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의 비상 여주시 여주시사

여주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알려주세요.

우리 여주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을까요? 여주시 연양동에서 구석기시대의 각종 석기가 발굴되었는데, 그 시기가 약 BC 6만 5천년 정도라고 하니 굉장히 오래전부터 여주에서 사람들이 살았죠?

그리고 여주의 선사시대 특히 청동기시대 유적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점동면의 흔암리선사주거지예요.
이곳에서 출토된 불에 탄 쌀은 우리 여주가 청동기시대때 이미 벼농사를 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아주 중요한 유물이랍니다.
북방식 고인돌로 알려진 신접리 고인돌과 석우리 선돌 등은 여주의 청동기시대를 증명해주는 귀중한 유물입니다.

연양리 구석기유적 흔암리 출토 볍씨 신접리 고인돌 석우리 선돌

이후 삼국시대 때 우리 여주는 초기에는 백제 땅이었으나, 고구려의 세력이 커지면서 고구려 땅으로 편입되어 골내근현이라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서기 550년(신라 진흥왕 11년)에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넓히면서 신라 땅이 되었는데, 이때 황효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여주목의 옛 지도

그뒤 고려시대에 들어서 940년(고려 태조 23년)에 황려현이라고 했는데, 1018년(고려 현종 9년)에 강원도 원주에 소속되었다가 다시 경기도로 복귀되었고, 1305년(고려 충렬왕 31년)에 여흥군으로 승격되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1401년(조선 태종 1년)에 음죽현 북부를 편입하여 여흥부로 고쳤고, 1469년(조선 예종 1년)에 세종대왕릉을 현재의 능서면 왕대리로 옮기면서 천령현을 병합, 여주목으로 승격시키고 목사를 두었다고 합니다.

이후 큰 변화가 없다가 1914년 우리나라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경기 여주군이 되었고, 1개읍 9개면을 관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2013년 9월 23일에 드디어 여주시로 승격이 되었답니다.

우리 여주는 삼국시대에는 전략의 요충지로서 백제, 고구려, 신라가 끊임없이 이 땅을 서로 차치하고자 다투었답니다. 또 여주는 물길을 따라 교통이 발달하였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수운이 발달하여 각종 물산이 풍부한 고장이었답니다.

특히, 여주의 쌀은 맛이 좋기로 이름이나서 임금님께 올리는 진상품이었답니다.

또 자연경치가 아름답고 고달사, 신륵사 등 중요한 문화유적이 많아서 문인 학자들이 즐겨 찾는 고장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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