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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불교와 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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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여주를 대표했던 사원으로는 고달사(高達寺)와 신륵사(神勒寺)를 들 수 있다. 고달사는 현재 북내면(北內面) 상교리(上橋里)에 그 유적이 남아 있다. 이 사찰은 764년(신라 경덕왕 23)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장악하고 남한강의 유리한 수로(水路)를 확보하기 위해 그 배후지에 거대한 사원을 경영했던 듯 하며 이 같은 배경에서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선종사원으로서 대표적인 3원(三院)이었던 고달원(高達院)·도봉원(道峰院)·희양원(曦陽院) 가운데 하나로서 고려 광종 이후 역대 임금의 비호를 받으며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다.

고달사지1)에서 가장 오랜 기록은 원종대사비(元宗大師碑)이다. 이 비문에 의하면 원종대사가 13세에 상주 공산(公山)의 삼랑사(三郞寺)에서 출가해 융제(融諦) 선사의 주선으로 혜목산 심희(審希) 선사의 제자가 되었고 그후 고달사의 법통을 이어갔다고 한다. 심희는 선종구산문(禪宗九山門) 가운데 봉림산문(鳳林山門派)을 개창했던 분으로 혜목산 고달사에서 29년 동안 주석하고 있던 원감국사(圓鑑國師) 현욱(玄昱)의 법통을 전수받은 제자였다. 현욱은 837년(신라 희강왕 2)에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선풍(禪風)을 크게 떨쳤던 분이다. 고달사지에는 보물 제7호인 원종대사혜진탑(元宗大師慧眞塔)과 원종대사혜진탑비귀부(元宗大師慧眞塔碑龜趺) 그리고 보물 제6호 이수(螭首), 국보 제4호 부도(浮屠) 등 고려시대에 제작되었던 유물과 발굴조사를 통하여 조사된 상감청자뚜껑, 분청사기, 백자편 등의 매장유물 등으로 9세기 말부터 조선시대까지 꾸준하게 지속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신륵사에는 보물 제228호 신륵사 보제존자석종(神勒寺 普濟尊者石鐘), 보물 제229호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神勒寺 普濟尊者石鐘碑), 보물 제231호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神勒寺 普濟尊者石鐘 前 石燈), 보물 제230호 신륵사 대장각기비(神勒寺 大藏閣記碑) 등이 남아 있어 고려시대 말기 나옹 혜근 (懶翁慧勤, 1320~1376)2)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나옹은 인도의 지공(指空)과 중국의 평산(平山)에게 공부한 스님으로, 고려 말기 보우(普愚)와 함께 임제종(臨濟宗)을 일으켜 간화선(看話禪)을 널리 선양한 분이다. 양주 회암사(會巖寺)의 주지가 되어 사찰 중창에 전력하였으며, 1371년 공민왕으로부터 금란가사의 내외법복, 바리를 하사받고 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보제존자(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總攝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에 봉해졌다. 신륵사와 관련된 나옹의 행적은 신륵사 보제존자석종과 김수온의 『보은사기(報恩寺記)』를 참고할 수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신륵사는 나옹이 도를 펼쳤던 곳으로 목은 이색(李穡)과 함께 이곳에 머물며 교유하였다고 되어 있다.

고달사와 신륵사 외에 고려시대의 불교가 어느 정도 성행했는지를 보여주는 유물이 약간 남아 있다. 고려시대의 석탑으로는 여주시 상동에 있는 보물 제91호 창리 3층석탑과 하리 3층석탑, 보물 제226호 신륵사 다층전탑(神勒寺 多層塼塔) 등 3기만이 남아 있다. 이들 유물들은 양식적으로 상당히 주목되는 것이다. 신라 이래의 전형양식(典型樣式)을 계승한 석탑으로 평가하는 하리의 석탑, 사리공(舍利孔)과 더불어 동제여래입상(銅製如來立像, 높이 4.4cm) 1구가 발견된 창리의 석탑, 그리고 탑의 재료가 벽돌인 신륵사의 다층전탑은 여주지역의 불교문화가 중앙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상당한 인적·물적 교류가 있던 지역이었음을 상징하고 있다. 또한 불상으로는 금사면 외평리에 위치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5호 포초골미륵불, 흥천면 계신리에 있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8호인 마애여래입상, 금사면 도곡리에 있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0호인 도곡리 석불좌상 등 3구가 있다. 포초골미륵불은 소발(素髮)의 머리위에 3단으로 다듬어진 사각형의 갓을 얹어 놓은 불상으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을 지니고 있다. 계신리 마애불은 남한강변의 남향한 자연암벽에 조각되어 있는 불상으로 원만한 상호, 유려한 의문, 당당한 어깨, 연화문 등에서 신라시대의 양식을 엿볼 수 있고, 도곡리 불상은 팔각대좌 위에 결가부좌의 자세로 앉아 있는데 9세기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평가한다. 이 같은 전 시대의 양식 계승은 중앙문화와의 연계성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참고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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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