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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지역 성씨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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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여주가 반향(班鄕)임을 나타내는 말로 “3정승 6판서가 배출된 고장”이라는 말을 듣는다. 이를 반영하는 여주의 대표적인 양반을 꼽을 때 흔히 일 천녕, 이 삼밖골, 삼 모래실이라고도 한다. 우선 “옛날에 오조(五曹)가 끓던 곳”이 여주라고 할 정도로 벼슬을 많이 낸 성씨로 천녕현(현 금사면)의 남양 홍씨를 든다. 이들 씨족은 홍명하(洪命夏, 1608~1668) 등을 중심으로 12대 사이에 정승 9명을 배출하였다고 한다.삼밖골 민씨로 불리며 교리 근처 월성리 등 여주 곳곳에 퍼져 있는 여흥 민씨들도 여주를 대표하는 성씨다. 조선 건국 초기부터 왕실의 외척으로 여주가 행정단위로 목(牧)이 되는 배경이 되었을 정도다. 명성황후도 인현왕후의 부친 민유중의 묘가 있는 능현리 묘막에서 태어난 것이다. 모래실 해평 윤씨에서는 특히 대제학이 많이 났다고 한다. 보통리 창녕 조씨 또한 정승과 판서를 많이 낸 집안이다. 난을 일으켰던 이괄도 고성 이씨로서 여주읍 출신이다.

전주 이씨의 경우는 거성(巨姓)답게 광평대군파, 영응대군파, 덕천군파, 수도군파, 담양군파 등 여러 파로 존재한다. 여주의 원주(원성) 원씨는 시중공계인데 문정공파, 음성공파, 관란공파 등 크게 3파로 나뉘고 시조를 달리하는 원주 원씨들도 있다. 청주 한씨의 경우 여러 계열 중에 여주에서 세거해온 집안은 모두 14세(世) 한계희(韓繼禧)의 후손인데, 그의 시호를 따라 문정공파라고 한다. 안동 김씨의 경우는 신안동 김씨와 (구)안동 김씨 모두 여주에 세거해온 집안들이다.

그 밖에도 대신면 계림리와 보통리에 세거해온 무송 윤씨, 하호리의 파평 윤씨, 장흥리 황주 변씨, 상호리 제주 고씨, 상호리 순흥 안씨, 하거리 경주 김씨, 적금리 김해 김씨, 후포리 전주 유씨, 번도리 남평 문씨, 천남리 밀양 박씨, 마래리 밀양 변씨, 하림리 은진 송씨, 하호리 평산 신씨, 상거리 경주 이씨, 당남리 광주 이씨, 정단리 연안 이씨, 상활리와 장풍리의 함평 이씨, 대당리와 천남리의 평택 임씨 등 거의 모든 면리마다 세거성씨들이 존재하는 곳이 여주지역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주목(驪州牧)」 성씨조(姓氏條)를 보면 본주(本州), 즉 여주에는 이(李)·민(閔)·안(安)·필(畢)·윤(尹)·김(金)·한(韓)·음(陰)을, 천녕(川寧)에는 견(堅)·현(玄)·최(崔)·유(兪)·방(房)·장(張)을, 등신(登神)에는 유(兪)를 들었다. 인물조(人物條)에는 고려 때는 여흥 민씨들이 많고 이규보(李奎報), 이윤수(李允綏), 그리고 여흥 민씨 민사평(閔思平)의 외손으로 김구용(金九容) 등도 나온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이행(李行)과 그의 아들 이적(李迹)이 올라와 있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여주에 가장 먼저 자리를 잡은 성씨로 단양 우씨, 밀양 박씨, 그리고 노씨(盧氏)를 드는데, 노씨의 경우 본관을 파악하지 못했다. 단양 우씨는 흥천면 계신리, 대신면 송촌리 갈산 등지에 사는데, 10세(世) 우현보(禹玄寶) 때 충청도에서 올라와 중앙에 기반을 잡고 손자 때인 12세 2남 승규(承圭) 이후로 이곳에 입향한 것으로 추정된다. 밀양 박씨는 고려 말엽에 개성에서 이곳 대신면 천남리로 이주한 것으로 되어 있어 비교적 빠른 시기에 여주에서 자리잡은 성씨임을 알 수 있다.

효종의 녕릉(寧陵) 및 세종의 영릉(英陵)과 관련한 성씨로는 각각 진주(晋州) 유씨(柳氏)와 각기 광주(廣州), 한산(韓山) 및 성주(星州)를 본관으로 하는 이씨(李氏)가 있다. ‘정터’란 지명은 임금의 능으로 정해놓은 터란 뜻으로, 북내면 오학리에 있다. 숙종 때 이곳으로 효종의 능을 옮기려 했으나, 능을 보러 가는 도중에 능서면 왕대리의 진주 유씨 18대조 묘막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지관이 이곳을 명당터라고 하여 이곳에 효종의 능을 쓰고, 대신 진주 유씨 조상묘를 정터로 옮기게 하였다고 한다. 영릉 천장과 관련해서는 예종(睿宗) 때인 1469년에 원래 자리잡고 있던 둔촌(遁村) 이집(李集)의 손자인 광주 이씨 충희공 이인손(李仁孫) 묘와 한산 이씨 문열공 이계전(李季甸) 묘를 각기 능서면 신지리와 점동면 사곡리로 옮겼다. 이들의 묘를 이장하면서 자손들에게는 그 주변에 길지와 함께 사패지를 내리고 여흥을 여주목(驪州牧)으로 승격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성주 이씨는 세종 영릉과 관련한 일화가 있는 집안이다. 현재의 세종 영릉은 영의정을 지낸 성주 이씨 5세 문경공 이직(李稷)과 참판을 지낸 문경공의 3남 6세 이사순(李師純)의 묘가 있었는데, 영릉으로 사용하기 위해 대신 천장할 터를 문경공의 경우는 파주로 정하고 참판공의 경우는 연을 날려 그것이 떨어지는 곳에 옮기라고 하였는바, 연이 떨어진 곳이라고 하여 연하리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라고 한다. 그 마을 이름은 연라리(煙羅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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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