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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성씨들의 입향과 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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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거주했거나 현재에 거주하고 있는 여주 관내 성씨들의 여주와의 인연은 크게 세거(世居)와 세장(世葬)의 두 형태로 분류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상호 관련되어 있다. 여주로의 입향 이후 한 지역에 세거하면서 부근에 묘를 쓰다보면 자연스럽게 세장지(世葬地)가 형성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묘를 먼저 쓰고 그 인연으로 묘막살이를 하거나 제사, 또는 그 관리를 위한 여주로의 입향이 세거와 연결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 후자, 즉 장지(葬地)를 인연으로 거주가 이루어지는 경우는 여주지역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들이어서 이 지역의 특징으로까지 설명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재경(在京) 사족들의 입장에서 보면 어떠한 연고도 없는 상태에서 여주를 단순히 장지로만 선택하기에는 적잖은 부담을 주게 된다. 그래서 여주 입향의 동기로 중요시할 수밖에 없는 요인이 바로 처가와의 인연이다. 즉 여주에 터전을 가진 기존 사족, 혹은 집안과의 혼인을 계기로 주거지나 장지를 마련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성씨별로 이러한 입향의 추세를 보면 위에서 언급한 장지 선택, 통혼, 봉제사 외에도 같은 성씨 내에서의 분파와 이의 연결이 그 계기를 마련하기도 한다. 여주의 경우 특히 거성(巨姓), 또는 권문(權門) 성씨의 경우 계파간에 입향시기가 조금씩 다른 것은 이와 같은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같은 성씨 안에서의 분파는 여주 입향 전에 일어나기도 하고 입향 후 여주 관내에서의 주거지 이동에 따라 일어나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는 입향시기가 비교적 빠른 성씨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다.

여주 입향의 추이에서 고려되어야 할 또 다른 변수는 별서지(別墅地)로서의 여주지역의 기능이다. 별서란 별장과 같은 의미로 잠시 머무는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사족들은 벼슬에서 잠시 물러나면 서울 집을 정리해야 하는데, 자신의 고향이 서울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야말로 낙향(落鄕)이 되어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 같은 생각에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서울 근처에 살 만한 곳을 정하게 된다. 인조반정 이후 공신들이 맺었다는 야사적인 밀약 중에도 근기를 벗어나지 말라는 내용이 들어있는 것도 이러한 정서를 반영한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서울에서 가까운 지방이란 의미의 근기(近畿)는 임금이 머물고 있는 서울 도성과의 접근성이 그 기준이 되며, 이에 따라 그 범위도 정해진다. 양반들이 근기에 별서를 두려고 한 것도 여기에 그 주된 동기가 있다. 한강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남한강과 북한강을 포함하여 동서를 잇는 긴 축의 강상 수로인 때문이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들도 이 긴 수로를 이용하여 서울을 왕래하였다. 여유가 있는 집안에서는 친지간에 왕래가 쉽도록 서로 강변 가까운 곳에 주거를 정하였다. 여주의 경우를 보더라도 유명 사대부들의 집이 주로 강변 부근에 포진해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양반뿐 아니라 상인들도 이 수로를 이용하기 위해 강변에 거처를 정하였다.

그러므로 남한강 뱃길이 닿는 여주는 서울에서 가깝지 않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양반들이 선호하는 별서지였다. 여주에 거성 사족이 많은 것은 이러한 지리적 조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이포 나루가 있는 천양의 남양 홍씨가 바로 그 경우인데, 이들은 12대를 내려오는 동안 현종 때 영의정을 지낸 홍명하 등 9명의 정승을 낸 집안이다. 영의정과 대제학을 많이 낸 해평 윤씨, 명성황후를 낸 여흥 민씨, 정승과 판서를 많이 낸 창녕 조씨 등도 예외가 아니다.

여주 일대는 이미 조선 이전부터 당대의 거족들 대부분이 연고를 두고 있던 지역이지만 이와 같이 조선에 들어와서도 이전의 송도 중심에서 한양 중심으로 그 축이 조금 남쪽으로 이동하였을 뿐 서울의 벼슬살이에서 밀려나면 복직이 될 때까지 잠시 머무는 집인 별서, 즉 별장을 마련하고 있던 곳이다.

조선중·후기에 이르면 이러한 별서나 혹은 묘막들이 시골집, 즉 향제(鄕第)와 같이 씨족끼리 집단으로 거주하는 마을로 변화한다. 한산 이씨 중 선조 때 영상을 지낸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1538~1609)의 집안은 서울 황화방(皇華坊), 연지동(蓮池洞), 회현방(會賢坊) 등에 서울집, 즉 경저가 있었고, 광주(廣州)의 돌마(突馬), 경안(慶安) 등에 별서를 두었는데, 그의 5대조 이계전(李季甸, 1404~1459)의 산소가 여주에 있는 것처럼 곳곳에 여주와 인연을 두고 있어서 이를 계기로 17세기 후반에 양도공파(良度公派), 양경공파(良景公派) 등 이곳에 들어와 살게 되는 일가들이 나타난다.

또한 조선후기에 이르면 일부 자손들이 누대에 걸쳐 인근에 주거지를 확대해감에 따라 임시로 거주하던 별서가 향제, 즉 지속적인 거주지로 변화해가는 현상도 나타난다. 이러한 집성촌의 형성은 경저로의 귀경이나 향제로의 낙향이 모두 어려워진 상황에서 비롯되기도 하는데, 18세기 이후의 기호남인 집안에서 그 예를 발견하게 된다. 별서가 있는 지역에서의 정착은 양반층의 경우 관직등용이 계기가 되어 향제를 떠나 상경하였다가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나 향제에서 바로 별서로 이동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대부분이 조상 묘를 근거로 하기 때문에 정착 동기를 “종토를 깔고 앉는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입향 시기를 기준으로 48개 세거 성씨들의 정착과정과 정착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조선 이전부터 세거해온 성씨들을 보면 모두 7개의 성씨가 있다. 이중 여흥 민씨, 여주 이씨 등 여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 외에도 원주 원씨, 해평 길씨, 단양 우씨, 영산 신씨, 무송 윤씨, 밀양 박씨 등이 있다. 여흥 민씨와 여주 이씨, 그리고 무송 윤씨 등에서는 타지로 나갔다가 17세기에 다시 입향한 사례들이 보인다.

조선초 이후 16세기 전반까지 충청도 대전, 또는 회덕에 살던 여흥 민씨들 중 일부가 다시 상경하여 경기도 양주에 정착한 시기는 20세 광훈의 고조인 16세 제인(齊仁, 1493~1549) 때다. 그의 현손인 민광훈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이들이 각기 여주에 묘를 두어 지역적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첫째인 21세 시중(蓍重, 1625~1677)은 능서면 오계리 숭계동 마을 북쪽 구릉에 묻혔다. 입향시기는 17세기 후반으로 여주읍, 흥천면, 점동면, 가남면 등으로 거주 영역을 확대한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이천, 음죽 등으로 퍼진다. 둘째인 21세 정중(鼎重, 1628~1692)의 묘는 여주읍 하거리에 위치한다. 후손들은 하거리와 점동면 구부곡(求富谷) 등에 주로 분포하였다. 19세기에 들어와 원주, 이천, 음죽, 충주 등으로 남한강 줄기를 따라 묘의 위치가 확대된다. 셋째인 21세 유중(維重, 1630~1687)의 묘는 여주읍 능현리에 있다. 민유중의 장남 민진후의 후손들은 근동면과 점량면, 즉 현 점동면 섬락리, 신진리, 신대리, 단수리를 비롯하여 강천면 이호리와 가야리, 가남면 안금리, 주내면 황학리 등지에 묘를 썼다. 민유중의 차남 이하 5남까지인 진원(鎭遠), 진영(鎭永), 진창(鎭昌), 진오(鎭五)의 후손들은 여주 아래인 죽산, 음죽 및 충청도 충주 등으로 퍼졌다. 이들과는 다른 계통으로 여주에 세거한 여흥 민씨가 있는데, 13세 장절공(章節公) 건(騫, 1394년생) 때 와서 3남 신건(信達) 때 이곳 북면(北面) 천서동(川西洞, 현 북내면 천송리)으로 온 이후 후손들이 살아왔다.

여주 이씨들은 인덕(仁德)을 시조로 하는 근기계열이다. 이들의 입향조(入鄕祖)는 둘이다. 첫째는 15세 우량(友諒)으로 흥천면 율극리(栗極里)로 입향한 후 31세손에 이르기까지 여주 관내에 80여 호를 구성하고 있다. 다른 한 파는 시조 인덕의 16세 상충(尙忠)의 후손으로 가남면 연대리(蓮台里)로 입향한 시기는 17세기 초반경이 된다.

원극유(元克猷)를 시조로 하는 원주 원씨의 여주 입향은 14세기 초경으로 11세 충갑(沖甲)이 강천면 강천리로 왔다, 12세 선장(善長)의 묘가 북내면 상교리에 있다.

해평 길씨는 7세 연지(漣之)의 입향을 시작으로 이곳에 정착하였다. 능서면 왕대리에 많이 산다. 단양 우씨는 흥천면 계신리 외에 대신면 윤춘리, 송촌리 갈산 등지에 60여 가구가 거주한다. 14세기 후반경 우홍부가 이곳에 터를 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영산(靈山) 신씨(辛氏)는 고려 말에 12세 신종선(辛從善)이 대신면 후포리에 정착하였다. 밀양 박씨는 고려 말엽에 문신 박득중(朴得中)이 개성에서 이곳으로 왔다. 금사면 소유리, 대신면 천남리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무송 윤씨는 여말선초(麗末鮮初), 15세기 후반, 그리고 18세기 초반에 각기 다른 파들이 들어왔다. 장령공파의 4세 식(湜)은 1310년(고려 충선왕 2)에 태어났으며 지평(持平)을 지냈고 대신면 계림리에 묘가 있어, 이때 여주 입향의 계기가 마련되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여주로의 확실한 입향은 7세 징(澂, 1430~1504) 때로 묘는 대신면 보통리에 있다. 대사성공파는 17세 우삼(遇三, 1675~1755)의 입향시기는 18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금사면 금사리, 전북리, 대신면 보통리에 퍼져 있다.

조선에 들어와서 입향한 성씨들을 세기별로 구분해보면 15세기에는 원주 원씨 등 9개 성씨, 16세기에는 20개 성씨, 17세기에는 8개 성씨, 18세기에는 3개 성씨, 그리고 19세기에는 1개 성씨가 보여 여주에서는 16세기에 들어온 성씨들이 주로 세거기반을 마련하고 누대에 걸쳐 살아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성씨별 여주 입향시기

  • 고려시기
    • 여흥 민씨 - 고려 및 17세기 후반
    • 여주 이씨 - 고려 및 17세기 초반
    • 원주 원씨 - 14세기 초반(始祖 : 元克猷)
    • 해평 길씨 - 고려 후기
    • 단양 우씨 - 14세기 후반
    • 영산 신씨 - 고려 말기
    • 무송 윤씨 - 여말 선초, 15세기 후반, 18세기 초반
    • 밀양 박씨 - 여말 선초
  • 15세기
    • 원주 원씨 - 15세기 중반(첨추공파), 15세기 후반(참판공파), 15세기 말엽(관란공파)
    • 안동 권씨 - 15세기 중반 16세기 초반
    • 성주 이씨 - 15세기 중반
    • 합천 이씨 - 15세기 중반
    • 배천 조씨 - 15세기 중반
    • 능성 구씨 - 15세기 중반, 16세기 중반
    • 청주 곽씨 - 15세기 중반
    • (구)안동 김씨 - 15세기 중반
    • 평택 임씨 - 15세기 후반, 16세기 초반, 17세기 중반
  • 16세기
    • 원주 원씨 - 16세기 초반 (始祖 : 元鏡)
    • 파평 윤씨 - 16세기 초반
    • 전주 유씨 - 16세기 초반, 17세기 후반
    • 남평 문씨 - 16세기 초반
    • 밀양 변씨 - 16세기 초반
    • 청주 경씨 - 16세기 초반, 16세기 후반
    • 평산 신씨 - 16세기 초반
    • 연안 이씨 - 16세기 초반
    • 동래 정씨 - 16세기 초반
    • 평창 이씨 - 16세기 초반
    • 풍양 조씨 - 16세기 초반
    • 청주 한씨 - 16세기 중반, 17세기 초반, 17세기 후반
    • 강릉 최씨 - 16세기 중반
    • 해주 정씨 - 16세기 중반
    • 남양 홍씨 - 16세기 후반
    • 광주 이씨 - 16세기 후반
    • 하동 정씨 - 16세기 후반
    • 의성 김씨 - 16세기 후반
    • 창녕 성씨 - 16세기 후반
    • 함평 이씨 - 16세기 말엽(1592년), 18세기 후반
    • 창녕 조씨 - 16세기 말엽(1592년)
    • 해평 윤씨 - 16세기 말(1592년)
    • 풍천 임씨 - 16세기 말엽
  • 17세기
    • 진주 유씨 - 17세기 초반
    • 전주 이씨 - 17세기 후반
    • 황주 변씨 - 17세기 후반
    • 김해 김씨 - 17세기 후반, 18세기 초반
    • 은진 송씨 - 17세기 후반
    • 경주 이씨 - 17세기 후반
    • 청송 심씨 - 17세기 후반
    • 한산 이씨 - 17세기 후반
    • 죽산 박씨 - 17세기 후반
  • 18세기
    • 제주 고씨 - 18세기 초반
    • 경주 김씨 - 18세기 초반
    • (신)안동 김씨 - 18세기 중반
  • 19세기
    • 진양 하씨 - 19세기 초반

15세기에 입향한 성씨는 원주 원씨, 안동 권씨, 성주 이씨, 합천 이씨, 배천 조씨, 능성 구씨, 청주 곽씨, (구)안동 김씨, 평택 임씨 등 9개 성이다.

원주(또는 원성) 원씨는 계통을 달리하는 3개 계열이 있는데, 첫째는 여주 일대에서 가장 번성한 원주 원씨 시중공계(侍中公系)이고, 둘째는 시조를 원경(元鏡)으로 하는 원주 원씨 운곡계(耘谷系), 셋째는 시조를 원극유(元克猷)로 하는 원주 원씨다. 시중공계는 문정공파(文靖公派), 음성공파(陰城公派), 관란공파(觀瀾公派) 등 크게 3파로 나뉜다. 음성공파는 다시 음성공의 네 아들을 기준으로 4파로 나뉘어 다음과 같이 모두 6파가 있다. 첨추공파 입향은 10세 문정공 효연(孝然, 1404~1466)으로 15세기 중엽이며 강천면 걸은리 건넛마을 뒷편 마감산에는 원주원씨세장지가 있다. 후손들은 북내면 가정리, 강천면 걸은리·이호리 및 대신면, 가남면, 점동면 등에 거주한다. 음성공파 중 참판공파는 음성공 10세 효이(孝而)의 3남 11세 중륙의 후손들이다. 음성공의 묘는 원주 호저면에 있고, 참판공의 묘는 여주 북내면 장암리에 있다. 입향시기는 대략 15세기 후반경이다. 16세 원두추(元斗樞)의 후손들은 대신면 상구리에 있다. 관란공파 후손들은 강천면 대둔리 및 북내면 장암리, 가남면, 능서면 등에 분포되어 있다. 11세 중강(仲康)의 묘는 여주 관내인 북내면 석우리 입석동에 있다. 입향시기는 첨추공이나 음성공보다는 조금 늦은 15세기 말경이다. 음성공파 중 사직공파는 여주읍, 대신면, 북내면, 가남면 등지에, 병사공파는 가남면, 대신면에, 주부공파는 북내면 등에 흩어져 산다.

안동 권씨는 15세기 중반과 16세기 초반에 두 차례 여주로 들어왔다. 권수평(權守平, 樞密公)을 파시조로 하는 추밀공파는 그중에서도 주로 길창군파(吉昌君派) 권규(權跬) 계열로 17세 권선(權善)이 15세기 중반경 입향한 후 점동면 덕평리와 원부리, 강천면 강천리 등에 분포되어 있다. 23세 영준(英俊)은 대신면 보통리에 입향한 후 후손들이 16대를 내려오고 있으며 도중에 율촌리 등지로 퍼졌다. 복야공파의 경우 27세 찬(燦)이 중종 때 북내면 현암리(峴岩里)에 정착한 후 후손이 18대를 이어오고 있다. 도중에 일부는 하거리로 분거(分居)하였다.

성주 이씨는 중흥시조 이장경(李長庚)의 6세 사순(師純)이 15세기 중반경 대신면 하림리로 입향하였다.

합천 이씨 문충공파(文忠公派)의 입향조는 16세 이효성(李孝誠)으로 15세기 중반 강천면 가야리로 들어왔다.

배천 조씨는 대신면 천서리와 가남면 금당리 등에 분포하며 거의가 경렬공파로 14세 임피공(臨陂公) 조첨수(趙添壽)가 대신면 천서리로 15세기 중반경 입향하였다.

능성 구씨는 15세기 중반과 16세기 중반에 두 차례의 입향이 있었다. 15세 구영(具瀛)이 16세기 중반경 광주에서 이곳 여주로 입향하였고 전서공파(典書公派)의 경우는 파시조 구성로(具成老)의 9세 구인효(具仁孝)가 15세기 중반경 점동면 부구리(富九里)로 들어왔다. 대신면 가산리, 점동면 부구리에 후손들이 살고 있다.

청주 곽씨는 18세 승진(承振)이 15세기 중엽 강천면 간매촌(看梅村)으로 입향하였다. 청주 곽씨는 강천면 간매리 외에도 북내면 서원리 등에 거주한다.

여주의 (구)안동 김씨는 15세기 후반 승문원 판교(承文院 判校) 김환(金丸)이 충북 청원군 오창면에서 흥천면 귀백리(歸白里)로 입향하였다.

평택 임씨는 3차례의 입향이 있었다. 시조를 임언수(林彦修)로 하는 전객령파는 중시조의 6세 득정(得禎)이 15세기 후반에 대신면 천남리(川南里)로 입향하였다. 갈곡공파는 갈곡공 8세 수겸(守謙)의 다음 대인 16세기 초반에 여주로 들어왔다. 시조 임팔급(林八及)의 25세 임덕부(林德副)는 17세기 중반경 흥천면 대당리(大塘里)로 입향하였다.

16세기에 입향한 성씨는 초반에 원주 원씨, 파평 윤씨, 전주 유씨, 남평 문씨, 밀양 변씨, 청주 경씨, 평산 신씨, 연안 이씨, 동래 정씨, 평창 이씨, 풍양 조씨 등 11개 성씨, 중반에 청주 한씨, 강릉 최씨, 해주 정씨 등 3개 성씨, 후반에 남양 홍씨, 광주 이씨, 하동 정씨, 의성 김씨 등 4개 성씨, 그리고 임진왜란 때 함평 이씨, 창녕 조씨, 해평 윤씨, 등 3개 성씨가 들어와 시기별로는 입향성씨들이 가장 많다.

원경(元鏡)을 시조로 하는 원주 원씨 운곡계의 여주 입향은 16세기 초경으로 입향조인 24세 영연(瑩然)의 묘가 북내면 신접리 적지촌(赤芝村)에 있다. 이들 중 대다수는 도중에 이천으로 내려갔다. 파평 윤씨 판도공파는 20세 계손(季孫) 때인 16세기 초에 이르러 금사면 하호리로 입향하였다. 처가인 무송(茂松) 윤씨(尹氏)와의 인연으로 이곳에 입향하였다.

전주 유씨의 한 갈래는 16세기 초에 중종조(中宗朝)의 명신(名臣)인 문목공(文穆公) 숭조(崇祖)에 의해 이루어졌고, 또 한 갈래는 17세기 후반경 12세 윤(潤)과 연(演)이 대신면 후포리로 들어왔다.

남평 문씨는 15세 득준(得俊)으로 연산군 때 유배 후인 16세기 초에 능서면 번도리로 입향하였다고 하는데, 여주에 처음 묘를 쓴 17세 윤명(允明)을 기준으로 16세기 초반으로 입향시기를 추정하였다.

밀양 변씨 입향은 18세 변춘란(卞春蘭)이 16세기 초에 능서면 마래리(馬來里)로 들어오면서 이루어졌다.

청주 경씨의 입향은 16세기 초경으로 진산군수(珍山郡守)를 지낸 9세 면(綿)에서 비롯된다. 그의 묘는 흥천면 상백리(上白里)에 있으며 위토는 흥천면 양촌리(楊村里)에 있다. 한편 그의 아우 임(絍)의 손자인 11세 진(震)이 16세기 후반에 상백리로 들어왔다.

평산 신씨는 사간공파 후손들로 20세 성미(誠美)와 정미(廷美) 형제가 1519년 기묘사화 때 개군면(현 양평군) 추읍산(趍揖山)으로 낙향하였다. 금사면 하호리, 궁리뿐 아니라 가남면 본두리, 북내면 내룡리 등지에 분포한다.

연안 이씨는 통례문부사공파(通禮門副使公派) 중 남대공(南臺公) 이백공(李伯恭)의 후손으로 입향조는 11세 진사공(進士公) 이상배(李尙培)인데 16세기 초경이다. 연안 이씨들은 정단리 외에도 삼군2리 등 가남면 일대 및 여주읍 등지에 산재해 있다. 대신면 천서리 동래(東萊) 정씨(鄭氏)를 대표하는 인물은 정대년(鄭大年)으로 이곳으로의 입향은 그의 당숙이 되는 정전(鄭荃)을 입향조로 볼 때 16세기 초경으로 짐작된다.

평창 이씨는 경주 이씨에서 분파하였다. 12세 익평공(翼平公) 계남(季男)이 입향조다.

풍양 조씨 입향조는 준양공 신(愼)의 5세 종사랑공(從仕郞公) 염(磏)으로 가남면 은봉리(隱峰里, 구은자동)에 입향하였다. 그러나 현재 풍양 조씨는 은봉리에 몇 호 살지 않는다.

청주 한씨는 여주에 여러 계열이 있으나 그중에 여주에서 세거해 온 집안은 문정공파(文靖公派)라고 한다. 문정공의 4남 중에 2남 사무(士武), 3남 사신(士信), 4남 사개(士介)의 자손들이 여주와 관련 있다. 2남 사무파는 강천면 부평리에서 시작되었다. 여주 입향은 17세기 후반이며 입향조는 문정공 한계희의 증손인 17세 여필(汝弼)로 묘는 강천면 부평리(釜坪里)다. 후손들은 원주와 충주 및 시흥 등지로 분기해 나갔다. 3남 사신의 후손들은 삼등공파라고 하는데, 19세 형길(亨吉) 때 강천면 걸은리 마감동으로 여주 입향이 이루어졌으므로 대개 그 시기는 17세기 초반이 된다. 강천면 이호리 및 강 건너 원주 부론면 흥호리 등으로 퍼졌다. 4남 사개의 자손 중 17세기 초에 흥곡촌으로 입향한 19세 효중(孝仲)의 자손들은 흥천면 계신리, 다대리 등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18세기 중엽에 일부는 전라도 나주로 이동하였다. 16세 수온(守溫, 1499~1557)은 진위현령을 지낸 후 16세기 중반에 흥천면 문장리(文長里)로 입향하였다.

강릉 최씨는 경원군(慶源君) 최필달(崔必達)을 시조로 16세 준(璿)이 중종 때 관직을 지낸 후 가남면 송림리(松林里)로 들어왔다.

해주 정씨 입향조는 6세 흥경(興慶)으로 1525년에 퇴임 후 가남면 태평리에 정착하였다.

남양 홍씨 사직공파의 입향시기는 대략 16세기 후반경이다. 사직공 계연의 증손인 16세 덕연(德演)의 묘를 대신면 계림리로 옮기면서 세거가 시작되었다. 문정공파의 입향시기도 16세기 후반경이다. 금사면 이포리, 흥천면 문장리에 묘와 주거지가 있다.

광주 이씨 입향은 7세 중경(重慶) 때로 16세기 후반경이다. 대신면 당남리(唐南里)로 입향하였다. 세조 때 문신인 충희공(忠僖公) 이인손(李仁孫)의 묘는 영릉 천장으로 능서면 신지리로 이장된 것을 보면 여주와의 인연은 이보다 더 올라감을 알 수 있다.

하동 정씨의 시조는 정응(鄭膺)이다. 여주 입향조(入鄕祖)는 11세 정여호(鄭如虎)로 16세기 후반경에 흥천면 신근리(莘根里)로 입향하였다. 정응운(鄭應雲)은 문성공(文成公) 정인지의 6세로 서울에서 16세기 말에 길천면 내양화(內楊花)로 내려왔다. 자손들은 흥천면 상백리(上白里)에 거주한다. 금사면 이포리 일대에 사는 의성(義城) 김씨(金氏)는 수사공공파(守司空公派)로 14세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후손이다.

함평 이씨의 입향조 13세 업(鄴)은 훈련원(訓練院) 판관(判官)으로 있다가 임진왜란 때 대신면 장풍리(長豊里)로 들어왔다. 23세 유경(儒敬)은 18세기 후반에 가남면 상활리(上活里)로 들어왔다.

창녕 조씨는 문충공(文忠公) 조한영(曺漢英)의 후손들로 30세 경인(景仁, 1555~1615)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외가인 무송 윤씨 터전인 보통리로 입향한 것이라고 하며 입향시기는 1592년 직후다. 대신면 장풍3리·송촌2리·보통리 등에 분포되어 있다.

해평 윤씨의 여주 입향은 13세 윤진(尹璶) 때로 임란 중 처가가 있는 점동면 사곡리(沙谷里), 즉 모래실로 입향하였다. 점동면 사곡리 모래실 마을에는 동강공파(東岡公派)의 종택이 있고 남악공의 장파가 거주한다. 창녕 성씨는 흥천면 복대리로 입향하였다.

17세기에 여주에 들어와 세거한 성씨는 진주 유씨, 전주 이씨, 황주 변씨, 김해 김씨, 은진 송씨, 경주 이씨, 청송 심씨, 한산 이씨 등 8개 성씨다.

진주 유씨는 세종 때 문신인 문간공(文簡公) 유염(柳琰)의 후손으로 소재공의 아들이 대신면 가산리로 내려오고 그의 손자 때 하림리로 들어왔다고 한다.

전주 이씨는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 영응대군파(永膺大君派), 덕천군파(德泉君派), 수도군파(守道君派), 담양군파(潭陽君派) 등 여러 파가 있다. 광평대군파는 8세 렴(簾, 1651~1684) 때 점동면 현수리(玄水里)로 입향하여 대를 이어 살고 있다. 영응대군파는 8세 2男 만재(萬材)가 17세기 중반경 흥천면 복대리(卜大里)로 들어온 것으로 되어 있다. 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의 덕천군파는 5세 충원(忠元, 1537~1605)의 부조묘(不祧廟)가 산북면 백자리(柏子里)에 있어 이를 입향의 근거로 삼아 그 시기는 임진왜란 후인 17세기 초로 잡는다. 7세 효민공(孝敏公) 경직(景稷)은 이경석(李景奭)의 형으로 충청도 제천이 세거지인데 13세 면오(勉五) 때 원주로 올라와 그 일파가 강천면으로 입향하였다. 정종(定宗)의 아들로 숙의(淑儀) 윤씨(尹氏)가 낳은 수도군(守道君) 덕생(德生)의 수도군파는 13세 광택(光澤) 때 포천에서 가남면 건장리(建章里, 옛 召開面 乾章里)로 입향하였는데 그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담양군파는 7세 명열(命說, 1592~1664) 때 17세기 중반에 강천면 부평리(釜坪里)에 입향하였다. 상령(商齡)은 5세 경중(敬中)의 현손으로 진행(震行)의 아들인데 진발(震發)에게 양자를 갔고 생부는 흥천면 계신리(桂信里)에 입향하였다.

황주 변씨는 17세기 후반경에 17세 광재(光載), 광보(光輔) 형제가 여주로 입향하였다. 황주 변씨는 금사면 장흥리에 거주한다. 김해 김씨 참판공파 파시조인 참판공 영견의 6세손 63세 홍복(洪福)이 여주로 들어온 것은 17세기 후반이다. 안경공파는 18세기 초반에 안경공 영정의 7세손 63세 대민(大敏, 1684~1745)이 용인에서 강천면 적금리(赤今里) 신대촌(新垈村)에 입향하면서 후손이 퍼졌다. 강천면 이호리에 선영이 있고, 가남면 태평리와 북내면 등에도 분포한다.

은진 송씨 입향조는 13세 부사공(府使公) 송국준(宋國準, 1588~1651)이다. 대신면 하림리(下林里)로 입향하였다. 입향시기는 17세기 후반경으로 추정된다.

경주 이씨 정익공파(貞翼公派)의 파시조인 25세 정익공 이완(李浣)이 여주로 들어온 시기는 17세기 후반이다. 후손들이 대신면 송촌리, 천서리 등에 산다.

청송 심씨는 14세 심영(沈楹)이 17세기 후반에 흥천면 율극리(栗極里)로 입향하였다. 한산 이씨는 양도공파(良度公派)로 양도공 8세 숙묘(叔畝)의 후손들이 연천에서 살다가 17세기 후반에 여주 보통리로 분가하여 들어왔다.

18세기 초반에는 제주 고씨와 경주 김씨, 중반에는 (신)안동 김씨의 입향이 있었다.

제주 고씨는 문충공파(文忠公派) 중 고성군파(高城君派)로 여주 입향은 10세인 통덕랑(通德郞) 고두극(高斗極)이 1700년경 아들 몽신(夢臣)과 함께 금사면 상호리로 들어오면서 이루어졌다.

경주 김씨는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의 10세손 즐(瀄)이 여주읍 하거리에 입향한 이후 14대째 내려오고 있다. 또 다른 계통으로 계림군 13세손 경흥(景興)이 300여년 전에 능서면 용은리(龍隱里)로 입향하였다. 지금은 양평군 관할인 개군면 하자포리와 향리(香里), 대신면 보통 2리에 경주 김씨가 분포되어 있다.

(신)안동 김씨 충헌공(忠憲公) 김창집(金昌集, 1648~1722)의 후손들이 18세기 중반 이후 대신면 초현리 새재마을에 모여 산다. 대신면 초현리와 가남면 금당리 소댕이마을에 세장지가 있다.

19세기 이후에 들어온 성씨도 많았을 것으로 여겨지나 세거하기에는 기간이 짧고 격변기에 동족끼리의 촌락을 구성하기에는 사회가 안정되지 않아 19세기 초반에 27세 윤홍(允泓)과 그다음 대에서 가남면 삼군리와 태평리로 들어온 진양 하씨만을 예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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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