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무
여주 출신으로 1919년 4월 3일 강두영·원필희·이원기·김학수 등과 함께 북내면 당우리의 독립만세 시위를 주동하였다. 당우리 공북학교에 800여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그는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시위군중을 인솔하여 오학리까지 행진하는 등 독립만세 시위를 주동하다가 체포되었다. 이해 7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위반혐의로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80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에 다시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