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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염 묘

□ 소재지 : 여주시 오학동
□ 시 대 : 조선

유염은 세종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 자는 여헌(汝獻)이며 호는 묵재(默齋)이다. 진산군(晋山君) 유인비(柳仁庇)의 증손이자 안간공(安簡公) 유혜손(柳惠孫)의 아들이다. 고려 공민왕 때 문과 급제하고, 우왕 때에 성균관대사성을 제수 받았다. 공양왕 즉위 후 이림(李琳)의 손녀사위라는 이유로 한때 유배되었다가 1391년(공양왕 3)에 사면되었다. 조선 개국 후 1402년(태종 2)에 전라도관찰출척사(全羅道觀察黜陟使)를 거쳐 1417년(태종 17)에 판한성부사를 지냈다. 이후 이조판서 등의 고위 관직을 지내면서도 청렴결백하여 청백리로 녹선되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정확한 생몰년은 미상이다.

묘는 오학동 진주유씨세장지의 가장 상단에 위치하며 전후분(前後墳)으로 구성되어 있다. 위쪽의 봉분 앞에 꺽쇠 형태의 호석을 설치하고 그 앞에 방부원수 양식의 묘표(총 높이 98)를 세웠다. 비신의 앞면에 큰 해서(楷書)로 “자헌대부(資憲大夫) 판한성시사(判漢城寺事) 문간공(文簡公)……정부인(貞夫人) 고성이씨(固城李氏)……”라 쓰여 있어 피장자의 신원을 파악할 수 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비신의 뒷면에는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재임인(再壬寅, 1722, 경종 2) 개립(改立)”이라고만 되어 있을 뿐 음기는 없다. 봉분의 우측에 최근 세워진 묘표를 통해서 유염의 봉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아래쪽 봉분의 우측에도 최근에 묘표를 세워 정부인의 봉분임을 확인할 수 있다. 각각의 봉분 앞에 상석, 고석, 향로석을 신설하였다. 옛 석물로는 부인 봉분의 좌우에 복두공복을 입고 서 있는 문인석(높이 141, 폭 55, 두께 36) 1쌍 뿐인데, 박락이 심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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