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재지 : 북내면 가정리
□ 시 대 : 조선
원중회(1713~1772)는 영조대의 무신으로 본관은 원주, 자는 여일(汝一)이다. 부사직 원한의 후손이자 첨지중추부사 원재의 증손이며 증사복시정 원진규의 아들인데, 동지중추부사 원명규에게 양자(養子)로 들어갔다. 1736년(영조 12) 정시무과(庭試武科)에 급제 후 관직에 나아가 여러 벼슬을 거쳐 삼도통제사에 이르렀다.
묘는 가정리 가정자마을의 좌측 구릉에 자리 잡고 있다. 묘역에는 혼유석(높이 15, 폭 99, 두께 44), 상석(높이 44, 폭 154, 두께 98), 향로석(높이 44, 폭 37.5, 두께 31), 망주석(높이 209, 폭 45, 두께 44), 석양(높이 62, 폭 41, 두께 128)의 옛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묘역 좌우의 석양은 몸체에 비해 목이 너무 길게 표현된 양식상의 특징이 있다. 그리고 뿔과 눈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었으나 입 부분은 훼손되어 시멘트로 보수해놓았다. 또한 향로석과 망주석은 모두 기능성만 강조하고 문양의 장식은 전혀 하지 않았는데 향로석의 윗면도 약간 훼손되어 시멘트로 보수한 실정이다. 한편 묘표와 상석각자(床石刻字)가 전혀 없어 피장자의 신원을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후손의 증언과 족보에 의해서 원중회의 묘소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