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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근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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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 금사면 이포리
□ 시 대 : 조선

조창근(1836~1909)은 순종대의 무신으로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군서(君瑞)이다. 고려 때 첨의중서(僉議中書)를 지낸 조지수(趙之壽)의 후손이자 진사 조관영의 현손이며 조강(趙橿)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화순(和順)하고 효심이 깊었다. 1887년(고종 24) 52세의 늦은 나이로 무과급제하여 부사과(副司果)에 임명되고 1889(고종 26)년 경성판관(鏡城判官)를 거쳐 1902년(광무 6)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으며 74세의 장수를 누렸다. 초장지(初葬地)는 이천군(利川郡) 청미면(淸渼面) 필현리(筆峴里)였으나 1933년 지금의 위치로 이장하였다. 아들 조성달(趙聖達)이 을축년(乙丑年, 1925) 대홍수 때 큰 피해를 당한 장호원읍(長湖院邑)과 음성군(陰城郡)의 주민들에게 선대(先代)부터 모은 재산으로 자선(慈善)을 베풀어 인근에 칭송이 자자하였다.

묘는 이포리 이포마을의 뒤쪽 구릉에 남향(南向)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정면에는 이포 들판이 아스라이 펼쳐져 있고, 동쪽으로는 남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는 명당이다. 묘역에는 혼유석(높이 22, 폭 91.5, 두께 37), 상석(높이 47, 폭 96, 두께 141), 고석(높이 38, 폭 42, 두께 43), 향로석(높이 41, 폭 42, 두께 36.5), 망주석(높이 202, 폭 36.5, 두께 37), 석양(높이 64, 폭 38, 두께 111), 장명등(높이 213.5, 폭 73.5, 두께 73), 차일석(높이 25, 폭 22, 두께 24)의 다양한 석물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향로석의 우측 앞쪽에도 향로석과 동일한 양식의 석물이 놓여 있는데, 전후사정으로 보아 제사용(祭祀用) 술병을 올려두던 제주병석으로 판단된다. 또한 상석 앞면에 전서(篆書)로 “통정대부(通政大夫) 행경성판관(行鏡城判官) 한양(漢陽) 조공창근지묘(趙公昌根之墓) 배(配) 숙부인(淑夫人) 임피임씨(臨陂林氏) 부좌(祔左)”라 쓰여 있어 부부 합장묘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상석 좌측에 “개국(開國) 오백사십이년(五百四十二年) 계유(癸酉, 1933) 팔월(八月) 일(日) 자(子) 천소(天韶) 입(立)”이라는 기사가 있어 모든 석물이 1933년에 제작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비록 일제강점기에 설치된 석물이지만 양식이나 조각 수법이 우수하여 당대의 기준작으로 삼을 만하다.

묘역 아래에는 귀부이수 양식의 묘갈이 건립되어 있다. 귀갑(龜甲)을 두른 거북이 등 위에는 하엽비좌(荷葉碑座)가 마련되어 있고, 이수에는 2마리의 용이 1개의 보주(寶珠)를 서로 다투는 형상(雙龍爭珠)이 조각되어 있다. 오석(烏石)의 비신 앞면에는 2행의 대자(大字)로 피장자의 신원을 쓰고, 나머지 삼면에 이조참판 민병승(閔丙承, 1866~?)이 지은 묘갈문을 각자하였다. 비신의 좌측 첫머리에 갈제(碣題)가 “통정대부(通政大夫) 경성판관(鏡城判官) 조공(趙公) 묘갈명병서(墓碣銘幷序)”라 되어 있어 비석의 종류가 묘갈임을 파악할 수 있다. 글씨는 당대의 명필인 전판돈령원사(前判敦寧院事) 윤용구(尹用求, 1853~1936)가 썼으며 건립연대는 1933년 7월이다. 한편, 묘역의 우측에는 아들 조성달의 묘와 자선비(慈善碑)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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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