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도자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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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도자기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 여주 도자기 사진
    여주 도자기의 역사는

    199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발견한 여주 중암리 고려백자가마터(驪州中岩里高麗白瓷窯址)1를 통해 고려초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발견은 2001년과 2003년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경기도박물관의 발굴, 조사를 통해 여주 도자기의 역사를 일천년 가까이 끌어올렸을 뿐만 아니라 용인 서리고려백자가마터(龍仁西里高麗白磁窯址)2, 시흥 방산동 청자와 백자 가마터(始興芳山洞靑瓷白磁窯址)3 와 함께 우리나라 초기 가마터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기에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 10세기 이후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중암리 고려백자가마터는 굴 모양의 등요(登窯)로 크기가 20.4m에 이르며 아궁이, 소성실, 굴뚝부 등이 잘 보존된 편이고 가마터 인근 퇴적층에서는 2,200여 점의 자기가 출토되어 고고학적 가치가 충분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발굴된 유물은 12기종으로 분류되는데 그중에서도 선종 불교와 함께 발달한 차 문화의 번성으로 수요량이 급증했던 것으로 추측되는 완(碗)4이 전체의 45.77%에 이를 정도로 많은 양이 발견되었습니다. 번성으로 수요량이 급증했던 것으로 추측되는 완(碗)4)이 전체의 45.77%에 이를 정도로 많은 양이 발견되었습니다. 특히 접지면 폭이 1cm 내외로 그릇의 굽을 깎아낸 모양이 마치 해 주위에 비낀 무리와 비슷하다 하여 해무리굽완(日暈底碗)5이라 불리는 완이 많이 출토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당(唐)말기에서 오대(五代) 초기인 8~9세기에 유행하다가 10세기에 이르러 사라지는데 중국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의 초기 가마에 예외 없이 출토되므로 초기 도자사 연구에서 발생 및 전개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만한 점은 중암리 가마터에서 출토된 유물의 대다수가 갑번(甲燔)한 갑기(匣器)6라는 것입니다.
    갑번은 가마 안의 잡물(雜物)이나 재가 자기에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거나, 불길이 직접 그릇에 닿지 않게 하고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내화토로 만든 합인 갑발(匣鉢)안에 자기를 넣어 굽는 방식으로 도지미(陶枕)7 위에 자기 1개를 올려 굽는 예번(例燔)이나, 도지미 위에 자기를 여러 개 겹쳐서 굽는 상번(常燔)에 비해 생산성이 떨어지지만, 최고 품질의 자기를 생산할 수 있는 방식임을 고려할 때 주로 상류층을 상대로 한 고급 자기의 제작에 이용되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가장 이른 시기로 추정되는 중암리 고려백자가마터를 필두로 11~14세기 운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전리, 부평리 가마터, 13~14세기 북내면 청자 가마터는 물론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부터 후기까지 꾸준히 분포한 강천면과 북내면 조선백자 가마터 등 현재까지 조사된 여주지역 가마터는 84기에 달하는데 이는 여주가 고려 초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도자 역사의 전시기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해왔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 관영 사기 제조장
    시간이 흐른 1884년,

    관영 사기 제조장이었던 사옹원(司饔院)8 분원(分院)9이 폐쇄되면서 일자리를 잃은 사기장들이 여주, 이천, 문경, 괴산, 단양 등 전국 각지로 뿔뿔이 흩어지며 민요(民窯)10를 생성했지만, 일정 부분 전통의 단절은 불가피했습니다.

    1895년 이효순이 일본 기술자를 초빙해 근대 도자 제작기법을 국내에 도입한 사례는 국력의 쇠락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자기 생산기술과 체계가 산업화라는 급격한 시대적 변화를 수용하지 못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조선 후기를 시작으로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수탈은 더 노골적이고 전방위적으로 이뤄졌는데 도자 산업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 도자기
    당시 일본인들의 조선 도자기 애호 현상은

    유별난 것이었는데 20세기를 전후하여 일본에서 유행한 골동 취미, 고고 취미와 맞물려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공예품을 상찬한 아사카와 노리다카(浅川伯教, 1884~1964),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1891~1931)형제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 1889~1961)와 같은 일본인 학자들의 활동으로 더욱 고조되었습니다.11

    이러한 현상은 우리 고유의 청자와 백자에 대한 수요를 불러왔고 모조품 제작산업으로 이어졌습니다.

  • 도자기 터
    하지만 아쉽게도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장을 세울 자본도, 근대적 도자 산업에 필요한 기술력도 부족했습니다.

    1900년 다니구치(谷口)의 충북 괴산 도기 공장, 1905년 히라가 요시미(平賀義美)의 공업전습소, 1907년 이토(伊滕)의 서울 영등포 도기 공장, 1908년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의 평안남도 진남포 도미타합자회사, 1909년 평안남도 후쿠소제도소(福將製陶), 1911년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의 서울 묵정동 한양고려소, 1928년 스기미즈 타케에몬(杉光武石衛門)의 충남 대전 스기미즈 계룡소요원 등 일본인이 설립해 운영한 전통 도자 모조품 공장들은 한국인이 일했지만, 그 결과물과 수익의 대부분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모순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입니다.

    당시 여주 도자기의 역사를 살펴보면 1892년 분원 사기장이었던 이희풍이 여주 북내면 오금리에 도기 공장을 설립하였고, 1906년 장규환이 자기 공장을, 1907년에는 김수긍이 도기 공장을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김현채, 조원식이 등요를 축조하면서 다시금 도자기 중심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여주였지만 시대적 부침은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1917년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가 조원식이 운영하던 요(窯)를 인수해 고려자기와 조선백자 모조품을 생산하는 제조장으로 만든 것은 여주에도 일본의 영향이 미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입니다.

  • 다시 전국적인 상황을 살펴보자면 일제 치하 수십 년에 걸친 청자와 백자 모방품의 제작은 일정 부분 성과를 거뒀지만, 외부의 자본과 기술에 의한 것이었기에 마냥 한국 도자기의 재부흥이라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일제의 유기공출12이 시행되었는데 이 사건은 유기 식기의 빈자리를 도자 식기가 대체하면서 일시적이나마 도자기 수요의 증가를 불러일으켰고 1942년 행남사, 1943년 한국도자기와 같은 우리 자본에 의한 근대식 도자 생산공장 설립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엄혹했던 일제 강점기를 벗어나 비로소 해방을 맞이한 1945년. 우리나라 도자 산업은 다시금 일어나려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발발한 한국전쟁을 치르고 나서야 새로운 시작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전통 도자의 복원을 기치로 1955년 록펠러 재단의 후원으로 진행된 한국조형문화연구소의 발족, 1956년 한국미술품연구소의 설립에 이어 1959년 황종구13에 의해 이화여자대학교에 도예연구소가 설립되었고, 1960년 홍익대학교에서는 스탠리 피스틱14원대정15, 김익영16, 김석환17, 정담순18에게 현대 도자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수혜를 입은 이들은 훗날 주요 대학에 자리를 잡으며 후학 양성을 통해 국내 도자 문화 부흥의 실마리가 되었으며 이들이 머물던 수광리 오름가마19는 이천시가 근현대 전통도자의 중심지로 자리잡는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 일제의 수탈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던 우리나라는 불과 수십 년 만에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로 인한 급격한 소득의 증가는 생활 수준의 향상으로 이어졌고, 자연스레 삶의 질과 밀접한 생필품을 시작으로 생활 전반에 걸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조금 비싸더라도 건강한 먹거리를 찾고, 번거롭더라도 환경을 생각하는 소비를 하는 이들이 점차 늘어나게 된 것입니다.
    문화와 예술을 향유하고자 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대중문화가 자리 잡은 것도 이맘때입니다.

    정확히 연도를 단정 짓기는 어려워도 대략 이 시기를 전후해 근 수십 년간 한국인의 밥상을 점령했던 양은(german silver, 洋銀)20, 멜라민 수지(melamine resin)21, 스테인리스(stainless steel), 법랑(porcelain enamel, 琺瑯)22 식기 대신 안전하고 아름다운 도자기 식기가 다시금 주목받게 됩니다.
    왜사기(倭沙器)23 등 외래자기를 수입하면서 왕실에서조차 분원사기 사용을 중단한 1876년 이래 거의 100여 년 만의 일입니다.

    개개인의 개성을 자유롭게 표출하는 문화가 확산하면서 희소성 있는 나만의 도자기에 대한 대중의 수요가 생겨나게 되었고 앞서 서술한 한국 현대도예 1세대 교육자들의 교육을 받은 도예가 및 도자 디자이너들이 지속적으로 배출되면서 창의적이고 현대적인 수공예 도자 식기 시장이 형성되었습니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교육과정을 거친 1970~90년대 당시의 젊은 작가들은 더 넓은 작업 공간, 자유로운 가마 소성, 재료수급의 용이성 등 쾌적한 작업 환경을 이유로 서울을 벗어나 전국 각지에 자리 잡게 되는데 특히 전통적으로 도자기가 융성한 여주로 대거 유입되었습니다. 자연스레 여주 도자 산업에도 훈풍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1950에서 60년대까지 여주제와공장, 조선도기주식회사, 한양요업, 동일제도사, 신흥요업, 고려자기, 서울요업, 조일요업 등이 여주산 점토를 이용한 백자 식기, 위생도기, 애자 등을 생산하였고, 1970년대 조병호의 고성도예, 조재호의 삼우요, 정구천의 흥국도예연구원, 김팔용의 조일도예연구소 등이 문을 열었습니다.

    이후 1980년대부터 90년대는 자고 나면 도자기 요장이 하나씩 생긴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호황기를 맞이했습니다.

  • 여주도자기축제 장소
    1990년 시작된

    제1회 여주민속도자기대축제는 여주도자기축제로 개칭되었을 뿐 도자기를 중심으로 한 성공적인 지역 축제로 지금껏 명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비단 여주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도자 산업은 21세기 이후 여러 내・외부 요인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트렌드와 취향의 다변화, 시설과 인력의 노후화는 특히나 위협적인 불안 요소입니다.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크게 두 가지의 긍정적 측면이 여주 도자 산업의 지속 가능성과 재도약에 대한 희망을 품게 합니다.

    첫째로 여주 도예인의 자발적인 인식 개선과 변화에 대응하는 능동적 자세로의 전환 그리고 단합을 통한 세력화 모색입니다.
    여주시 관내 도자업체는 500여 개에 이르는 만큼 각기 다른 생각과 다종다양한 제품을 생산해 왔습니다.
    당연히 각자 생각하는 관점이 다르고 추구하는 바도 달랐습니다.
    호황기에는 각자도생하더라도 충분히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지만, 변화의 파고가 큰 만큼 파도에 몸을 맡기듯 상황을 수긍하고 변화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수적입니다.
    규모의 경제 관점에서 필요할 때는 힘을 모으는 ‘따로 또 같이’ 역시 생각해봐야 할 시점이기도 합니다.
    다행히도 여주의 도예인분들은 속도와 방향성에 조금씩 차이가 있을지언정 여주도자기사업협동조합을 중심으로 공통의 목표를 향해 궤도를 수정하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하나로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둘째로 공공영역에서의 관심과 대응입니다.
    여주시는 도자 산업을 단순히 제조업으로 인식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 예술, 관광, 체험 등과 결합해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확장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정책수요자를 위한 다양한 맞춤형 지원을 전개 중이며 적극적인 행정 지원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올해 중 선보일 소공인 집적지구 공동기반시설 구축은 그중 하나로 도자 산업 혁신 클러스터를 조성하고 선도적 온라인 시장 선점, 신규시장 개척에 박차를 가하는 단초가 될 것입니다.

  • 코로나-19에 대한 대응의 일환으로 시작된 것이기는 하지만

    여주 세종문화재단의 여주 도자기 온라인 쇼핑몰 ‘여주몰’의 런칭과 도예인 특화 지원 사업 역시 그 성과 여부를 떠나 고무적인 변화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주 도자기는 천년이 넘는 긴 시간동안 여주에 터를 잡고 살아온 많은 이들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기반이었고,
    우리 민족의 정신과 미감을 대표하는 소중한 자산이기도 했습니다.

    짧은 글이었지만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면 힘든 시기도, 순탄하고 행복했던 시기도 존재하는 것을 확인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모쪼록 여주 도자기의 앞날에 오늘보다는 내일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매일이기를 고대하며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힘을 모은다면 충분히 실현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여주시청 문화경제국 관광체육과 도예팀 안준형 주무관
  1. 중암리에서는 지금까지 3개소의 고려시대 백자 가마터가 발견되었으며, 청자 가마터 5곳도 발견되었다.
  2. 경기 용인시 이동면 서리의 가마터로 1960년대 이후 발견되어 호암미술관이 1984, 87, 88년 세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하였고 1989년 사적 제329호로 지정되었다.
  3. 경기 시흥시 방산동에 있는 가마터로 1997년과 98년 두차례의 발굴조사 결과 9~10세기 가마터로 밝혀졌으며 1999년 사적 제413호로 지정되었다.
  4. 차를 마시는데 사용하는 찻 그릇중 하나
  5. 중국에서는 옥벽저(玉璧低), 일본에서는 쟈노메고다이(蛇の目高臺, じゃのめこうだい)라 불렸다.
  6. 갑번(匣燔)을 통해 만든 그릇
  7. 삼국시대부터 사용된 가마에서 도기를 구울 때 그릇 바닥에 놓는 받침으로 내화성 있는 점토로 제작하였다.
  8. 조선 시대 임금의 식사와 대궐 안의 식사에 관한 모든 일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로 음식 재료의 조달, 음식을 조리하는 수라간은 물론 식기를 생산하던 분원도 사옹원 소속이었다.
  9. 조선 시대 국가에 필요한 관어용(官御用) 도자기의 조달은 15세기 전반 전국의 자기소(磁器所, 139개소)·도기소(陶器所, 185개소)에서 토산 공물로서 세공(歲貢)·별공(別貢)의 방법으로 충당하였는데, 15세기 후반경부터는 도자기의 제작을 국가가 직접 담당하여 사옹원의 분원을 상품자기(上品磁器)의 토산 공물 산지인 경기도 광주에 설치하고 국가가 직접 충당하였다.
  10. 나라에서 엄격히 관리하던 관요와 달리 민간에서 사사로이 도자기를 굽던 가마, 또는 거기서 만든 도자기
  11. 허보윤, 「권순형과 한국도예」, 미진사, 2009, p35~36
  12. 일본은 전쟁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각 가정에서 소유한 거의 모든 유기, 쇠붙이를 수탈했다.
  13. 황종구(黃鍾九, 1919~2003)는 도예가이자 교육자로 1941년 일본 세토요업학교 별과를 수학하고 부친 별세(1950) 이후 고려청자연구소를 운영하였다. 1947년부터 개성공립고등학교 요업과 교수로,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 생활미술과 교수이자 도예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였다.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을 4회 수상하였으며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1966), 광복 25주년 대통령상(1970), 대한민국 교육공로상 국민훈장 목련장(1984), 옥관문화훈장(1996) 등을 수훈하였다.
  14. 스탠리 피스틱(Stanley Fistic)은 한국공예시범소(Korea Handy Craft Design Center)의 운영을 위해 미국에서 파견된 도예가이자 디자이너이다.
  15. 원대정(元大正, 1920~2007)은 도예가이자 교육자로 홍익대학교 미술학부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던 중 한국수공예시범소 스탠리 피스틱의 보조연구원으로 일하면서 도자기를 처음 접한 이후 도예로 전환했다. 홍익대학교 미술학부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학생들을 지도하다가 1967년 홍익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다. 국전 입선(1964), 특선(1966), 문공부장관상(1972), 대통령상(1975) 등을 수상했다.
  16. 김익영(金益寧, 1935~)은 도예가이자 교육자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알프레드 대학원에서 도자를 연구했다. 돌아와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과에서 학예연구관으로 근무하였고 1975년부터 2000년까지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공예미술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17. 김석환(金石煥, 1932~2012)은 도예가이자 교육자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공예과와 동 대학원을 마치고 1971년부터 1999년까지 단국대학교 인문대학 도예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18. 정담순(鄭潭淳, 1934~)은 도예가이자 교육자로 홍익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마치고 1963년부터 홍익전문학교 교수로 12년간 재직하였으며, 이후 1975년부터 1982년까지 단국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19. 경기도 이천시 신둔면 수광리에 있는 가마로 1949년 초축된 칠기가마를 1962년 개축한 것이다. 근대식 축요기술이 도입되어 한국화된 현대 장작가마의 초기 양식을 보여주기에 2016년 국가등록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었다.
  20. 구리에 아연, 니켈을 첨가한 합금으로 은백색을 띈다.
  21. 멜라민과 포름알데히드의 가열축합반응에 의해 얻어지는 합성수지. 열경화성 수지로 내열성, 특히 내자비성이 있어 식기, 잡화, 전기 기기 등의 성형재료로 쓰이는데, 비교적 안전하고 착색이 자유로워 식기로도 폭넓게 사용되었다. 하지만 고온, 고주파, 산성, 자외선에 의해 1급 발암물질인 포름알데히드가 검출될 수 있기에 점차 쓰이지 않고 있다.
  22. 금속 표면에 유리질을 피복 시켜 금속의 강인함과 유리의 내식성, 청결성을 겸비하도록 만들어진 것으로 표면의 유리질이 떨어져 나가면 그 부분의 금속이 부식되기 시작하기에 취급에 주의가 필요하다.
  23. 일본에서 만든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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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