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 이성계의 사위가 서울에서 지방으로 내려오게 되었을 때 점동면 덕평리에 거주를 정했다. 덕평리에서 사방 10리를 부마의 영역으로 하기 위해 그 영역을 표시하는 뜻으로 세워둔 돌을 선돌(立石)이라 한다.
일설에 의하면 옛날에 어떤 임금이 사위(덕실 권씨)에게 땅을 주기 위해 강금산(剛金山)에 올라가 그곳에서 눈에 보이는 곳을 모두 부마의 땅으로 주겠다고 말하고 어디까지 보이냐고 물었더니 부마가 말하기를 남대문 문턱이 보일 듯 말 듯하다고 했다. 임금은 화가 났으나 사위를 벌할 수 없어 그곳 강금산(剛金山)으로부터 사방 십리까지를 부마의 땅으로 주었는데 그곳을 경계표시하기 위해 세워둔 돌이 선돌이라는 설이 있다.
이 선돌은 점동면 처리, 당진리(완쟁이), 덕평리(덕실), 가남읍 금당리 등 4곳에 같은 시기에 세워졌다고 하나 정확한 기록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