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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어필첩

□시 대 : 조선말기

□크 기 : 가로 29.5cm×세로 32cm

□내 용 :

명성황후가 친밀하게 지내던 외척 민영소에게 친필로 써서 보낸 한글 봉서(封書) 4점과 봉투 3점을 후손이 하나의 첩으로 엮은 것이다. 봉서 내용 중 왕과 세자의 근황을 언급할 때는 반드시 한 자 정도의 간격을 위로하여 존경을 표하였다. 종이는 모두 중국산 당지(唐紙)로 문양이 있는 것과 흰색 당지를 잘라 사용한 경우가 있다. 봉투를 접어 붙인 상하에는 “근봉(謹封)”이라는 황후의 봉인(封印)을 찍어 다른 사람이 뜯어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 봉서들은 1888~1895년 사이에 쓰여진 것들이다.

세부내용

(16-1) 첫 번째 봉서에는 민영소의 어머니와 그의 외아들 민충식(충경은 민충식의 어릴 때 이름)의 건강에 대한 염려와 인사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편지보고 든든하나 시종 더위 증세로 성치 아니할 너의 자친(慈親)께서도 불녕(不寧)이 지내신다니 염려(念慮) 측량(測量) 없고, 충경이도 시종 성치 아니 하니 하는 일 답답 염려다. 여기는 상후(上候) 문안(問安) 만안(萬安)하오시고, 동궁(東宮) 제절(諸節) 태평(泰平)하시니 축수(祝手)하며 나는 한 모양이나, 담현(痰眩)으로 괴롭다. 김오현이는 선산(善山)은 할 사람이 있으니 답답하다. 변중헌이는 할 사람이 있어서 못한다. 오늘 일기(日氣) 극열(極熱)이니 답답하고 괴롭다.”

(16-2) 두 번째 봉서의 내용 중 성기운은 1890년 9월 인천부사겸감리가 되어 각국과 교섭 및 통상업무 등을 담당하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1890년 4월 17일 대왕대비 조씨가 죽자 청의 조칙사(弔勅使)가 원세개(袁世凱)의 의도대로 인천을 통해 들어왔는데, 이 봉서는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편지보고 일간 잘 잔일 든든하며 여기는 상후(上候) 문안(問安) 만안(萬安)하오시고, 동궁(東宮) 제절(諸節) 태평(泰平)하시니 축수(祝手)하며 나는 한 가지다. 오늘 일기(日氣)도 한냉(寒冷)하.며, 성기운(成岐運)에게 일러 아뢰기를 그토록 하여 바치려 인천(仁川)으로 표달(表達)하러 갔으니, 오는 대로 밭칠 줄로 아뢰고 오늘은 밭치지 말라고 하였다. 오늘 성기운이가 지궐(指闕) 대령(待令) 중이니 지금 행지(行地)로 통지(通知)하여라. 잘못하면 낭패다. 지금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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