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는 매일 조회가 끝나면 이웃집으로 가 바둑을 두었다. 하루는 공이 평상복을 입고 이웃집에 갔는데 주인 영감이 나오지 않아 혼자 누각 위에 올라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어떤 녹사가 공을 모시러 왔다가 문지기 아이에게 공이 있는 곳을 묻자 “어르신께서는 나가셨는데 어디로 가신 줄은 모르겠어요” 하였다. 녹사는 새로 부임해 왔기에 공의 얼굴을 몰랐다. 녹사도 이웃집 누각에 올라 신을 벗고 문에다 다리를 올리고는 공에게 말했다.
“노인장은 누구시오?”
“이웃집 사람이오.”
“노인장 얼굴에는 주름살이 많은데 어찌 된 일이오? 실로 가죽을 꿰매어 쪼그려 뜨린 것이 아니오?”
“타고난 바탕이 그런 걸 어찌하겠소?”
“노인은 글을 아시오?”
“성명을 쓸 정도요.”
또 옆에 놓은 바둑판을 보고 녹사가 물었다.
“노인은 바둑을 둘 줄 아시오?”
“행마할 정도요.”
“그러면 한 판 두어보는 것이 어떻소?”
그리하여 드디어 바둑을 시작하여 마주앉게 되자 공이 말했다.
“어디서 온 손님입니까?”
“부원군을 모시러 왔소.”
“나는 부원군이 되지 못할까요?”
“암탉은 울지 못하는 법이요.”
그러던 중에 주인 영감이 나와서는 꿇어앉아 “영감님께서 여기 오래 계신 줄 몰랐습니다” 하며 사죄하였다. 이를 본 녹사가 경악하여 신을 집어 들고 도망치려 하자, 공이 “이 사람은 비록 새로 들어온 시골 사람이지만 의기가 빼어나서 만만한 사람이 아니야” 하고는 그 뒤로도 후하게 대접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