원후 3무자(戊子, 1768) 9월 일 세움.

공이 죽은 지 지금까지 70여년이나 되었다. 비문을 갖추어 놓은 지 이미 오래 이건만 비석에 새길 겨를이 없었다. 다만 짧은 표만 남겨 공의 장렬함을 나타내지 못하였다. 후에 도모하고자 한다. 많은 후손들이 비로소 비석에 기재되었으나 현손 이하는 기록되지 않았다. 참판 원양군에 추증된 명설(命卨)은 몽은의 아들이고, 목사 명상에 추증된 명구(命龜)는 몽린의 아들이고 도정명익(都正命益)과 현감 판서에 추증된 명직(命稷)은 몽정의 아들이고 명설의 아들 경렴(景濂)은 참판을, 원흥군(原興君) 명구의 아들 경하는 판서를, 치사 명직(命稷)의 아들 경순(景淳)은 판서를 각각 지냈다. 경하의 두 아들은 유수(留守) 인손(仁孫)과 대사간(大司諫)의 의손(義孫)이다. 7대손 생원 익손(翼孫)은 덧붙여 기록함.

忠壯公元豪神道碑銘

朝鮮國嘉善大夫行麗州牧使兼京畿江原兩道防禦使 贈純忠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義政兼領 經筵事監春秋館事世子傳原昌府院君諡忠壯元公神道碑銘幷序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義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弟師致任 奉朝賀 崔奎瑞 撰

七世孫 嘉書大夫開城府留守兼管理使 仁孫 謹書

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成均館事 金時默 篆

壬辰之難 大駕播遷 擧國崩潰 東土數千里 西至平壤 北盡境城 盡爲倭奴 藪穴蹂躙 斬伐若無人者 唯江原道助防將元公諱豪 以孤軍 獨立於賊路路之衝 再殲巨陣 力保一隅 使踰嶺之賊 不敢西向而近京 卒以節制 非人志業 未究而遂 以效節而死 至令百歲之後 傳其事者 炳然如昨日 嗚呼 其可爲流涕也已 公原州人 仲英其字也 以 嘉靖癸巳生 蛋孤而能自力學 從頤眞金公 通經史諸子 與尹梧蔭月汀 曁李藥圃 諸公相友 善同治擧子業及 諸公俱釋褐則歎曰 吾其可復從少年輩 屈首治華硯哉 士生斯世 顧樹立如何耳 奚必文 登丁卯武科 由宣傳官陞六品 歷試內外 今其可記者 於慶州爲通判 雲山端川爲郡守 慶興慶源爲府使 而以慶源故陞通政階 在府有尼胡之亂 公領所部深入 時甚寒 終日手兮 指爲之 墮 一軍皆驚 有李洸者 奉使多無狀以事嗛 公中以法罷歸 未幾 南方數有警極還柯閫者三人 而首以公 爲全羅右道水軍節度使 公益感激自勵 適左道有倭報 而住剳遠勢 不及相救 朝廷猶以法坐配 尋放還 歷滿浦僉使平安虞侯 及壬辰 公解官家居 聞倭變卽入城 遂起公爲江原助防將 公愛 命 而東行收兵 至平海 會李洸按湖南 畏賊不敢進 且忌諸路 勤 王 乃移檄曰 疑兵踰嶺 國事已矣 於是諸鎭皆潰 公軍亦駭散 遂脫身 還原驪間 召募鄕兵 得若干人 擊賊于驪州神勒寺 殲之時 上西幸 報聞大嘉之 陞嘉善階拜驪州牧使兼京畿江原兩道防禦使 賊大陣在原州 連營碁布 而其據驪州 龜尾浦者 尤鴟張 公夜襲擊大破之 獲數百級 他殺傷不可勝計 軍勢雖大 振賊往來之路斷絶砥 是西自利廣 北至砥楊 皆晏然 不見賊鋒 公之力也 旣而江原巡察使柳永吉檄趣 公擊北路 賊公去 而上游 無復捍禦 東路之賊 遂入京 公引兵至金化 猝與大賊 勢不能敵 急收兵山止 以禦之戰 終日所殺賊其多然 公兵亦盡矣 只摩下李暾等 六七人在側 公氣益奮 手射賊十數人 賊少却已 而復大進 公矢盡力窮 顧暾等曰 事至此 吾死義也 爾等不必與吾俱死 遂自投千仞之壑 賊怒 公抗義取 公頭縣之縣門 縣人哀之 爲標公屍 夜取頭幷藏之得 歸葬于原州西 使頭山先塋 乙坐之原 皇朝東國殉節人 賜公家白金二十兩 我 宣廟特贈公 兵曹判書 給公夫人月俸 孝宗朝 追諡忠壯金化儒士 建義立祠俎豆之 而原州亦幷享于忠烈祠 公事母孝 奉先誠於兄水使公亮 盡其友慕居則 必同堂湛樂 水使公産業頗饒 公用之如已物 而公亦得一味 輒先進而後敢食 敎子弟以義 當公膺助防之 命 公子原溪公 先被湖西 辟將行請曰 東南皆 王事 而大人無從者 盍言於 朝與俱 公不可曰 所屬旣異 而軍法至嚴難客 父子私也 遂泣訣 在軍有族子 慢於聽令者 公責其父曰 此汝不敎兒過也 非吾好家法 汝可代之 其父惶恐趨事 待宗黨以恩信 而至於作過 亦未嘗小怒 人皆畏敬 惟恐以不義聞 尊慕亡師忌日 輒設素存 撫其家終身不衰 性淸 向在端川 見侍妾 買銀指環 驚曰 此産銀也 而吾宰此 寧可使家人 有此物耶 丞去之 及自湖閫還 橐中只有數卷書 無他物 以此 京鄕無第宅 衣食皆資於水使 公天資仁恕其於人 惟恐或傷之然 臨事激昻不能隨 人前却視權貴 若無雖坐 此蹭蹬識者 以此多之公 高麗侍中諱弘弼之九代孫 本朝都官正郞諱滉 其五代祖也 祖諱彭祖 以武進 秉鉞三鎭者 諱松壽 登武科 官終僉樞 妣順興安氏 成均生員珣之女 工曹參議堯鄕之孫 夫人金氏 尙州大姓 父曰 承訓郞光厚 治家有法度 敎子弟嚴 而勤痛公非命 平生不御華美 後公二十三年 而歿祔于公墓 生一女一男 女適士人奉良 臣無子 以族人子壁後 男裕男登武科□靖社勳 官至知樞 封原溪君 推恩 贈公 純忠補祚功臣議政原府左議政昌府院君 原溪有二男一女 長男斗杓以 靖社功 封原平府院君 官至左議政 次斗樞廣州府尹 女適縣監尹堣 原平三男一女 男長萬石黃海監司 次萬里平安監司 次萬春漢城右尹 女適判書李敏叙 府尹生三女無子 以兄子萬里後 女適左議政朴世采 次參奉申銓 縣監洪受濂 縣監一男世美 黃監無子 以右尹子夢殿後 平監二男二女 男長夢鱗興平尉 次夢翼縣監 女適士人李弘美 參奉金壽至 右尹二男三女 男長夢鼎僉樞 次夢殷 女適判書權尙游 縣監李簹 參奉李秀蕃 公有子若孫 幷躋麟閣 功臣 邦家 而原平公德業偉然 爲世名相監司 公昆季趾美世蹟 並顯于一朝 今後生輩亦皆訴訴守法度 嗚呼 公之業 其遠矣 殺身成仁 其必有本矣 銘曰

功高捍賊 義著殉君 樹立則然奚必於文 觀公本末所蓄者厚 寔發其餘以愛于後 陵移谷遷 人口皆碑 我銘斯石 子孫之思

崇禎紀元後三戊子九月 日立

公歿距令間有七十七年 文之成亦已久矣 而顯刻未遑 只有短表 無以揚公之烈 而詔請後謀之 諸孫始登蠟石 玄孫以下顯子曰 贈參判原陽君命卨 夢殷之子 牧使 贈領相命龜 夢鱗之子 都正命益 縣監 贈判書命稷 夢鼎之子 命卨子景濂參判 原興君命龜子 景夏判書 致仕命稷子 景淳判書 景夏二子 留守仁孫 大司諫義孫也 七世孫 生員翼孫追識

콘텐츠 만족도 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어느 정도 만족하셨습니까?

만족도 조사

담당자 정보

  • 담당부서 문화예술과
  • 담당자 조원기
  • 연락처 031-887-3582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