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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해산 이후의 여주지역 의병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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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8월 일제가 고종을 강제로 양위시키고 군대마저 해산시킨 조치는 후기 의병운동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어느 지역보다도 서울 정세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경기지방에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8월 1일 군대해산 당일 서울 시위대 제1연대 1대대 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의 자결로 촉발된 시위대 해산군인의 무장봉기와 의병참여는, 5일 원주진위대 봉기에 이어 홍천·충주·제천·여주·강화 등 지방 진위대의 봉기로 이어졌다. 그동안 일본군과 함께 의병토벌의 한 주체였던 조선 군인이 마침내 군대해산을 계기로 의병과 함께 반일 항쟁의 주체가 되었다. 특히 서울 시위대 봉기에 이은 원주진위대의 봉기는 여주를 비롯한 경기 남부지역의 의병운동을 한층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1)

 

서울 시위대 병사의 봉기 소식을 접한 원주 진위대 병사 일부는 1907년 8월 3일 원주를 빠져나와 ‘군대해산 특명’을 받고 서울에서 돌아오던 진위대 대대장 참령 홍유형(洪裕馨)에게 서울로 진격하자고 압박하였다. 그러나 홍유형은 군대해산을 독려하다가 거센 저항을 받자 가까스로 여주로 피신하였다.2) 그는 여주 민중에게 ‘단발한 자[削髮之人]’라 하여 붙잡혀 무수히 곤경을 당한 뒤 애걸하여 간신히 화를 면하고 서울로 도망갔다.3) 8월 5일 해산을 거부하고 봉기한 원주진위대 병사는 크게 두 부대로 나뉘어 이동했다. 대대장 대리 정위 김덕제(金德濟)가 이끈 일부 병사들이 평창·강릉·양양·간성·고성 등지로 진출하였다. 특무정교 민긍호(閔肯鎬)가 이끄는 진위대 병사 대부분은 여러 소대로 나누어 제천·충주·죽산·장호원·여주·홍천 등지로 진출하면서 여주를 비롯한 경기 남부지역의 의병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이들의 주력은 여주 안창(安倉)에 있었으므로, 여주 의병운동 확산에 활화산이 되었다.4)

 

고종의 강제 양위에 이은 군대해산 조치는 경기 의병운동에 불을 지핀 것과 같았다. 1907년 8월에 접어들면서 군대해산에 항의하여 봉기한 서울시위대와 원주진위대에서 흩어진 해산군인 등이 의병으로 참여하면서 의병부대는 전투력을 보강할 수 있었다. 이들 의병들은 양근·지평·이천·여주·죽산·음죽·안성·양지·용인 등 경기 남동부 전역으로 활동지를 넓혔다.5) 여주를 비롯한 경기 남동부 지역은 이미 을사조약 체결을 앞뒤 하여 심상희·맹달섭 등의 의병부대가 활동하고 있었고, 강원도 원주와 충청북도 제천 등지와 도로망이 연결된 지리적 조건 때문에 의병의 주요 활동지가 되었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과 함께, 여주의 의병은 해산군인들의 참여로 발전된 전술과 강화된 무장을 바탕으로 공세적 행동을 취하며 항일항쟁을 벌일 수 있었다.

 

군대해산 뒤 여주에서 의병운동이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07년 8월 10일이었다. 8월 10일 여주군 거동삼리 안창에서 의병들이 봉기, 일본 배를 공격하여 일본인 2명을 붙잡아 상품을 몰수하였다.6) 이틀 뒤인 12일 오후 2시경 이구채(李求蔡) 등 여러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 200여 명이 여주를 습격, 순사분파소와 우편취급소를 파괴하고 일본인 상점을 공격하였다. 이때 여주를 기습 공격한 의병부대는 이구채 부대 80명, 원주군 문막리에서 의병을 일으킨 김현국(金顯國) 부대 70여 명, 나머지는 윤성필(尹性必)이 이끄는 부대였다.7) 이들 세 부대가 거의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를 공격한 점을 미루어 보아 미리 서로 연락을 하고 연합활동을 하였거나, 아니면 한 부대가 여러 진으로 나뉘어 공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사실은 여주읍을 공격한 의병부대가 ‘원주패병(敗兵)과 여주주병(駐兵)이 합세한 것’이라는 자료로도 확인된다.

 

우편취급소를 공격한 김현국 부대가 금고를 파괴하는 사이,8) 순사분파소를 습격한 이구채 부대는 일본순사 등 8명과 3시간 동안 총격전을 벌인 결과, 일본순사 보조원 사토(左藤盛人)는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마쓰무라[松村彌市]는 하복부에 총상을 입었으며, 쓰쓰이[筒井左助]는 머리를 다쳤다. 총알이 떨어진 일본인 순사 3명은 순사 가족과 일본인 상인 남녀 10명을 데리고 죽산 방면으로 탈출하다가, 중도에서 일본인 여자 1명이 죽고 곧이어 의병의 추격을 받았다.9) 이구채 부대는 여주에서 지역 민중을 의병으로 규합하여 세를 늘린 뒤 원주 방면으로 진출하던 중, 1907년 8월 16일 장호원에서 충주수비대에서 파견되어 전선을 점검하던 일본 호위병 6명을 습격하여 2명을 사살하였다. 이어 이구채 부대 300여 명은 8월 23일 한강을 따라 일본군이 서울로 올라가려는 것을 알아채고, 여주 하류 약 40리 지점인 이포(梨浦) 부근 양쪽 기슭에 매복해 있다가 경성에서 양식 등을 호위하려고 충주로 향하던 보병 제51연대 일본군에게 맹렬한 사격을 가하여 병졸 1명을 쓰러뜨렸다. 가까스로 도망길을 찾은 일본군은 24일 여주에 피신하여 수비대와 함께 이포지역으로 갔으나 이미 의병들이 몸을 피한 뒤였다.10) 이후 이구채 부대는 음죽을 거쳐 장호원으로 이동하였는데, 이때 의병 수가 1천여 명에 이르렀다.11) 그가 이은찬(李殷瓚)과 함께 문경의 이인영(李麟榮)을 찾아간 것이 8월 말에서 9월 초 사이라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12) 이구채 부대가 여주에서 장호원 방면으로 이동한 것은 문경에 있던 이인영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13)

 

한편 이구채 부대가 순사분파소를 습격할 때 여주지역 민중은 원주에서 돌아오던 보조원 하라[原龍太郞]를 여주군 근동면(近東面) 단강(丹江)에서 포위하여 참살하였다.14) 이때 여주 경찰서 순검으로 근무하던 포천 출신 권중선(權重善)은 일본순사 보조원의 기병총을 탈취하여 의병 대열에 뛰어들어 그 뒤 2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여주를 비롯해 지평·음죽·양근 등지에서 활동하였다.15) 이구채 부대 등이 여주 분파소 등을 공격한 1907년 8월 12일 그 시각에 양반 출신 조인환(曺仁煥) 부대 150여 명은 여주 분서 양근세무서를 습격, 문부와 지화(紙貨) 100원을 몰수하였다. 의병들은 갈산동(葛山洞)에 숨어 있던 세무주사 황우정(黃祐貞)이 삭발한데다 일본인 순사에게 의병장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하여 처단하려 하자, 조인환은 “우리들이 큰일을 경영하는데 우리나라 인명을 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며 그를 살려주었다.16) 8월 14일 밤 여주·지평의 의병들은 여주 안창 부근으로 행진하던 일본경찰대를 습격하여 일본부이사의 행장간호자(行裝看護者) 2명을 총살하여 강에 던져버렸다. 또 일본인 피난선 2척을 붙잡아 화물을 탈취하였다.17) 경성에 유학 중이던 김정한(金禎漢)은 음력 7월 여주군에 돌아와 의병모집에 착수, 8월 14일 50~60명의 의병을 모집, 활동하였다. 9월 3일 전봉규(全奉圭) 부대와 합진하여 170여 명으로 세력을 확대한 김정한 부대는 여주를 비롯해 원주·충주·음죽·죽산·용인·이천·안성·진천·음성 등 경기 남동부 전역에서 일본 군대 및 경찰과 끊임없는 전투를 벌였다. 그러던 9월 29일 김정한 부대는 용인의 한 마을에서 숙박하다가 일본군의 야습을 받아 흩어졌다. 그 뒤 다시 10월 2~3일경 이천군 갈미동에서 다시 부하를 모아 활동했으나 전봉규가 의병부대에서 이탈하면서 점차 세력을 잃게 되어 결국 김정한도 의병을 해산하고 서울로 돌아갔다.18)

 

1907년 8월 14일 이후 김정한 부대가 여주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있을 즈음, 방인관(方仁寬) 부대 의병 100~150여 명은 8월 18일 오후 11시경 여주에서 장호원을 습격하였다. 30년식 총 15정 남짓과 구식총으로 무장한 방인관 부대는 장호원 부근의 전선을 파괴하고 장호원에서 물자를 징발하였다.19) 오후 4시 30분 경성을 출발, 제천으로 향하던 보병 제51연대 1소대를 공격, 약 1시간 동안 격전을 벌여 일본군 화물을 운반하던 한국인 인부 1명을 쓰러뜨렸다.20) 8월 21일 방인관 부대는 절단된 전선을 복구하려고 출장한 충주 수비대 6명을 장호원으로 가는 길목에서 기습 공격하여, 복마 3필을 빼앗고 마부 1명을 쓰러뜨렸으며, 장호원 남방 약 1리의 전주 20간을 절단시켰다.21)

 

여주는 명성황후의 출생지로서 그가 비명에 간 뒤 배일사상이 가장 뿌리깊은 곳 가운데 하나였다. 때문에 이곳에는 이구채·조인환·김정한·방인관 부대말고도 여주 출신 양반이면서 농업에 종사하던 민동식(閔東植)과 심상옥(沈相玉)이 각각 부하 50~150여 명을 이끌고 여주·지평 등지에서 활동하였다.22) 또 여주군 북면 농민 출신인 김현규(金賢圭 또는 金玄奎)는 부하 250명을 이끌고 여주·지평·양근에서 활동하였다.23) 이들보다 앞서 의병을 일으켜 여주·지평에서 활동했던 심상희는 1907년 10월 말 해산병 100명과 함께 홍천으로 행진하던 중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퇴각하다가 민긍호 부대와 합진하여 13도 연합의병에 참여하였다.24) 이들 부대의 활동에 힘입어 여주를 비롯한 수원·양지는 의병들이 습격할 것이라는 풍문에 우편취급소 일본인과 순사들이 미리 도망칠 정도였다.25)

 

여주에서 의병들이 봉기하자 여주 민중은 의병에 적극 가담하여 탄약을 모아주거나 군량 등을 자진해서 제공하는 등26) 여주지역 의병운동의 중요한 인적·물적 기반이 되었다. 여주·장호원 사이에서 번번히 기습공격을 당했던 일본군은 1907년 8월 23일 수비대와 힘을 합해 의병 토벌에 나섰지만 끝내 종적을 찾을 수 없자, 분통을 터뜨리며 이포 및 그 부근 촌락을 불태워 버렸다.27) 또 24일 원주에 있던 시모바야시(下林) 토벌대는 1중대를 여주에 보내어 의병에게 도움을 준 부락을 불태우게 했다.28) 특히 “여주군 천양(天陽)의 땅은 의병의 근거”라 하여 한 마을을 통째 불태워 버렸다.29) 그런데도 의병들은 여주 사천에서 일본군 후하(不破) 대대와 노무라(野村) 중대를 맞이하여 여러 차례 접전을 벌였으며 그 여세를 몰아 이천까지 점령하려고 했다.30)

 

1907년 9월에 접어들어서도 여주지역 의병운동은 여전히 공세를 취했다. 9월 10일 의병 70~80명이 여주읍에 머물다가 양근 방면으로 진출했다.31) 9월 14일 여주와 이천 사이에서 의병 40여 명은 일본군 토벌대와 교전하여 격퇴시켰다.32) 19일 여주 인근의 의병 300여 명은 제15사단에서 파견한 1소대를 여주·광주 경계 지역인 사남(沙南)·구포(龜浦)·월곡(月谷)에서 맞아 격렬히 싸웠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1명과 일본인 인부 1명, 한국인 인부 5명을 부상시켰으나, 의병 52명이 전사하는 손실을 입었다.33) 그러나 같은 날 양총으로 무장한 해산병 20여 명을 포함한 의병 300~400여 명은 장호원 동남방에서 일본 수비대를 공격하여 2시간 남짓 격전 끝에 일본군을 물리쳤고 전간(電桿) 7본(本)을 넘어뜨린 뒤 20일 밤 장호원 20리 고지에 진을 치는 전과를 거두었다.34) 22일 여주와 원주 사이인 문막(文幕) 방면으로 이동하던 한 의병부대는, 안창에서 일본 정찰대의 기습을 받아 격돌한 뒤 지평으로 이동하였다.35)

 

한편 음죽군 양반으로 농업에 종사하던 전봉규(전병규 또는 전봉기)는 1907년 9월 22일 오후 4시 부하 200여 명을 이끌고 여주 읍내를 습격하여 동장 노만실(盧萬室)을 살해하였다.36) 28일 오전 7시 전봉기는 여주 포수대장 출신인 한성관(韓聖寬)과 함께 250명의 부하를 이끌고 여주 읍내를 습격, 보병 제52연대 중대장 다나베[田邊] 대위가 인솔하는 토벌대 150명과 교전하였다.37) 29일에는 이천창의소 의병대장 김봉기(金鳳基)가 이끄는 의병 400여 명이 여주에서 이천 쪽으로 이동 중, 여주에서 숙영 중이던 다나베 중대와 유아사[湯川] 소대를 공격, 2시간 동안 교전 끝에 부하 28명이 전사하고 15명이 사로잡힌 뒤 여주 서남쪽 북성산(北城山) 방면으로 흩어졌다.38) 30일 오후 2시 의병 600여 명은 여주 불암면(仰岩面) 강정리(江亭里) 고양산(高陽山) 일대에서 충주에서 경성으로 돌아가던 일본군과 2시간 교전 끝에 전사 5명, 부상 30명의 피해를 입고 안평(安平)·사곡(沙谷) 등지로 흩어졌다.39) 『대한매일신보』는 이날 전투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지난 30일 오전에 충주를 발하야 남한강 좌안의 진행 대안(對岸) 덕리(德里)에 토민(土人) 3명이 도주(龜走)을 발견하고 또 대안 고지위에 수개 소 의병의 전망초(展望哨)가 발견지라 일본군대가 영죽(永竹)에 도착(達)하야 토민(土人)이 가산을 후산곡중(後山谷中)으로 운반을 발견하고 앙엄면(仰嚴面)에서 휴식하는대 의병 약 600명 중 1인은 백마를 타고 중방곡(中方谷) 앞 고지에 있는지라 일본군이 고지를 돌격 때에 의병의 기마장(騎馬將)은 말에서 내려와 2부대로 나누어 일부는 남방 고지로 퇴각하고 일부는 서북방으로 퇴각얏는되 아연히 의병 60명이 함성을 발하며 일병의 전진(前陣)을 핍박(逼迫)하야 양말위병(糧秣衛兵)을 향하야 일제히 사격 일본군대가 동북방으로 와서 응전을 개시하다가 오후 30분에 퇴각하얏고 의병 일부는 중곡 방면 고지에서 일병을 대야 누차 사격 일본군이 깊은 밤을 타 다른 고지로 퇴각얏다가 다시 그 곳으로 급진 즉 의병의 형적이 없었다더라40)

 

1907년 9월 하순 여주·홍천 등지에서 활동하던 조인환·유락(柳烙) 부대는 각면 각동에 “전답의 곡식을 추수한 것은 병작 분반하여 소작인이 먹을 곡식 이외에 지주의 곡식은 비록 한 톨의 곡식이라도 바치지 말 것과 선박으로 곡식이 유출되는 것도 동시에 집유하니, 만약 위반하면 소작인을 포살하고 해당 동도 불지를 것이다.”라는 통문을 발하여 소작인들이 지주에게 도조를 바치는 것을 금지시켰다.41)

 

1907년 10월에도 여주 의병의 기세는 여전하였다. 10월 1일 유생 출신 김춘수(金春洙) 부대는 여주군 천양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42) 안성과 원주에서 각각 여주로 온 의병 450명과 500여 명은 여주군 서면 20리 지점에 진을 치고 일본군을 습격하려고 계획하였다. 그 가운데 300여 명은 상경하려던 충주수비대를 봉암리(鳳巖里)에서 맞이하여 2시간 동안 격전을 벌였다.43) 이어 방인관 부대로 보이는 의병부대 500여 명이 충주·음성에서 죽산을 지나 여주로 이동하였다.44)

 

여주지역의 의병운동은 일본인 순사는 물론 조선인 순검이라도 단발을 하거나 관복을 입고서는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세력을 확대해갔다. 이러한 사실은 1907년 10월 15일 의병장 임행숙(任行叔)이 부하 10여 명을 이끌고 여주군 대송면(大松面) 곡수(曲水) 시장에서 여주 경찰분서 총순 남경연(南敬連)을 “왜놈경찰(倭警)의 손과 발이 되어 의병의 행동을 저해하는 자”라고 하여 쳐죽인 데서,45) 또 10월 24일 여주수비대 토벌대를 교묘히 피한 의병장 이연년(李延秊)이 같은 장소에서 몰래 정찰 중이던 순사 김년상(金年相)을 붙잡아 지평군 하동면 삼산리 부근에 끌고 와 참살한 데서 알 수 있다.46)

 

1907년 10월 17일에는 의병 200여 명이 충주 북방 60리 천포 하류 약 10리 법천 서쪽에서 일본 육군 환자수송선을 습격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여주로, 선부(船夫)와 환자는 장호원으로 피신한 뒤, 18일 이천수비대에서 25명의 정찰 소대를 파견하였다.47) 의병들이 한강 연안에 출몰하자 23일 제13사단장은 재경성 제51연대 제11중대에 기병을 붙여 한강 연안을 토벌하도록 했다. 토벌대는 1소대를 한강 좌안에서, 주력은 우안에서 강을 따라 올라가면서 소탕작전을 벌였다. 주력은 26일 복포(伏浦)와 노대곡(魯大谷) 부근을 소탕하고, 27일에는 양근 북방 사나사(舍那寺)에서 의병 150명을 습격하여 흩어지게 하고 절을 불태워 버렸다. 한강 좌안으로 토벌하던 소대는 26일 광주 동방 30리 관음방(觀音坊)에서 200여 명의 의병을 습격하여 흩어지게 하고, 31일 토벌대는 충주에 도착하였다.48) 이런 가운데 10월 31일 의병장 최치선(崔致先)은 여주 분서로 “지금 대장이 경성 시위대병 500명과 향병(鄕兵) 500명을 영솔고 여주 읍내의 왜인(倭人)을 토벌랴니 왕대진(王岱津)·양궁진(楊宮津)의 선박 30척을 북안(北岸)에 속히 정박케 야 대군(大軍)을 건너게 고 만약 위반면 군법에 의야 효수(梟首)의 형에 처다.”는 전령을 보내어 의병의 건재함을 과시하기도 하였다.49)

 

1907년 11월에도 임행숙 부대의 활동은 여전하였다. 11월 1일 임행숙 부대 200여 명은 여주·이천·지평·양근의 사통발달한 요로인 여주군 금사면(金紗面) 이포를 정찰하러 온 여주경찰분서 순사부장을 포함한 일본인 순사 4명과 한인 총순 김한영(金漢榮), 순검 유봉환(柳鳳煥)이 이포와 길천면(吉川面) 양화(楊花)의 중간 지점인 한강 좌안 흥곡면(興谷面) 충신동(忠信洞)에 이르렀을 때, 고지에서 사격을 가하여 순검 유봉환을 제외한 4명 모두를 쓰러뜨렸다.50) 2일 여주·삼산 등지에 진을 치고 있던 의병들은 주둔지를 습격해온 일본군에 응전하였다.51) 이포에서 순사부장을 비롯해 일본인 순사들이 몰살당하자, 이천 수비대 1소대가 여주 이포지역에 급파되었다. 6일 의병들은 이포 서쪽 동쪽에서 이들을 맞아 싸운 뒤 흩어지고, 다시 서쪽 고지에 있던 의병 400여 명이 토벌대와 교전을 벌였으나 50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이날 하오 일본군 상등병 이하 4명의 기병대는 보병과 힘을 합쳐 이포 서쪽에서 10여 명의 의병과 교전하여 4명의 의병이 쓰러졌다.52) 11일에는 의병들이 여주군 천양에서 일본군과 싸워 크게 이기자, 일본군들이 지역 인민의 가옥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53)

 

1907년 11월에 접어들면서 ‘13도 연합의병’의 결성이 차츰 가시화되면서 의병운동은 그에 따른 물적 토대 마련에도 힘썼다. 11월 6일 김봉기 부대가 음죽군 상율면과 여주군 강서면에서 활동하는 가운데,54) 8일 여주 의병들은 지평의 삼산에 주둔해 있던 의병과 합세하여 여주군 북면의 동장에게 군수전을 징발하였다.55) 즉 “본년 결세는 삼산동 대장에게 납부하라”고 하면서 민간에서 화약과 군량을 거둬들였다.56) 의병들은 여주 곡수시장에서 적게는 30~40명씩 또는 많게는 100~200명 부대를 이루며 군수전 징발에 나섰다.57)

 

이와 같이 이구채 부대가 여주 순사분파소를 습격한 1907년 8월부터 여주경찰서 관내는 그해 11월까지 의병운동이 가장 활기를 띤 시기였다. 여주 군내는 물론, 지평군 삼산리(三山里)에는 의병대장 12명이 집합하여 부하 3,000명을 이끌고 의기충천의 기세를 보였다.58) 이제 여주를 비롯한 경기 남부지역에서 의병운동을 벌여왔던 많은 부대들은 12월이 접어들면서, 방인관, 심상희 등 여주의 주력부대들이 ‘13도 연합의병’에 참여하려고 원주·지평·양주로 이동하는 가운데, 여주에 남은 의병들이 지역 의병운동의 자리를 메꾸어 갔다. 그러나 여주지역 의병운동의 주력이 ‘13도 연합의병’으로 편재되면서 여주 의병운동은 급속히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1907년 8월 1일 군대해산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타오른 의병운동은 그해 말과 1908년 1월 초순 사이 경기도 양주에 모인 의병장을 중심으로 ‘13도 창의대진소’를 결성하려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13도 창의대진소 총대장에 이인영, 군사장에 허위가 추대되었고, 각 도 의병장은 주로 이인영과 허위 부대의 차급 의병장이나 막료의 출신도를 고려하여 도별로 창의대장에 임명해 ‘13도 연합의병’ 부대를 꾸렸다.59) 한 예로 관서창의대장인 방인관과 관북창의대장인 정봉준은 1907년 8월부터 여주를 비롯한 경기 남부지역에서 활동하다가 그해 12월 이은찬 부대와 연합하여 13도창의대진소에 참여한 것이었다. 13도 창의대진소가 편성되고 차츰 대오를 갖추게 되자 총대장 이인영은 서울을 향한 진군령을 내렸다. 연합부대는 군사장 허위가 이끄는 선봉대가 먼저 서울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도착하면 뒤이어 총대장 이인영이 인솔하는 후속 본대와 각도 창의대장이 이끄는 의병들이 ‘장사(長蛇)의 세(勢)’로 천천히 진군하면서 약속한 기일에 약속한 지점에 도착하여 일시에 서울을 공략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군사장 허위가 300명 남짓한 선봉대를 이끌고 약속한 지점에 이르렀을 때, “후군은 시기를 어기고 일병이 졸지에 몰려와 장시간 사격을 몹시 심하게 하니 이때 후원군이 오지 않아서 할 수 없이 퇴진하였고, 김규식, 연기우가 모두 탄환을 맞아 부상당하여 퇴각하고 말았다.” 또 후군의 진군이 계획과 차질을 빚는 가운데 1908년 1월 28일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도착한 이인영 부대는 “음력 정월을 기하여 서울에 침입, 통감부와 교섭하고 결사적으로 승패를 결정” 지으려 했다. 그러나 이인영은 문경에 있던 부친의 사망 소식을 접하자 부친의 장례를 치루기 위해 모든 뒷일을 허위에게 맡기고, “의(義)를 중지할 것을 각 진에 통문으로써 배부”하고 문경으로 가려고 하향길에 올랐다.60) 이로써 13도 창의대진소의 서울진공작전은 무위로 끝나고 참가한 각 부대는 본래 활동지로 각각 흩어지고 말았다.61)

 

한편 ‘13도 연합의병’ 부대가 결성될 무렵인 1907년 12월과 1908년 1월 사이 여주에서 활동하던 의병부대는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거나 여주에서 활동하다가 수색, 토벌에 나선 일본군과 맞싸웠다. 1907년 12월 2일 의병 200여 명이 여주군 북면 암동(岩洞)에 이르렀다가 일병이 온다는 정보를 듣고 횡성 방면으로 퇴거하였다.62) 5일 의병 60여 명이 여주군 북면에 왔다가 금사면으로 이동하였으며,63) 6일에는 의병 50여 명이 여주군 이포를 습격한 뒤 양근 방면으로 향하였다.64) 8일 오후 7시 의병 18명이 여주군 송방면(松方面) 송대촌(松岱村)에서 머물다가 다음날 군산면(軍山面) 향곡(香谷) 방면으로 출발하였다.65) 한편, ‘13도 연합의병’이 결성될 무렵인 1908년 1월 7일 일본 경찰과 군대는 여주군 이포 도장동(道藏洞)을 포위하고 의병 수색에 나서 2명을 체포하였다.66) 16일 40여 명의 의병은 여주 동북 35리 지점에서 이천 수비대와 교전 끝에 20여 명이 전사하였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의병대장도 잡혔다.67) 1908년 2월에도 여주 의병운동은 침체를 면치 못했다. 2월 1일에는 50여 명의 의병이 여주와 원주 중간 지점인 천포(泉浦)에서 일본군 척후병의 급습을 받아 20여 명이 전사했다.68) 7일에는 보초를 서고 있던 의병 2명이 여주 강천면(江川面)에서 일본군의 습격을 받았으며,69) 11일에는 의병 2명이 장호원 부근에서 장호원 수비대의 척후의 공격을 받아 숨졌다.70)

이와 같이 군대해산 이후 폭발적으로 불붙었던 여주 의병운동은 ‘13도 연합의병’ 결성이 무르익으면서 그 주력부대가 원주·양주로 이동하는 가운데, 몇몇 부대가 여주에서 의병운동을 벌였으나 점차 그 빛을 잃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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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