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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 행적별 여주의 과거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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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봄, 여주 호전(戶錢) 중 의병 늑봉조(勒捧條)
1896년 봄, 여주 호전(戶錢) 중 의병 늑봉조(勒捧條)
표 14. 여주 우거 기묘사화 피화 인물 면명 원동리수 늑봉동리수 호전 늑봉 금액 주내면 13 12 268량 4전 근동면 14 3 87량 8전 점량면 22 15 326량 7전 9푼 근남면 11 9 166량 5전 8푼 소개면 13 12 146량 5전 8푼 가서면 13 9 153량 9전 5푼 수계면 12 7 125량 9전 5푼 길천면 18 16 408량 5전 흥곡면 14 9 173량 1전 금사면 21 16 435량 1전 개군산면 17 14 465량 6전 5푼 대송면 29 9 283량 1전 5푼 등신면 15 10 367량 5푼 북면 15 13 468량 7전 5푼 합게 227 154 3,885량 4전 5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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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4. 여주 우거 기묘사화 피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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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역사왜곡
명성황후 역사왜곡
명성황후 역사왜곡
명성황후 역사왜곡
진행자: 우리는 흔히 명성황후가 몇몇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된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사실 낭인이라고 하면 마구 칼을 휘두르는 폭력배를 연상하지만 낭인은 단순한 칼잡이는 아닙니다. 일본에선 극우적인 성향을 가진 대륙진출론자들를 말하는데요. 이는 명성황후시해범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확인할수가 있습니다. 정규군인에서부터 공관원, 그리고 직업언론인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모두 일본의 조선침략과정에 깊숙히 관여했던 인물들입니다. 당시 조선공사였던 미우라구로는 일본왕실의 고문관으로 만년까지 일본정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습니다. 후루구치 구마에치는 동경대를 졸업하고 외교관으로 브라질공사를 역임했고 한성신보의 사장이였던 아다치겐조 한 일본정당의 총재까지 지냅니다. 시바시로는 하바드대를 졸업하고 일본 최고의 지성인으로서 그 이후에 국회의원에 무려 7번이나 당선이 됩니다. 사건당시의 육군중좌였던 구수노세사치이코는 이후에 육군대체로 활동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있는 이 인물, 시해당시에 일본군민신문 특파원이였던 기구치겐좁니다. 기구치겐조는 다른 시해범들이 재판이 끝난 이후에 영웅대접을 받으면서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는 동안 해방직전까지 줄곧 조선에 머물러 있습니다. 무엇이 그를 조선에 남아있게 했던걸까요? 나레이션: 명성황후의 명예가 회복하지 못한데는 기구치겐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막:도쿠도미소호이기념관-일본가나가와현 나레이션: 기쿠치겐조의 흔적은 당시 그가 일했던 군민신보의 창간자인 도쿠도미소호이기념관에 남아있다. 당시 군민신보는 일본이 대룩진출을 시도했던 극우신문으로 기쿠치는 창간자인 도쿠도미소호이와 오랬동안 교류했다. 기념관에 남아있는 기쿠치의 여러장의 편지는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기념관에 보관하고 있는 명함 한장, 일제시대 기쿠치겐조의 명함이였다. 당시 그의 직업은 이왕직편찬위원, 신문기자였던 기쿠치는 이후 조선왕조를 관리하던 이왕직에서 편찬위원이였으며 이때 그는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펴내는 작업에 참여한다. 자막: 일본국회도서관 나레이션: 기쿠치겐조의 변신은 또다른 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의 국회도서관, 기쿠치겐조의 이름을 입력하자 그가 저술한 책들이 일제히 검색됐다. 보관되어 있는 기쿠치겐조의 책은 무려 일곱권, 조선왕국, 근대조선사, 대원군전등 모두 조선관련 역사책들이였다. 자막: 기쿠치겐조가 서술한 조선관련 책들 나레이션: 지은이를 알지못하면 모두 조선사람이 써야만 알맞은 책들이였다. 기쿠치겐조에게 조선은 어떠 곳이였을까? 자막: 구마모토성 - 일본 구마모토현 나레이션: 조선에 대한 기쿠치의 생각은 고향 구마모토에서 찾아진다. 구마모토는 대륙과 인접한 지리적 특성으로 정한론이 대두되었던 지역이며 명성황후의 시해자들의 절반 가까이가 이 곳 출신자들이다. 자막: 세이세이고등학교 - 구마모토현 나레이션: 조선을 비롯한 대륙진출을 목적으로 조선어교육을 최초로 실시한 곳이기도 했다. 기쿠치에게 조선은 대륙침략의 대상이였고 조선의 식민지화는 일본국을 위해서 당연한 일이였다. 자막: 박종근 교수 - 구마모토대학 제일사학자 (박종근교수 일본어로말함) 자막: (기쿠치겐조는 도쿠도미 소호이의 지시에 의해 두 가지 임무를 띄고 조선에 파견됩니다.) 하나는 신문기자로서 변화하는 조선의 상황을 보도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일본의 입장에서 정치적인 활동을 하는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기쿠치 겐조는 당시 기사를 일본에 송고하는 동시에 조선의 정치에 관계했습니다. 이 두가지 임무를 수행하는데에는 일본의 국익, 즉 국가를 위해서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습니다. 자막: 청일전쟁 종군기자 시절 나레이션: 기쿠치겐조는 기자라는 신분을 이용해 조선의 정치적 상황에 적극 개입한다. 청일전쟁에서는 종군기자로,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을때도 현장을 찾아다니며 조선의 상황을 면밀히 체크하고 자료를 수집한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개입한 결과 기쿠치겐조는 일본의 대륙진출의 정책에 대한 자신의 정변을 확립한다. 도쿠도미소호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기쿠치는 자막: 우선 조선으 정치적 운영보다 사업상 사회상의 기초를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 - 기쿠치겐조가 도쿠도미 소호이에게 보낸 편지 나레이션: 조선에서 사회상 사업상의 기초를 만들어내는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총칼을 통한 지배가 아니다. 교육, 출판, 언론을 통한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였다. 자막: 박종근 교수 - 구마모토대학 제일사학자 (박종근교수 일본어로말함) 자막: 기쿠치겐조는 이토 히로부미를 동견에서 만났는데 이토 히로부미는 (기쿠치겐조에게)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조선역사에 대한 자료가 필요하니까, 그런 자료를 수집해 관리하자는 제안을 합니다. 기쿠치겐조의 입장에선 일본의 원로(이토 히로부미)로 부터 직접 제안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비록 역사를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수집한 조선관련 자료와 조선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쿠치겐조는 여러 권의 역사책을 씁니다. 자막: [근대 조선사 上.下](1937~1939) 나레이션: 기쿠치겐조는 꾸준한 저술작업 끝에 조선근대를 총괄한 근대 조선사 상.하권을 선 보인다. 기쿠치겐조는 조선역사 전체를 당쟁과 내분의 역사로, 특히 조선의 근대는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암투가 빚은 비극으로 서술하고 있다. 자막: [대원군전 附 왕비의 일생](1923) 나레이션: 대원군의 일생을 평가한 대원군전, 왕비의 일생이란 부제가 달린 이 책에서 기쿠치겐조느 명성황후를 가혹하리 만큼 평가절하하고 있다. 자막: 그녀의 일생은 비밀 속에 죄악으로 이루어졌으며 이왕조의 최후를 대표하고, 이씨 왕조의 멸망을 만들어 낸 것이 그녀이다. 나레이션: 명성황후의 일생은 비밀과 죄악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로인해 결국 이씨왕조가 멸망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교모하게 명성황후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자막: 신국주 명예교수 -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신국주명예교수: 일제 통치하에는 일본외교비밀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특히 우리나라 한국근대사에 대해서는 일체 공부도 못하고 연구도 못하고 한국인은 거기에 접할 수 없게 만들고 일본역사를 가지고 대체 했습니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고 보니까 일본 어용학자에 저술된 우리나라 근대사밖에는 쓸 수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더우기 우리는 근대사의 자료를 일본인이 전부 몰수해갔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민족발전에 진정한 우리 근대사를 우리가 서술 못한 그러한 실정에 있었던 것입니다. 나레이션: 명성황후에 대한 왜곡은 기쿠치를 비롯한 다른 일본인들에 의해서도 자행된다. 기쿠치를 스승으로 모셨던 작가 호소이 하지매도 그 중 한명이다. 자막: 기쿠치겐조 교열 - 호소이하지매 저 자막: 대원군과 민비의 음모술수, 골육상쟁, 독살, 참살, 형살 등 온갖 참극을 살피건대 민비는 여왕이 되자 시아버지인 대원군을 국외로 추방하고... 정치는 복수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 [여와민비] 호소이하지매 著 나레이션: 호소이 하지매는 조선의 식민주의 사관에 소설적 상상력을 덧붙여 조선의 근대를 궁중에서 벌어진 추악한 역사의 대립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자막: 관동지진 이후 일본과 중국, 조선각지를 순회하면서 약 300여회에 걸쳐 조선의 실정에 대해 강연했다. - [여와민비] 호소이하지매 著 나레이션: 심지어 자신의 글을 신문에 연재하고 일본과 조선각지를 돌며 대규모 강연을 하기도 했다. 궁중의 일을 알 수 없던 시대, 대중을 향한 호소이 하지매의 강연은 조선사람에게도 그대로 받아들여진다. 이들에 의해 왜곡된 역사와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자막: 고종이 이미 장성하여 섭정이 필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민씨는 대원군을 배척하고 민씨 일족을 조종에 대립하여 정권을 좌우하였다. <국사대요> 1949년 나레이션: 해방이된 후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1940년대말에 발간된 우리 역사서에는 대원군을 배척하고 정권을 휘드른 왕비라는평가가 발견대고 있다. 이런 평가는 후대에까지 이어진다. 자막: 대원군이 물러가니 대왕은 암약한 중에 민후는 권변이 많은지라 그럼으로 정권은 그만 민후에게 들어갔다. ...대원군은 그를 심히 분히 여기니라. <대한역사> 1960년 나레이션: 1960년에 출간된 역사서에서는 명성황후를 권변이 많은, 즉 임기응변에 능한것으로 서술되고 있다. 조선의 근대를 대원군과 민비의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서술한 일본의 식민사관이 그대로 답습되어 온 것이다. 두 권에의해 악의적으로 왜곡된 명성황후, 거기에는 일본의 숨은 의도가 있었다. 여자가 나서서 조선을 망하게 했으니 죽어 마땅하다는 인식을 조장해 자신들이 저지른 국모살해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철저히 부정하고자 했던것이다. 진행자: 이 곳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명성황후는 16살에 고종비정비로 간택됩니다. 그리고 마흔넷의 나이로 일본에 의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습니다. 외국인이 다른나라의 왕실을 침입해서 그 나라 왕비를 죽이는일은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일입니다. 명성황후가 왕비였던 때는 한국역사상 국내외적으로 최대의 격변기였습니다. 근대화의 추진과 외세침략의 견제라는 이중적인 부담을 안고 명성황후는 고종을 보좌해서 왕권을 강화시키는일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명성황후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명성황후를 시해한 그 이분들이 남겨놓은 기록에 근거해서 부정적인 평가만을 해왔던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명성황후를 역사의 전면에 드러내서 잃어버린 얼굴을 되찾아 주는 것은 일제에 의해서 왜곡되고 감추어진 역사를 되살리는 일입니다.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관을 세워서 명성황후를 기념해야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것입니다. 자막: 명성황후 생가 -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
명성황후 시해사건
명성황후 시해사건
명성황후 시해사건
명성황후 시해사건
진행자: 명성황후가 활동할 당시의 조선은 세계나라의 열강들이 자기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각축을 벌이고 있던 지역이였습니다. 그중에서 특히 조선을 둘러싼 세 나라, 청나라, 러시아, 일본은 조선내부에서 정치적인 주도권을 잡기위해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이토우히로부미가 총리로 있던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 1년전인 1894년 내각회의에서 조선내정결의안을 결의합니다. 조선의 개화를 돕는다는 명분하에 일본이 지배하기 쉽도록 일본의 제도를 미리 조선에 심어놓겠다는 심산이었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계획했던데로 조선의 각종 제도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고치기 시작했습니다. 위기를 맞은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한번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바로 삼국간섭인데요, 일본의 세력확장에 위협을 느낀 러시아가 독일, 프랑스와 손을 잡고 일본에게 외교적인 압박을 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국제정세를 파악한 명성황후는 일본을 대항할 정치 파트너로 러시아를 선택합니다. 지금 여기 보시는 것은 1895년 9월에 조선왕실에서 발행한 관봅니다. 자막: 칙령제 1호 진행자: 여기보십시요. 칙령번호 제1호 실내각에서 공포한 칙령이 이미 100호를 넘어선 상황에서 새삼 제1호 칙령을 내린것입니다. 그동안 일본이 추진한 내정개혁을 완전히 무시하고 새로 시작한다는 상징적인 초지라고 할 수있습니다. 실제로 고종과 명성황후는 일본이 주춤하는 사이 내각을 반일성향의인사들로 재구성하고 일본 고문관들을 서구인들로 교체합니다. 명성황후를 필두로 한 조선의 기밀한 대응에 일본은 당황합니다. 자막: 그렇다면 이에 대처할 방도는 과연 무엇이겠는가? 대표적인 인물 민후를 제거하여 러시아로 하여금 그 결탁할 당사자를 상실케 하는 이외에는 다른 양책이 없다는 것이다. [민비시해기] 고바야가와(한성신보 편집장) 나레이션: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를 제거하는것 이외에는 다른방법이 없었던 일본에의해 명성황후는 살해된다. 이른 새벽, 광화문방향의 총성은 경복궁의 정적을 깬다. 그리고 경복궁 북쪽의 추성문에 사오십명의 일본군이 담을 넘고 있었다. 목적지는 국왕부부의 처소인 건청궁이었다. 자막: 일본군의 경북궁 침입도1 (주조선 영국 영사관 보고서에 수록) 나레이션: 그날 일본에 의해 국모가 살해되던 비극의 현장은 영국공사 실리어가 그린 도면에도 나와있다. 경북궁에서 생활하던 미국인 군사교관 다이와 궁권의 토목기사였던 러시아인 사바틴, 그리고 순종과 부인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본국에 보고하기 위해 그린것이였다. 실리어가 남긴 두번째 그림을 살펴보면, 자막: 일본군의 경북궁 침입도2 나레이션: 이 사건이 얼마나 조직적이고 치밀했는지를 알 수 있다. 궁궐에 침입한 일본인들은 민첩하게 움직여 건청궁내에 있는 명성황후의 처소, 옥호루를 점령한다. 옥호루 앞마당에는 일본군장교와 사복차림의 일본군들이 조선군복장의 사람들을 포위한채 서 있었고 건청궁으로 통하는 세 개의 문은 일본군 보초병에 의해 차단됐다. 손으로 그려진 실리어의 도면을 바탕으로 당시의 경복궁 상황을 복원했다. 광화문에서 소란을 일으켜 관심을 돌린 일본인들은 경복궁의 국정문을 통해 궁궐의 담을 넘는다. 손쉽게 궁궐에 침입한 일본인들은 곧바로 건청궁을 향했고 명성황후의 처소인 옥호루를 포위했던 것이다. 옥호루의 비극은 그렇게 시작됐다. 스물다섯명가량의 무장한 일본인들은 방안팎을 뛰어다니며 궁녀들을 마루아래로 내던지며 발로 걷어찼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 명성황후를 찾아내 살해하는 것이였다. 궁녀들사이에 섞여 명성황후를 쉽게 찾지 못하자 일본인들은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고 결국 명성황후는 구두발로 가슴을 짓밟힌 채 한 일본인의 칼에 찔렸다. 그날 명성황후는 세 명의 궁녀와 함께 처참히 살해됐다. 명성황후의 시신은 인근 숲으로 옮겨져 살해범들에 의해 불에 태워졌고 재는 땅에 묻혔으며 자막: 향원정 - 경복궁 내 나레이션: 남은 잔해는 향원정 물속에 버려졌다. 자막: [대한제국의 비극] (프레드릭 A. 멕켄지 著) 나레이션: 사건직후 일본은 범행사실을 숨기기위해 언론을 통제한다. 자막: Coloned Cockerill, the famous correspondent of the New York Herald was in Seoul at the time, and at once cabled to his paper, but his message was stopped and the money returned to him 사건 당시 서울에 있던 뉴옥헤럴드의 특파원 커넬코커릴이 사건 직후기사를 타전하려 했으나 기사전송은 거부되고 송신료는 반환되었다. 나레이션: 뉴욕헬럴드의 특파원 커넬코커릴은 기에 기사를 본국에 보내려 했으나 전신국에 압력을 가한 일본의 방해로 성사되지 못했다. 시해직후 일본정부가 개입되 있을것이라는 추측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자막: Meanwhile there is no suspicion that the Japanese Government is in the least degree implicated inthe outrage 그때까지 일본정부가 이 사건에 어느 정도 개입되어 있다는 혐의는 받지 않았다. - 노스차이나 헤럴드(1895. 10. 21) 나레이션: 그러나 사건의 진상은 서양의 외교관들에 의해 서서히 밝혀졌다. 사건당일 미국외교관 알렌을 비롯한 각국 공사들은 일본공사관을 찾아가 미우라에게 일본인들의 개입을 추궁했다. 그러나 일본공사 미우라는 그런 불법은 일본군인의 명예를 걸고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라고 범행을 부인했다. 자막: 이민원 - 국사편찬위원회 이민원: 그날 오전에 미우라 공사는 이 사건에 일본군민은 한 사란도 개입한 사실이 없다.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추궁하고 심문을 한 셈이지요. 그 다음에 열국 외교관들은 이후 그들이 입수하게되는 정보들을 바탕으로 본국 정부에 이사건의 내막을 속속 보고하게 됩니다. 바로 이와같은 서양 외교관들의 역할이 일본정부에게 커다란 압력으로 작용했고 일본정부가 크게 부담을 느낄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나레이션: 사건을 밝히려는 외국공사관들에게 위협을 느낀 일본은 재판을 하겠다는 명분으로 사건혐의자들을 본국으로 송환한다. 사건이 일어난지 16지난 1895년 10월 24일 미우라를 비록한 마흔여덟명의 사건혐의자들은 히로시마의 우지마항에 도착합니다. 자막: 히로시마항 나레이션: 그러나 히로시마 재판소는 자막: 히로시마 공소원(재판소) 나레이션: 1896년 1월 20일 모든 상황을 무시한 의외의 판결을 내렸다. 증거불충분으로 사건혐의자 마흔여덟명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자막: 형사소송법 제 165조에 따라 피고인 모두를 면소하고, 미우라 고로우, 오카모토 류노스케, 아다치 겐조, ...등은 각각 방면한다. 나레이션: 이것은 일본인 그 누구도 이사건에 개입하지 않았다는것을 공식적으로 대외에 선포한것이다. 자막: 일본도쿄 나레이션: 그러나 일본은 재판에서 무죄를 판결했지만 이미 범행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를 남겼다. 자막: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나레이션: 일본 외무성 자료가 보관되어 있는 외교 사료관, 일본방위청의 문서자료가 공개되면서 자막: 한국왕비살해일건 나레이션: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의 자료가 함께 공개되었다. 이 자료속에서 당시 조선에서 사건을 조사한 우치다 일본영사가 히로시마 재판소에 부시노 부장검사에게 보낸 사건 보고서가 발견되었다. 이보고서에는 우치다 영사가 범인 명단과 증거품을 확보했으며 그것을 본 국에 보고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있다. 자막: 다카하시, 삿사 등이 살인 또는 물품 탈취한 사건에 대해서는 증인이 있다. - 우치다 영사 보고 전문(1895. 11.6) 나레이션: 11월 6일 전문에서 우치다 영사는 다카하시, 삿사 등 구체적인 이름을 언급하며 궁궐에서의 살인과 물품약탈에 대한 증거를 확보했다고 밝히고 있으며 자막: 왕성 사변 시에 어떤 부인을 포착하고 다른 일본인이 칼로 이 부인을 살해할 때 - 우치다 영사 보고전문(1895.11.8) 나레이션: 11월 8일 전문에서는 일본인들에 의해 궁궐에서 살인이 자행됐음을 시인하고 있다. 그러나 우치다 영사의 사실보고는 일본정부에 의해 외부유출이 철저히 통제되고 있다. 자막: 최문형 명예교수 - 한성대 사학과 최문형 명예교수: 그러니까 사건의 진상은 이런겁니다. 일본인이 개입되었다는 것도 은근히 비치고 (우치다 영사는) 말조심하라고 일본 정부로부터 경고를 받아요. 언론인을 매수하고 특파원을 매수하고 갖은 외교채널을 다 동원하고 여기에 개입된 사람들 함구하고 증거를 왜곡하고 모든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서 말하자면 부정한 겁니다. 일본정부가 개입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자막: 주조선 미국대리공사 알렌의 보고서(1895.10.10) 자막: Icannot belive that count Inouye was simply acting a force during his last two months here, on that these terrible acts was planned by viscount Miura. 나는 지난 두 달동안 이노우에가 여기에서 단지 사소한 일만 하고 있었다고 보지 않으며 이런 가공할 일이 미우라에 의해 계획된 것이라고 믿을 수 없다. 나레이션: 그러나 미국공사관에 있던 알렌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일본정부가 어떤형태로든 개입돼 잇다고 본국에 보고하고 있다. 이보고선 사건의 주모자로 미우라공사 이전에 조선공사를 했던 이노우에가오로를 지목하고 있다. 자막: 이토오 히보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영구 유학시절) 나레이션: 이노우에가오루는 어떤 인물인가? 이노우에는 당시 이토오 히로부미와 함께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일본을 움지이던 대표적인 인물로 천황에게 수상을 천거할 수있는 일곱명의 원로중에 한 사람이였다. 자막: 이노우에 가오루(외무대신 시절) 나레이션:이토오가 일본을 통치했다면 이노우에는 강화도조약부터 시작해 조선진출을 시도하던 인물이였다. 이런 이노우에가 자신의 후임으로 추천한 인물이 바로 미우라 고로우다. 당시 퇴역군인이였던 미우라는 고향에 머물던 인물로 외교관으로는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노우에는 미우라가 조선에 부임하고 나서도 20여일간을 함께 조선에 머문다. 외교상 관례가 없는일이였다. 그리고 이노우에가 조선을 떠난지 17일만에 시해사건이 일어났다. 자막: [세외정상공전](이노우에 가오루 전기) 나레이션: 이노우에의 전기에는 이 두인물이 시해사건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공사발령이 있기 몇일전 이노우에는 미우라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자막: (지금에 와서)자신의 결심을 바꾸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나레이션: 둘 사이에는 모종의 약속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자막: Count Inouye having made a complete mess of thing at Suoul, and given Corea up, Genetal Miura had been sent with the intention of making him the scapegoat. 서울의 사태는 이노우에가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미우라는 희생양이 되고자 조선에 파견된 것이다. - 노스차이나 헤럴드(1895.10.25) 나레이션: 당시 노스차이나 헤럴드 신문에는 이노우에가 주모자로 미우라는 하수인으로 보고 있었으며 이것으 미우라 개인이 아닌 일본의 최고 정치권력가가 범행의 주모자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것이다. 자막: 최문형 명예교수 - 한성대 사학과 최문형 명예교수: 이노우에가 관여했다. 즉 이노우에가 민비 시해사건을 주모했다는 사실이 일본의 국가적 범죄입니다. 왜냐하면 이노우에의 캐리어가 그랬고 이노우에가 조선문제, 한국문제에 관한한 전결권을 가졌고 이노우에는 겐로고 그래서 그가 이노우에가 민비시해사건의 주모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시해를 하기 위한 세부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세부계획은 미우라에게 맡겼다 이 말입니다. 정책적인 결정은 이노우에가 하고 세부계획은 미우라에게 맡긴 겁니다. -
명성황후의 면모
명성황후의 면모
명성황후의 면모
명성황후의 면모
진행자: 명성황후가 살았던 19세기 말은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고 있던 시기로서 이미 많은 서양인들이 조선에 들어왔었습니다. 명성황후는 서양인들과 친밀하게 지내면서 서양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고 전해지는되요, 여의사인 언더우드 부인을 자신의 주치의를 둘 정도였습니다. 후일 언더우드 부인은 조선에서의 생활을 책으로 펴냈는데요. 명성황후와의 경험을 비교적 자세히 적고 있습니다. 언더우드 부인을 만나보지요. 진행자: 안녕하십니까? 언더우드부인: Hello! 진행자: 명성황후의 주치의로서 자주 대면할 기회가 있었을텐데 가까이서 뵜던 명성황후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언더우드 부인: 제가 황후를 처음 뵌것은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부임한 1888년 이었습니다. 이때 황후의 나이는 30대 중반으로 나이에 비해 훨씬 젊어보였죠. 대화할때 편안하고 소박한 모습이 너무 매력적이었습니다. 진행자: 궁궐을 벗어나기가 힘든게 왕비의 생활이잖아요. 그래서 주로 사람들을 통해서 정보를 얻어다고 하는데 두 분은 주로 어떤 대화를 나누었습니까? 언더우드 부인: 황후의 관심사는 다양했습니다. 제게 세계 여러나라의 역사와 풍습, 제도등을 물으셨는데 언젠가 크리스마스 전날에는 제게 크리스마스의 기원과 의미등에 대해 얘기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황후꼐서는 제 얘기를 주의깊게 들으셨고 때때로 저의 얘기를 잘 이해 못한 왕과 왕세자비꼐도 설명을 잘해 주셨습니다. 황후는 저의 조국 미국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질문을 하셨는데요. 다 들으신 후에는 조선도 미국처럼 힘이 있었으면 하듯 읊조리듯 하셨습니다. 진행자: 아, 정말 다방면에 관심이 많으셨네요. 그 중에서도 특별히 명성황후께서 관심을 두신 분야가 따로 있었습니까? 언더우드 부인: 서양인들을 통해 문물을 받아들이는것에 무척 적극적이셨습니다. 서양식 학교를 설립하시려고 제게 필요한 돈이 얼마인지 산술을 해달라는 부탁을 하셨고 조선에서 처음으로 여성을 교육하는 이화학당이 창립되자 현판을 하사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진행자: 아, 그렇다면 명성황후께서는 교육에도 대단한 관심이 많으셨군요. 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서양 문물에 대한 명성황후의 관심은 단순한 호기심에 그치는것이 아니라 이것을 조선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까지도 고심했음을 알수 있었습니다. 새롭게 발견하는 명성황후의 면모인데요, 그렇다면 명성황후는 또다른 어떤 모습을 갖고 있었을까요? 자막: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나레이션: 충남 아산에 있는 민속마을, 명성황후가 친 어머니처럼 따랐던 이모 이씨부인이 시집온 곳이다. 지난 81년 이곳 외암 이씨 가문에서 명성황후의 서찰집 한 권이 발견됐다. 자막: 이득선(60세) - 외암 이씨 후손 이득선: 할아버지께서 명성황후의 어찰이니까 귀하다고 생각하시고 이렇게 편집첩을 한장씩 한장씩 만들어 놓으셔서 이다음에 며느리가 됐던 뭐가 오던 궁체니까 이 궁체를 써서 글씨를 배우는 책첩으로 해도 좋고 나레이션: 황후가 궁궐에서 이모에게 보낸 편지였다. 자막: 명성황 서찰집 나레이션: 기름을 먹인 표지에 한지를 겹겹이 만들어 붙인 속지, 황후의 편지 답게 소중히 보관되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발견된 스물한통의 편지에는 아들 순종에 대한 어머니로서의 감정과 왕비로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잘 드러나 있어 황후의 개인적인 성품을 잘 알수 있게 해주었다. 특히 이모 이씨 부인에 대한 명성황후의 감정은 각별한것으로 자막: 나는 감기가 좀처럼 낫지 않아 괴롭습니다. 나레이션: 심신의 괴로움을 허물없이 털어놓을 정도였다. 두 사람의 이런 친밀한 관계로인해 황후는 때로 부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가까운 이모의 부탁이라해도 청탁에 대한 명성황후의 태도는 매우 단언했음을 알 수 있다. 자막: 김명수는 불쌍한 줄 모르지 않지만 가서 아홉 달이나 무엇을 하였단 말입니까. 어찌할수 없소이다. 자막: 박요순 명예교수 - 한남대 국문과 박요순명예교수: 청탁이 오고갔던것은 사실인데 근데 거기보면은 무조건이 아니고 시시비비를 가려서 청탁을 받아들인것을 볼 수있습니다. 거론된것을 보면 아무게를 어디에 보냈더니 치적이 뭐냐, 그것을 단단히 호통쳐서 나무한다든지 또 아무게아무게 추천을 했어도 그건 자격이 없다해서 거절한다든지 해서 아주 분명한 성격인 것이 거기에 드러나지요. 해서 거기에 보면 아주 칼날같고 정확한 성품인것을 우리가 볼 수있습니다. 나레이션: 명성황후는 외가쪽 사람들, 특히 민씨가문과 긴밀한 관계속에 왕비의 역할을 수행해 갔다. 실제로 1870년 말부터 1890년대까지 정계에 진출한 민씨는 약 50여명, 민씨 외척세력의 등용이라는 부정적 평가도 있지만 명성황후가 민씨를 등용해 고종 주변에 두게한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자막: 이배용 교수 - 이화여대 사학과 이배용교수: 명성황후의 친족세력들은 지금의 외척세력들과는 성격이 달랐습니다. 이를테면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나 대원군 섭정에서 보듯이 왕권을 압도한다든가 정권을 휘두르는 형태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데서 명성황후가 구심점이되서 그러면서 척족세력들과 함께 왕의 철저한 보좌 세력내지는 지지기반의 역할을 다해서 오히려 왕권을 강화했다고 볼 수있습니다. 자막: 윤치호 일기 나레이션: 왕권강화에 애썼던 황후의 모습은 미국공사의 통역관이었던 윤치호의 일기에도 잘 나타나 있다. 자막: 국왕 부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청국이 무리하게 우리나라를 압제한다면 미국과 미국공사가 있는 힘껏 도와 주겠느냐(1884년 3월 4일) 나레이션: 명성황후는 청나라세력을 견제하기위해 미국을 이용하려 했으며 자막: 개화기의 한미관계(헤링턴 著) 나레이션: 1895년 미국공사 알렌에게 운산금광채굴권을 양도한것도 미국이 청의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자막: With Her Majcsty interested, the contract was soon signed, delivered 왕비께서 관심을 가졌으므로 조약은 곧 서명되고 조약서는 넘겨졌다. 나레이션: 이런 황후의 모습을 외국인들은 이렇게 평가했다. 자막: 왕비는 일본인들을 반대하며 자기권력을 증가시켜 나갔다. 친구들에게는 친절하나 적에게는 타협을 모르는 분이었다. - 프레드릭 A. 멕켄지(런던 데일리매일신문 특파원) 나레이션: 영국의 신문기자 멕켄지는 친구들에게는 친절하나 적에게는 타협을 하지않는 의지의 여성으로 평가했고 자막: 개성이 강하고 굽힐 줄 모르는 의지의 여성이었으며 시대를 앞섰고 여성을 초월한 정치가였다. - 윌리암 F. 샌즈(주조선 미국 서기관) 나레이션: 미국의 외교관 샌즈는 당시의 여성상을 뛰어넘어 기대큰 성정을 가진 한명의 당당한 정치가로 황후를 평가했다. 자막: 왕비는 재능이 풍부한 분 같았다. 국왕에게 조언할 때의 왕비모습은 좀처럼 빈틈이 없어 보였다. - 미우라 고로우 (주조선 일본공사) 나레이션: 일본공사 미우라 역시 국왕에게 조언할때는 좀처럼 빈틈을 찾아볼수 가 없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종은 이렇게 정치일선에 나섰던 명성황후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자막: 주언집(고종의 글을 모아놓은 문집) 나레이션: 고종의 글을 모아놓은 주연집에서 그것을 알수 있다. 자막: 짐에게 힘든일이 있으면 반드시 앉아서 아침까지 기다렸으며 짐이 근심하고 경계하는 일이 있으면 대책을 세워 풀어주었다. 나레이션: 명성황후는 왕을 능가하려는 왕비가 아니었다. 고종은 황후를 신뢰하고 의지할 수있는 대상으로 여겼다. 자막: 심원한 생각으로 미래의 일을 잘 요량하는 황후의 식견은 고금에 따를 사람이 없다. 나레이션: 미래를 예측해 적당한 방안을 제시하는 황후와 같은 인물은 다시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할정도로 고종에게 있어 명성황후는 국난을 함께 극복하려는 동반자였던 것이다. 자막: 이배용 교수 - 이화여대 사학과 이배용교수: 명성황후 민비는 정지적 감각이 뛰어났던 아주 총명한 왕비였습니다. 여인으로서 미모로서 고종의 총애를 받기보다는 고종의 정치적인 반려자로서 또 왕의 정치보좌역할을 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근대화라는 그런 변화의 시대에 정확한 현실인식과 시대인식을 가지고 나름대로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그리고 능동적으로 개척했던 새로운 시대의 왕비상을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