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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란과 여주지역의 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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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재위 15년 동안이나 후사(後嗣)가 없다가 희빈(禧嬪) 장씨(張氏)가 왕자를 생산하자 서인의 격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1689년 남인에게 정권을 주면서(己巳換局) 원자(元子)로 삼았다. 동시에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했으며,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니 그가 훗날의 경종(景宗)이다. 그러나 또 다른 후궁 숙빈(淑嬪) 최씨(崔氏, 영조의 생모)가 왕자를 낳자 희빈 장씨에 대한 숙종의 총애는 점차 식어갔고, 서인들은 집요한 공세를 펼쳐 희빈 장씨가 왕비에서 다시 후궁으로 강등되고 남인들도 몰락하고 말았다(甲戌換局). 그리고 사저(私邸)로 쫓겨났던 인현왕후가 다시 왕비가 되었다.

 

그 후 몰락한 남인에 대한 치죄를 둘러싸고 서인들은 남인들을 강하게 치죄해야 한다는 강경파(노론)와 유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온건파(소론)로 양분되었다. 숙종과 노론이 희빈 장씨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해 사약을 내려 죽이자 세자의 처지는 위태해질 수밖에 없었다. 노론은 자신들이 죽인 여인의 아들이 국왕으로 즉위하는 것을 방관할 수 없었다. 숙종 또한 모후(母后)가 사형당한 한을 품은 아들이 뒤를 잇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숙종과 노론 대신 이이명(李頤命)은 1717년(숙종 43)에 이른바 ‘정유독대(丁酉獨對)’를 통해 세자(世子) 교체 문제를 논의하기에 이르렀다.1) 그러나 이 정유독대에서의 논의는 숙종의 와병(臥病)과 소론의 격렬한 반발로 실현되지 못하고 결국 세자가 대리청정을 거쳐 숙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게 되었다.

 

다급해진 노론은 경종이 즉위하자마자 경종이 후사가 없음을 이유로 경종의 이복동생인 연잉군(延礽君, 훗날의 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라고 요구했다. 지병이 있던 경종은 이 주장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노론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세제(世第)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주장하여 사실상 세제에게 정권을 넘기라고 주장하였다. 왕조국가에서 국왕이 미성년이 아닌 한 ‘대리(代理)’라는 말은 신하가 입에 담을 수 없는 금언(禁言)이었는데도 경종은 이를받아들여 대리청정을 허락했으나 이번에는 소론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소론 강경파인 김일경(金一鏡)은 노론의 세제 대리청정 주장을 역모로 몰았고 경종이 이 주장을 받아들여 정권은 소론에게 돌아갔으나 사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해 남인가(南人家)의 인물인 목호룡(睦虎龍)이 노론쪽에서 경종을 살해하려고 했다는 이른바 ‘삼급수설(三急手說)’을 고변하면서 조정은 충격에 휩싸인다.2) 이 사건의 여파로 김창집(金昌集)·조태채(趙泰采)·이관명(李觀命)·이이명(李頤命) 등 노론 사대신(四大臣)과 많은 노론가 자제들이 사형당하고 말았다(임인옥사).

 

소론은 경종이 일찍 서거하고, 노론이 지지하는 영조가 즉위하자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박필현(朴弼顯) 등 소론의 과격파들은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며 경종의 죽음에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증손자인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마침내 1728년(영조 4)에 소론 강경파가 주도하고 일부 남인들이 가담하여 군사를 일으켜 경종의 복수와 영조·노론 정권 타도를 주장하고 나섰다. 난의 주체세력은 호서·호남·영남의 3남지방은 물론 경기 평안도에까지 조직이 결성되어 있었으며 주도적으로 활동한 인물은 호서의 이인좌(李麟佐)·호남의 박필현(朴弼顯)·영남의 정희량(鄭希亮)이었다. 이들은 무신당(戊申黨)을 결성하고 서울 경기 지역에서 동조세력을 규합하였으며, 양반뿐만 아니라 지방군, 향임층(鄕任層), 노비, 명화적(明火賊) 등 중인층과 하층민까지 그 대상이 되었다.

 

이인좌는 대장으로 추대되어 1728년(영조 4) 3월 15일 청주성(淸州城)을 함락하고 경종의 원수를 갚는다는 점을 널리 선전하면서 서울로 북상하였으나 24일에 안성(安城)과 죽산(竹山)에서 관군에 격파되었고, 청주성에 남은 세력도 상당성(上黨城)에서 박민웅(朴敏雄) 등의 창의군(倡義軍)에 의해 무너졌다. 영남에서는 정희량(鄭希亮)이 거병하여 안음·거창·합천·함양을 점령하였으나 경상도관찰사가 지휘하는 관군에 토벌당했다. 호남에서는 거병 전에 박필현 등의 가담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여주에서는 조상(趙鋿)3)·조덕규(趙德奎)·조관규(趙觀奎)·조동규(趙東奎)·임서호(任瑞虎)·신윤조(辛胤祖) 등이 참가하였다. 특히 조상은 무신란(戊申亂) 때 초기부터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친척 덕규와 관규 등을 비롯하여 친구 신윤조 등과 함께 여주·이천 지역에서 그 세력을 확산시켰다. 신윤조는 여주지역 주민을 선동하여 모군(募軍)하는 역할을 하였다.4) 이들은 지평(砥平)의 군사를 포섭하여 경성(京城)에서 70~80리쯤 되는 곳에 와서 모였다가 원군(援軍)이 오기를 기다려 합세할 생각이었으나 모두 잡혀 처형당하였다.

 

무신난의 진압에는 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정권을 장악한 소론 온건파의 역할이 대단히 컸다. 난이 발생한 사실을 영조에게 알린 이는 소론의 영수였던 최규서(崔奎瑞)이며, 진압을 책임진 인물은 소론이었던 영의정 이광좌(李光佐)와 병조판서 오명항(吳命恒)이었다. 이들의 활약으로 인해 소론은 그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정미환국으로 인해 조정에서 물러나 여주의 이호(梨湖) 경내에 은둔해 있던 노론의 홍치중(洪致中)이 난의 발생사실을 미리 알았는데도, 죄폐(罪廢) 중이라 하여 사양한 일이다. 무인(武人) 윤봉휘(尹鳳輝)가 문하에 출입하다가 마침 적변이 장차 일어날 것을 알고는 3월 13일 급히 홍치중에게 가서 적의 정세를 말하고 상소하여 고하기를 권하였던 것이다.5)

 

그리고, 역적이 발생한 고을의 읍호(邑號)를 강등하는 것은 조선초부터의 전례로서 정세윤·정계윤이 살았던 이천군이 무신란으로 인해 1729년 현(縣)으로 강등되었다. 그런데도 여주는 읍호 강등의 조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여주에 세종과 효종의 능침이 있어 특별한 우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능침으로 인해 읍호를 그대로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여주지역에 근거하였던 남인세력은 완전히 그 자리를 서인-노론계에 내어주게 되었던 것이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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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