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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의 면모
작성일

명성황후의 면모

진행자: 명성황후가 살았던 19세기 말은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고 있던 시기로서 이미 많은 서양인들이 조선에 들어왔었습니다. 명성황후는 서양인들과 친밀하게 지내면서 서양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고 전해지는되요, 여의사인 언더우드 부인을 자신의 주치의를 둘 정도였습니다. 후일 언더우드 부인은 조선에서의 생활을 책으로 펴냈는데요. 명성황후와의 경험을 비교적 자세히 적고 있습니다. 언더우드 부인을 만나보지요.

진행자: 안녕하십니까?

언더우드부인: Hello!

진행자: 명성황후의 주치의로서 자주 대면할 기회가 있었을텐데 가까이서 뵜던 명성황후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언더우드 부인: 제가 황후를 처음 뵌것은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부임한 1888년 이었습니다. 이때 황후의 나이는 30대 중반으로 나이에 비해 훨씬 젊어보였죠. 대화할때 편안하고 소박한 모습이 너무 매력적이었습니다.

진행자: 궁궐을 벗어나기가 힘든게 왕비의 생활이잖아요. 그래서 주로 사람들을 통해서 정보를 얻어다고 하는데 두 분은 주로 어떤 대화를 나누었습니까?

언더우드 부인: 황후의 관심사는 다양했습니다. 제게 세계 여러나라의 역사와 풍습, 제도등을 물으셨는데 언젠가 크리스마스 전날에는 제게 크리스마스의 기원과 의미등에 대해 얘기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황후꼐서는 제 얘기를 주의깊게 들으셨고 때때로 저의 얘기를 잘 이해 못한 왕과 왕세자비꼐도 설명을 잘해 주셨습니다. 황후는 저의 조국 미국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질문을 하셨는데요. 다 들으신 후에는 조선도 미국처럼 힘이 있었으면 하듯 읊조리듯 하셨습니다.

진행자: 아, 정말 다방면에 관심이 많으셨네요. 그 중에서도 특별히 명성황후께서 관심을 두신 분야가 따로 있었습니까?

언더우드 부인: 서양인들을 통해 문물을 받아들이는것에 무척 적극적이셨습니다. 서양식 학교를 설립하시려고 제게 필요한 돈이 얼마인지 산술을 해달라는 부탁을 하셨고 조선에서 처음으로 여성을 교육하는 이화학당이 창립되자 현판을 하사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진행자: 아, 그렇다면 명성황후께서는 교육에도 대단한 관심이 많으셨군요. 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서양 문물에 대한 명성황후의 관심은 단순한 호기심에 그치는것이 아니라 이것을 조선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까지도 고심했음을 알수 있었습니다. 새롭게 발견하는 명성황후의 면모인데요, 그렇다면 명성황후는 또다른 어떤 모습을 갖고 있었을까요?

자막: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나레이션: 충남 아산에 있는 민속마을, 명성황후가 친 어머니처럼 따랐던 이모 이씨부인이 시집온 곳이다. 지난 81년 이곳 외암 이씨 가문에서 명성황후의 서찰집 한 권이 발견됐다.

자막: 이득선(60세) - 외암 이씨 후손

이득선: 할아버지께서 명성황후의 어찰이니까 귀하다고 생각하시고 이렇게 편집첩을 한장씩 한장씩 만들어 놓으셔서 이다음에 며느리가 됐던 뭐가 오던 궁체니까 이 궁체를 써서 글씨를 배우는 책첩으로 해도 좋고

나레이션: 황후가 궁궐에서 이모에게 보낸 편지였다.

자막: 명성황 서찰집

나레이션: 기름을 먹인 표지에 한지를 겹겹이 만들어 붙인 속지, 황후의 편지 답게 소중히 보관되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발견된 스물한통의 편지에는 아들 순종에 대한 어머니로서의 감정과 왕비로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잘 드러나 있어 황후의 개인적인 성품을 잘 알수 있게 해주었다. 특히 이모 이씨 부인에 대한 명성황후의 감정은 각별한것으로

자막: 나는 감기가 좀처럼 낫지 않아 괴롭습니다.

나레이션: 심신의 괴로움을 허물없이 털어놓을 정도였다. 두 사람의 이런 친밀한 관계로인해 황후는 때로 부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가까운 이모의 부탁이라해도 청탁에 대한 명성황후의 태도는 매우 단언했음을 알 수 있다.

자막: 김명수는 불쌍한 줄 모르지 않지만 가서 아홉 달이나 무엇을 하였단 말입니까. 어찌할수 없소이다.

자막: 박요순 명예교수 - 한남대 국문과

박요순명예교수: 청탁이 오고갔던것은 사실인데 근데 거기보면은 무조건이 아니고 시시비비를 가려서 청탁을 받아들인것을 볼 수있습니다. 거론된것을 보면 아무게를 어디에 보냈더니 치적이 뭐냐, 그것을 단단히 호통쳐서 나무한다든지 또 아무게아무게 추천을 했어도 그건 자격이 없다해서 거절한다든지 해서 아주 분명한 성격인 것이 거기에 드러나지요. 해서 거기에 보면 아주 칼날같고 정확한 성품인것을 우리가 볼 수있습니다.

나레이션: 명성황후는 외가쪽 사람들, 특히 민씨가문과 긴밀한 관계속에 왕비의 역할을 수행해 갔다. 실제로 1870년 말부터 1890년대까지 정계에 진출한 민씨는 약 50여명, 민씨 외척세력의 등용이라는 부정적 평가도 있지만 명성황후가 민씨를 등용해 고종 주변에 두게한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자막: 이배용 교수 - 이화여대 사학과

이배용교수: 명성황후의 친족세력들은 지금의 외척세력들과는 성격이 달랐습니다. 이를테면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나 대원군 섭정에서 보듯이 왕권을 압도한다든가 정권을 휘두르는 형태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데서 명성황후가 구심점이되서 그러면서 척족세력들과 함께 왕의 철저한 보좌 세력내지는 지지기반의 역할을 다해서 오히려 왕권을 강화했다고 볼 수있습니다.

자막: 윤치호 일기

나레이션: 왕권강화에 애썼던 황후의 모습은 미국공사의 통역관이었던 윤치호의 일기에도 잘 나타나 있다.

자막: 국왕 부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청국이 무리하게 우리나라를 압제한다면 미국과 미국공사가 있는 힘껏 도와 주겠느냐(1884년 3월 4일)

나레이션: 명성황후는 청나라세력을 견제하기위해 미국을 이용하려 했으며

자막: 개화기의 한미관계(헤링턴 著)

나레이션: 1895년 미국공사 알렌에게 운산금광채굴권을 양도한것도 미국이 청의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자막: With Her Majcsty interested, the contract was soon signed, delivered
왕비께서 관심을 가졌으므로 조약은 곧 서명되고 조약서는 넘겨졌다.

나레이션: 이런 황후의 모습을 외국인들은 이렇게 평가했다.

자막: 왕비는 일본인들을 반대하며 자기권력을 증가시켜 나갔다. 친구들에게는 친절하나 적에게는 타협을 모르는 분이었다. - 프레드릭 A. 멕켄지(런던 데일리매일신문 특파원)

나레이션: 영국의 신문기자 멕켄지는 친구들에게는 친절하나 적에게는 타협을 하지않는 의지의 여성으로 평가했고

자막: 개성이 강하고 굽힐 줄 모르는 의지의 여성이었으며 시대를 앞섰고 여성을 초월한 정치가였다. - 윌리암 F. 샌즈(주조선 미국 서기관)

나레이션: 미국의 외교관 샌즈는 당시의 여성상을 뛰어넘어 기대큰 성정을 가진 한명의 당당한 정치가로 황후를 평가했다.

자막: 왕비는 재능이 풍부한 분 같았다. 국왕에게 조언할 때의 왕비모습은 좀처럼 빈틈이 없어 보였다. - 미우라 고로우 (주조선 일본공사)

나레이션: 일본공사 미우라 역시 국왕에게 조언할때는 좀처럼 빈틈을 찾아볼수 가 없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종은 이렇게 정치일선에 나섰던 명성황후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자막: 주언집(고종의 글을 모아놓은 문집)

나레이션: 고종의 글을 모아놓은 주연집에서 그것을 알수 있다.

자막: 짐에게 힘든일이 있으면 반드시 앉아서 아침까지 기다렸으며 짐이 근심하고 경계하는 일이 있으면 대책을 세워 풀어주었다.

나레이션: 명성황후는 왕을 능가하려는 왕비가 아니었다. 고종은 황후를 신뢰하고 의지할 수있는 대상으로 여겼다.

자막: 심원한 생각으로 미래의 일을 잘 요량하는 황후의 식견은 고금에 따를 사람이 없다.

나레이션: 미래를 예측해 적당한 방안을 제시하는 황후와 같은 인물은 다시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할정도로 고종에게 있어 명성황후는 국난을 함께 극복하려는 동반자였던 것이다.

자막: 이배용 교수 - 이화여대 사학과

이배용교수: 명성황후 민비는 정지적 감각이 뛰어났던 아주 총명한 왕비였습니다. 여인으로서 미모로서 고종의 총애를 받기보다는 고종의 정치적인 반려자로서 또 왕의 정치보좌역할을 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근대화라는 그런 변화의 시대에 정확한 현실인식과 시대인식을 가지고 나름대로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그리고 능동적으로 개척했던 새로운 시대의 왕비상을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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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