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조대의 효자로 여주 읍치(邑治)의 남쪽 25리 지점에 살았다. 임진왜란 때 왜적과의 치열한 전투 중에 아버지가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몸을 던져 아버지를 구하려 하였으나 적병에 의해서 부자 모두가 참변을 당하였다. 사후 증직과 정려가 내렸으며 부자가 함께 『삼강행실록』에 등재되었다. 1899년에 편찬된 『여주읍지』에 의하면 묘는 읍치의 남쪽 30리 지점에 있었다고 한다.
□ 참고문헌 : 『여주읍지』(1899), 『경기도의 효 문화유산과 인물』(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