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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에 대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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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는 사람들이 청동기를 이용하여 연모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살림을 꾸리던 시기를 가리킨다. 맨 처음에는 구리에 다른 광물을 섞지 않은 순동을 그대로 두드려서 연모나 치레걸이를 만들다가, 차츰 아연이나 주석·납 등을 섞어서 단단한 청동을 만드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청동기 분포지역의 구분은 대체로 청동기의 지시유물인 동검(銅劍)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 따르면, 동검의 전체적인 모습이 중국 악기인 비파를 닮은 비파형(요령식) 동검이 많이 출토되는 고조선의 영역인 요령지역을 포함하여, 중국 동북지방과 우리나라 전역을 그 범위로 정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의 상한연대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여러 견해들이 있어, 하나로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청동기문화의 시작 연대에 대하여는 빗살무늬토기와 민무늬토기와의 관계, 청동기가 무기나 생산을 위한 연모로서 어떠한 기능을 가졌는가 하는 문제 등이 밝혀지지 않아 어려움이 많으나 학계의 대체적인 분위기는 기원전 10세기 이전으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지만, 동검을 비롯한 무기나 연모에 앞서 만들어진 청동손칼·청동단추 등이 언제, 어떻게 생산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해석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청동기문화는 크게 보아 중국 은(殷)의 청동기문화 영향을 받았다는 의견과 시베리아지역의 미누신스크(Minussinsk), 스키트(Scyth) 청동기문화에 북방 오르도스(Ordos)지역 청동기가 섞인 시베리아 청동기의 영향을 받았다는 두 가지의 견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후자의 영향이 더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청동기의 합금술과 청동기 성분을 분석하면, 중국과는 다르게 아연이 섞여 있는 점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청동기문화와 사회는 앞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삶의 방식이 다원화되면서 복합적으로 발달하게 된다. 삶의 방식에서도 농경생활이 사냥이나 채집보다는 더 큰 역할을 하게 되었고, 집도 신석기시대의 강가나 바닷가보다는 낮은 구릉지대에 위치하며, 꽤 넓은 지상가옥의 형태로 발전한다.

 

그리고 연모도 살림의 쓰임새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으며, 날이 날카로운 간석기가 널리 발달되었다. 토기는 찰흙의 바탕흙에 굵은 모래나 활석을 섞어서 구운 민무늬토기가 중심을 이루며, 생김새는 쓰임의 목적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무덤은 많은 노동력과 기술이 필요한 큰 돌을 가지고 만든 것이 보편화되었다.

 

청동기시대의 경작지는 이때의 집터가 거의 대부분 낮은 구릉지대에 있었던 점에서 논농사보다는 밭농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점은 볍씨와 조·수수·기장 등의 잡곡이 한꺼번에 출토되는 사실로도 짐작된다.

농경의 직접적인 자료가 되는 곡식은 벼농사에 관한 것과 잡곡으로 크게 나누어볼 수 있다. 탄화된 쌀은 가장 북쪽인 평양의 남경유적을 비롯하여 여주 흔암리·송국리 등의 유적에서 출토되었으며, 진양 대평리, 부안 소산리 등의 유적에서는 토기에 볍씨 자국이 찍혀 있어서 이 시기의 농경에 관한 사실을 알려준다.1)

낮은 구릉의 기슭에 있는 흔암리유적의 12호와 14호 집터에서는 화덕자리 옆과 토기 안에서 탄화된 쌀을 비롯하여, 조·수수·보리·콩 등이 함께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남경유적에서와 같이 여러 종류의 잡곡이 재배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곡물과 함께 반달돌칼·갈판·괭이·보습 등이 발견되어, 그때의 농경 기술에 대하여 더욱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송국리유적에서는 탄화된 쌀이 54-1호, 54-11호, 54-13호 집터에서 출토되었으며, 특히 54-1호 집터에서만 359g이나 되는 많은 양의 쌀이 발견되었다.

이 시기의 농경 연모를 대표하는 반달돌칼은 곡식의 이삭을 따는 데 쓰인 것으로 전국에서 출토되며, 곡식의 생태적인 면을 고려하여 만든 훌륭한 농기구로 생각된다. 그것은 벼나 조·피는 낟알이 잘 흩어지지 않고, 익는 과정도 불규칙하여 한꺼번에 딸 수 없으므로, 줄기를 자르는 낫보다는 이삭을 따는 칼이 훨씬 효율적이어서 넓게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시대의 농경에 관한 또 다른 훌륭한 자료는 대전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진 농경문청동기(農耕文靑銅器)가 있다. 따비를 가지고 밭의 이랑을 갈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이 청동기는 아랫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여러 유적에서 발견된 짐승뼈로는 돼지뼈가 가장 많은데, 범의구석의 2문화층 집터에서는 무려 20마리분의 돼지뼈가 나와 가축화의 정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초도유적에서도 사냥된 토끼·족제비 등과 함께 많은 돼지뼈가 나왔으며, 범의구석에서는 흙으로 빚어 만든 돼지 조소품이 나와, 이 시기에 돼지 기르기가 널리 퍼져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소뼈는 범의구석과 오동유적에서 찾았다.

이 시기의 집터는 거의 대부분 강 언저리나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낮은 구릉지대에 있으며, 드물게는 보령 교성리처럼 산꼭대기에 있는 경우도 있다. 앞 시기보다는 크고 비교적 많은 집들이 한곳에 모여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마을은 바람을 막아주는 작은

산을 뒤에 두고 앞으로는 작은 내가 있어 살림에 필요한 물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오늘날의 자연적인 마을과 아주 비슷하다. 그리고 가끔씩은 금굴이나 상시유적처럼 동굴이나 바위그늘을 이용하여 살림을 꾸리기도 하였다.

 

이 시대의 집은 주로 움집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움의 깊이는 신석기시대보다 훨씬 얕고 일부에서는 반지상가옥으로 발전하였다.2)

그런데 서산 휴암리, 청원 내수리, 부여 송국리, 광주 송암동, 거창 대야리 등의 유적에서는 드물게 둥근꼴의 움집이 발견되어 주목된다. 이런 둥근꼴의 움집은 집 안 가운데쪽을 긴 타원형으로 조금 판 다음 2개의 기둥을 세웠으며, 화덕자리는 없고 저장구덩이가 있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리고 집터 안의 화덕자리는 강자갈로 만들거나, 흙으로 둑을 쌓거나, 맨땅을 조금 움푹 파서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둥근꼴의 집터에서와 같이 화덕자리가 없는 경우도 있다.

집의 바닥은 맨땅을 그대로 다지기도 하고, 찰흙을 4~5cm 두께로 깐 다음 불에 구워 단단하게 만든 것도 있는데, 바닥에는 짚이나 풀을 엮어서 깔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로 평양 남경유적에서는 갈대를 엮어서 깔았던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청동기시대의 움집은 벽체와 지붕이 나누어져, 벽체가 밖에서 보이도록 되어 있다. 이렇게 되자 용마루와 도리 등 서까래를 걸 수 있는 천장 시설이 필요하며, 천장과 벽이 높아져 집의 구조가 복잡하게 되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그때 사람들은 신석기시대의 집보다 집안을 밝게 하였으며, 활용할 수 있는 면적도 훨씬 넓어졌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 집의 또 다른 특징은 한곳에 10여 채에서 100여 채 이상의 집들이 모여 취락을 이루는 것인데, 송국리·흔암리·휴암리·금탄리·석탄리·범의구석유적 등을 대표로 들 수 있다.

청동기시대의 무덤으로는 고인돌[支石墓]를 비롯하여 돌널무덤[石棺墓], 돌깐무덤[敷石墓]이 있으며, 늦은 시기가 되면 독무덤[甕棺墓]이 나타난다.3)

 

고인돌은 커다란 돌을 가지고 만든 구조물로 우리나라 선사시대의 여러 유적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진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상당히 일찍부터 조사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유적 분포를 보면 주변지역인 중국에서는 주로 요동반도에 있으며, 남부지역인 절강성에서도 가끔 발견되고, 일본은 큐슈지역에서만 나타난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지역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수만 기(基)에 이르는 많은 고인돌이 내륙은 물론 제주도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까지 퍼져 있다.

고인돌은 주로 강을 낀 낮은 구릉지대나 주변의 자연 지세에 알맞은 골짜기 방향이나 강·해안선을 따라 있다. 수적으로 많이 분포하는 평안도·황해도·전라도지역은 서해안에 인접한 지역이라는 점에서 바다와 고인돌 사이의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탁자식(북방식 : 전형) 고인돌은 판판한 굄돌을 세워서 지표 위에 네모꼴의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놓은 형식이다.

바둑판식(남방식, 기반식 : 변형) 고인돌은 땅 위에 놓인 3~4개 또는 그 이상의 받침돌이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것으로, 땅 속에 있는 무덤방은 구덩·돌널·돌덧널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개석식 고인돌은 땅 위에 커다란 덮개돌만 드러나 있는 것으로, 우리나라에 가장 많이 분포되고 있어 고인돌의 기원 문제를 밝히는 데 중요하다.

고인돌의 발굴조사 결과 제천 황석리와 양평리, 달성 진천동, 춘천 중도 등의 유적에서는 사람뼈가 나왔다. 그리고 껴묻거리로는 민무늬토기를 비롯한 여러 가지 토기와 간돌검·화살촉 등의 석기, 드물게 청동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황석리유적에서처럼 사슴이나 소과(科), 돼지 등의 짐승뼈가 발견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고인돌을 만들 때 있었던 제의(祭儀)나 묻힌 사람의 영생을 바라는 내세의 믿음에 관한 자료를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고인돌 사회의 사람들이 무덤을 만들 때 가지고 있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자를 새긴 자갈돌이 옥천 안터와 화순 대전유적에서 발견되었다.

돌널무덤[石棺墓]은 무덤방의 벽·바닥·천장을 각기 1장의 판석으로 한 상자 모양의 짜임새를 가리키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풍화암반층을 판 다음 한 벽에 여러 장의 판석을 잇대어 짠 것도 있고, 또 네 벽에 판석·모난돌·강돌을 섞어 쌓아 벽을 만든 것도 있다.

 

우리나라 돌널무덤의 기원에 관해서는 시베리아 계통의 청동기문화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시베리아지역에서는 이른 청동기시대인 안드로노보기 때 돌널무덤이 나타나 다음 단계의 카라스크-타가르기에 널리 퍼지는데,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돌널무덤과 단추 모양 장식, 동물 장식 유물이 출토되어, 이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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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당부서 문화예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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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