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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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도자기 – 여주 도자기의 역사

  • 전시기간 2023-11-01 ~ 2023-11-23
  • 전시장소 여주도자문화센터
  • 전시작가 여주 도자기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전시내용
여주 도자기의 시작은 1999년 국립중앙박물관이 발견한 여주 중암리 고려백자가마터(驪州中岩里高麗白瓷窯址)1)를 통해 고려 초 무렵으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 초기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도기소(陶器所) 하나가 여주 관청의 북쪽 관산(串山)에 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만큼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질 좋은 흙, 맑은 물, 땔감으로 쓸 나무가 풍부해 도자기를 빚기에 최적의 장소인 여주가 오랜 시간 도자 산업 중심지로서의 명맥을 이어온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다시 돌아와 중암리 고려백자가마터는 2001년과 2003년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발굴, 조사를 통해 용인 서리 고려백자가마터, 시흥 방산동 청자와 백자 가마터와 함께 우리나라 초기 가마터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중암리 고려백자가마터는 굴 모양의 등요登窯로 크기가 20.4m에 이르며 아궁이, 소성실, 굴뚝부 등이 잘 보존된 편이고 가마터 인근 퇴적층에서는 2,200여 점의 자기가 출토되어 고고학적 가치가 충분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발굴된 유물은 12기종으로 분류되는데 그중에서도 선종 불교와 함께 발달한 차 문화의 번성으로 수요량이 급증했던 것으로 추측되는 완(碗)2)이 전체의 45.77%에 이를 정도로 많은 양이 발견되었습니다. 특히 접지면 폭이 1cm 내외로 그릇의 굽을 깎아낸 모양이 마치 해 주위에 비낀 무리와 비슷하다 하여 해무리굽완(素文日暈底碗)3)이라 불리는 완이 많이 출토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당(唐) 말기에서 오대(五代) 초기인 8~9세기에 유행하다가 10세기에 이르러 사라지는데 중국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의 초기 가마를 살펴보면 예외 없이 출토되므로 초기 도자사 연구에서 발생 및 전개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만한 점은 출토된 유물의 대다수가 갑번(匣燔)한 갑기(匣器)4)라는 것으로 주로 상류층을 상대로 한 고급 자기의 제작에 이용되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가장 이른 시기로 추정되는 중암리 고려백자가마터를 필두로 11~14세기 운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전리, 부평리 가마터, 13~14세기 북내면 청자 가마터는 물론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부터 후기까지 꾸준히 분포한 강천면과 북내면 조선백자 가마터 등 현재까지 조사된 여주지역 가마터는 84기에 달하는데 이는 여주가 고려 초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도자 역사의 전시기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해왔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시간이 흐른 1884년, 관영 사기 제조장이었던 사옹원(司饔院)5) 분원(分院)6)이 폐쇄되면서 일자리를 잃은 사기장들이 여주를 비롯한 전국 각지로 뿔뿔이 흩어지며 민요(民窯)7)를 생성했지만, 일정 부분 전통의 단절은 불가피했습니다. 1895년 이효순이 일본 기술자를 초빙해 근대 도자 제작기법을 국내에 도입한 사례는 국력의 쇠락으로 예부터 이어온 고유의 기술이 상당 부분 유실되었으며, 산업화라는 급격한 시대적 변화를 수용하지 못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수탈은 더욱더 노골적이고 전방위적으로 이뤄졌는데 도자 산업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의 조선 도자기 애호 현상은 유별났는데 20세기를 전후로 일본에서 유행한 골동 취미, 고고 취미와 맞물려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공예품을 상찬한 아사카와 노리타카(浅川伯教 1884~1964),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1891~1931) 형제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와 같은 일본인 학자들의 활동 으로 더욱 고조되었습니다.8) 이러한 현상은 우리 고유의 청자와 백자에 대한 수요를 불러왔고 모조품 제작 산업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장을 세울 자본도, 근대적 도자 산업에 필요한 기술력도 부족했습니다. 전국 각지에 일본인이 설립해 운영한 전통 도자 모조품 공장들은 한국인이 일했지만, 그 결과물과 수익의 대부분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모순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입니다. 동시대 여주 도자기의 역사를 살펴보면 1892년 분원 사기장이었던 이희풍이 여주 북내면 오금리에 도기 공장을 설립하였고, 1906년 장규환의 자기 공장을, 1907년에는 김수긍이 도기 공장을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김현채, 조원식이 등요를 축조하면서 다시금 도자기 중심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여주였지만 시대적 부침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1917년 도미타 기사쿠가 조원식이 운영하던 요를 인수해 고려자기와 조선백자 모조품을 생산하는 제조장으로 만든 것은 여주에도 일본의 영향이 미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입니다.

일제의 수탈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던 우리나라는 불과 수십 년 만에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로 인한 급격한 소득의 증가는 생활 수준의 향상으로 이어졌고 자연스레 여주 도자 산업에도 훈풍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1950에서 60년대까지 여주제와공장, 조선도기주식회사, 한양요업, 동일제도사, 신흥요업, 고려자기, 서울요업, 조일요업 등이 여주산 점토를 이용한 백자 식기, 위생도기, 애자 등을 생산하였고, 1970년대 조병호의 고성도예, 조재호의 삼우요, 정구천의 흥국도예연구원, 김팔용의 조일도예연구소 등이 문을 열었습니다. 이후 1980년대부터 90년대는 자고 나면 도자기 요장이 하나씩 생긴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호황기를 맞이했습니다. 1990년 시작된 제1회 여주민속도자기대축제는 여주도자기축제로 개칭되었을 뿐 도자기를 중심으로 한 성공적인 지역 축제로 지금껏 명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비단 여주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도자 산업은 21세기 이후 여러 내・외부 요인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트렌드와 취향의 다변화, 시설과 인력의 노후화는 특히나 위협적인 불안 요소입니다.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크게 두 가지의 긍정적 측면이 여주 도자 산업의 지속 가능성과 재도약에 대한 희망을 품게 합니다. 첫째로 여주 도예인의 자발적인 인식 개선과 변화에 대응하는 능동적 자세로의 전환 그리고 단합을 통한 세력화 모색입니다. 여주시 관내 도자업체는 400여 개에 이르는 만큼 각기 다른 생각과 다종다양한 제품을 생산해 왔습니다. 당연히 각자 생각하는 관점이 다르고 추구하는 바도 달랐습니다. 호황기에는 각자도생하더라도 충분히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지만, 변화의 파고가 큰 만큼 파도에 몸을 맡기듯 상황을 수긍하고 변화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수적입니다. 규모의 경제 관점에서 필요할 때는 힘을 모으는 ‘따로 또 같이’ 역시 생각해봐야 할 시점이기도 합니다. 다행히도 여주의 도예인분들은 속도와 방향성에 조금씩 차이가 있을지언정 여주도자기사업협동조합을 중심으로 공통의 목표를 향해 궤도를 수정하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하나로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둘째로 공공영역에서의 관심과 대응입니다. 여주시는 도자 산업을 단순히 제조업으로 인식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 예술, 관광, 체험 등과 결합해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확장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정책수요자를 위한 다양한 맞춤형 지원을 전개 중이며 적극적인 행정 지원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올해 중 선보일 소공인 집적지구 공동기반시설 구축은 그중 하나로 도자 산업 혁신 클러스터를 조성하고 선도적 온라인 시장 선점, 신규시장 개척에 박차를 가하는 단초가 될 것입니다. 코로나-19에 대한 대응의 일환으로 시작된 것이기는 하지만 여주 세종문화재단의 여주 도자기 온라인 쇼핑몰 ‘여주몰’의 런칭과 도예인 특화 지원 사업 역시 그 성과 여부를 떠나 고무적인 변화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주 도자기는 천년이 넘는 긴 시간동안 여주에 터를 잡고 살아온 많은 이들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기반이었고, 우리 민족의 정신과 미감을 대표하는 소중한 자산이기도 했습니다. 짧은 글이었지만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면 힘든 시기도, 순탄하고 행복했던 시기도 존재하는 것을 확인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모쪼록 여주 도자기의 앞날에 오늘보다는 내일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매일이기를 고대하며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힘을 모은다면 충분히 실현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 여주시청 문화교육국 관광체육과 도예팀 안준형 주무관




1) 중암리에는 지금까지 3개소의 고려시대 백자 가마터가 발굴되었으며, 청자가마터 5곳도 발견되었다
2) 차를 마시는데 사용하는 찻그릇 중 하나
3) 중국에서는 옥벽저(玉璧底), 일본에서는 쟈노메고다이(蛇の目高臺)라 불렸다
4) 궁중으로 조달하기 위하여 그릇을 생산하는 것을 예번(例燔), 사기장들이 사사로이 만들어 파는 것을 사번(私燔)이라 하는데, 갑기(匣器)는 사번이면서 예번보다 고급이었다
5) 조선 시대 임금의 식사와 대궐 안의 식사에 관한 모든 일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로 음식 재료의 조달, 음식을 조리하는 수라간을 물론 식기를 생산하던 분원도 사옹원 소속이었다
6) 조선시대 국가에 필요한 관어용(官御用) 도자기의 조달은 15세기 전반 전국의 자기소(磁器所, 139개소), 도기소(陶器所, 185개소)에서 토산 공물로서 세공(歲貢)・별공(別貢)의 방법으로 충당하였는데 15세기 후반경부터는 도자기의 제작을 국가가 직접 담당하여 사옹원의 분원을 상품자기(上品磁器)의 토산 공물 산지인 경기도 광주에 설치하고 국가가 직접 충당하였다
7) 나라에서 업격히 관리하던 관요와 달리 민간에서 사사로이 도자기를 굽던 가마, 또는 거기서 만든 도자기
8) 허보윤, 『권순형과 현대도예』, 미진사, 2009, p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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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