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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역사왜곡
작성일

명성황후 역사왜곡

진행자: 우리는 흔히 명성황후가 몇몇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된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사실 낭인이라고 하면 마구 칼을 휘두르는 폭력배를 연상하지만 낭인은 단순한 칼잡이는 아닙니다. 일본에선 극우적인 성향을 가진 대륙진출론자들를 말하는데요. 이는 명성황후시해범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확인할수가 있습니다.

정규군인에서부터 공관원, 그리고 직업언론인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모두 일본의 조선침략과정에 깊숙히 관여했던 인물들입니다. 당시 조선공사였던 미우라구로는 일본왕실의 고문관으로 만년까지 일본정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습니다. 후루구치 구마에치는 동경대를 졸업하고 외교관으로 브라질공사를 역임했고 한성신보의 사장이였던 아다치겐조 한 일본정당의 총재까지 지냅니다. 시바시로는 하바드대를 졸업하고 일본 최고의 지성인으로서 그 이후에 국회의원에 무려 7번이나 당선이 됩니다. 사건당시의 육군중좌였던 구수노세사치이코는 이후에 육군대체로 활동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있는 이 인물, 시해당시에 일본군민신문 특파원이였던 기구치겐좁니다. 기구치겐조는 다른 시해범들이 재판이 끝난 이후에 영웅대접을 받으면서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는 동안 해방직전까지 줄곧 조선에 머물러 있습니다. 무엇이 그를 조선에 남아있게 했던걸까요?

나레이션: 명성황후의 명예가 회복하지 못한데는 기구치겐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막:도쿠도미소호이기념관-일본가나가와현

나레이션: 기쿠치겐조의 흔적은 당시 그가 일했던 군민신보의 창간자인 도쿠도미소호이기념관에 남아있다. 당시 군민신보는 일본이 대룩진출을 시도했던 극우신문으로 기쿠치는 창간자인 도쿠도미소호이와 오랬동안 교류했다. 기념관에 남아있는 기쿠치의 여러장의 편지는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기념관에 보관하고 있는 명함 한장, 일제시대 기쿠치겐조의 명함이였다. 당시 그의 직업은 이왕직편찬위원, 신문기자였던 기쿠치는 이후 조선왕조를 관리하던 이왕직에서 편찬위원이였으며 이때 그는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펴내는 작업에 참여한다.

자막: 일본국회도서관

나레이션: 기쿠치겐조의 변신은 또다른 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의 국회도서관, 기쿠치겐조의 이름을 입력하자 그가 저술한 책들이 일제히 검색됐다. 보관되어 있는 기쿠치겐조의 책은 무려 일곱권, 조선왕국, 근대조선사, 대원군전등 모두 조선관련 역사책들이였다.

자막: 기쿠치겐조가 서술한 조선관련 책들

나레이션: 지은이를 알지못하면 모두 조선사람이 써야만 알맞은 책들이였다.
기쿠치겐조에게 조선은 어떠 곳이였을까?

자막: 구마모토성 - 일본 구마모토현

나레이션: 조선에 대한 기쿠치의 생각은 고향 구마모토에서 찾아진다.
구마모토는 대륙과 인접한 지리적 특성으로 정한론이 대두되었던 지역이며 명성황후의 시해자들의 절반 가까이가 이 곳 출신자들이다.

자막: 세이세이고등학교 - 구마모토현

나레이션: 조선을 비롯한 대륙진출을 목적으로 조선어교육을 최초로 실시한 곳이기도 했다.
기쿠치에게 조선은 대륙침략의 대상이였고 조선의 식민지화는 일본국을 위해서 당연한 일이였다.

자막: 박종근 교수 - 구마모토대학 제일사학자

(박종근교수 일본어로말함)
자막: (기쿠치겐조는 도쿠도미 소호이의 지시에 의해 두 가지 임무를 띄고 조선에 파견됩니다.)
하나는 신문기자로서 변화하는 조선의 상황을 보도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일본의 입장에서 정치적인 활동을 하는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기쿠치 겐조는 당시 기사를 일본에 송고하는 동시에 조선의 정치에 관계했습니다. 이 두가지 임무를 수행하는데에는 일본의 국익, 즉 국가를 위해서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습니다.

자막: 청일전쟁 종군기자 시절

나레이션: 기쿠치겐조는 기자라는 신분을 이용해 조선의 정치적 상황에 적극 개입한다. 청일전쟁에서는 종군기자로,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을때도 현장을 찾아다니며 조선의 상황을 면밀히 체크하고 자료를 수집한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개입한 결과 기쿠치겐조는 일본의 대륙진출의 정책에 대한 자신의 정변을 확립한다. 도쿠도미소호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기쿠치는

자막: 우선 조선으 정치적 운영보다 사업상 사회상의 기초를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 - 기쿠치겐조가 도쿠도미 소호이에게 보낸 편지

나레이션: 조선에서 사회상 사업상의 기초를 만들어내는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총칼을 통한 지배가 아니다. 교육, 출판, 언론을 통한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였다.

자막: 박종근 교수 - 구마모토대학 제일사학자

(박종근교수 일본어로말함)
자막: 기쿠치겐조는 이토 히로부미를 동견에서 만났는데 이토 히로부미는 (기쿠치겐조에게)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조선역사에 대한 자료가 필요하니까, 그런 자료를 수집해 관리하자는 제안을 합니다. 기쿠치겐조의 입장에선 일본의 원로(이토 히로부미)로 부터 직접 제안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비록 역사를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수집한 조선관련 자료와 조선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쿠치겐조는 여러 권의 역사책을 씁니다.

자막: [근대 조선사 上.下](1937~1939)

나레이션: 기쿠치겐조는 꾸준한 저술작업 끝에 조선근대를 총괄한 근대 조선사 상.하권을 선 보인다.
기쿠치겐조는 조선역사 전체를 당쟁과 내분의 역사로, 특히 조선의 근대는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암투가 빚은 비극으로 서술하고 있다.

자막: [대원군전 附 왕비의 일생](1923)

나레이션: 대원군의 일생을 평가한 대원군전, 왕비의 일생이란 부제가 달린 이 책에서 기쿠치겐조느 명성황후를 가혹하리 만큼 평가절하하고 있다.

자막: 그녀의 일생은 비밀 속에 죄악으로 이루어졌으며 이왕조의 최후를 대표하고, 이씨 왕조의 멸망을 만들어 낸 것이 그녀이다.

나레이션: 명성황후의 일생은 비밀과 죄악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로인해 결국 이씨왕조가 멸망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교모하게 명성황후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자막: 신국주 명예교수 -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신국주명예교수: 일제 통치하에는 일본외교비밀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특히 우리나라 한국근대사에 대해서는 일체 공부도 못하고 연구도 못하고 한국인은 거기에 접할 수 없게 만들고 일본역사를 가지고 대체 했습니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고 보니까 일본 어용학자에 저술된 우리나라 근대사밖에는 쓸 수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더우기 우리는 근대사의 자료를 일본인이 전부 몰수해갔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민족발전에 진정한 우리 근대사를 우리가 서술 못한 그러한 실정에 있었던 것입니다.

나레이션: 명성황후에 대한 왜곡은 기쿠치를 비롯한 다른 일본인들에 의해서도 자행된다.
기쿠치를 스승으로 모셨던 작가 호소이 하지매도 그 중 한명이다.

자막: 기쿠치겐조 교열 - 호소이하지매 저

자막: 대원군과 민비의 음모술수, 골육상쟁, 독살, 참살, 형살 등 온갖 참극을 살피건대 민비는 여왕이 되자 시아버지인 대원군을 국외로 추방하고... 정치는 복수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 [여와민비] 호소이하지매 著

나레이션: 호소이 하지매는 조선의 식민주의 사관에 소설적 상상력을 덧붙여 조선의 근대를 궁중에서 벌어진 추악한 역사의 대립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자막: 관동지진 이후 일본과 중국, 조선각지를 순회하면서 약 300여회에 걸쳐 조선의 실정에 대해 강연했다. - [여와민비] 호소이하지매 著

나레이션: 심지어 자신의 글을 신문에 연재하고 일본과 조선각지를 돌며 대규모 강연을 하기도 했다.
궁중의 일을 알 수 없던 시대, 대중을 향한 호소이 하지매의 강연은 조선사람에게도 그대로 받아들여진다.
이들에 의해 왜곡된 역사와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자막: 고종이 이미 장성하여 섭정이 필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민씨는 대원군을 배척하고 민씨 일족을 조종에 대립하여 정권을 좌우하였다. <국사대요> 1949년

나레이션: 해방이된 후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1940년대말에 발간된 우리 역사서에는 대원군을 배척하고 정권을 휘드른 왕비라는평가가 발견대고 있다. 이런 평가는 후대에까지 이어진다.

자막: 대원군이 물러가니 대왕은 암약한 중에 민후는 권변이 많은지라 그럼으로 정권은 그만 민후에게 들어갔다.
...대원군은 그를 심히 분히 여기니라. <대한역사> 1960년

나레이션: 1960년에 출간된 역사서에서는 명성황후를 권변이 많은, 즉 임기응변에 능한것으로 서술되고 있다.
조선의 근대를 대원군과 민비의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서술한 일본의 식민사관이 그대로 답습되어 온 것이다.
두 권에의해 악의적으로 왜곡된 명성황후, 거기에는 일본의 숨은 의도가 있었다.
여자가 나서서 조선을 망하게 했으니 죽어 마땅하다는 인식을 조장해 자신들이 저지른 국모살해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철저히 부정하고자 했던것이다.

진행자: 이 곳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명성황후는 16살에 고종비정비로 간택됩니다. 그리고 마흔넷의 나이로 일본에 의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습니다.
외국인이 다른나라의 왕실을 침입해서 그 나라 왕비를 죽이는일은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일입니다. 명성황후가 왕비였던 때는 한국역사상 국내외적으로 최대의 격변기였습니다.

근대화의 추진과 외세침략의 견제라는 이중적인 부담을 안고 명성황후는 고종을 보좌해서 왕권을 강화시키는일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명성황후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명성황후를 시해한 그 이분들이 남겨놓은 기록에 근거해서 부정적인 평가만을 해왔던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명성황후를 역사의 전면에 드러내서 잃어버린 얼굴을 되찾아 주는 것은 일제에 의해서 왜곡되고 감추어진 역사를 되살리는 일입니다.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관을 세워서 명성황후를 기념해야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것입니다.

자막: 명성황후 생가 -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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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