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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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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비(成宗妃) 윤씨는 질투가 심하여 왕비의 체모에 어긋난 행동을 많이 하였다는 이유로 1479년(성종 10)에 폐출되었다가 다음 해 사사(賜死)되었다. 성종의 엄명으로 감추어졌던 이 사건은 연산군 등극 후 폐비 윤씨의 생모 신씨(申氏)가 저 유명한 ‘금삼(錦衫)의 피’의 전말을 임사홍에게 전함으로써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임사홍의 본관은 풍천, 자는 이의(而毅), 초명은 사의(士毅)이고, 좌찬성 임원준(任元濬)의 아들이며 효령대군의 아들인 보성군(寶城君)의 사위이다. 그의 아들들도 왕실의 사위가 되는데 임광재(任光載)는 예종의 딸 현숙공주(顯肅公主)와 결혼하여 풍천위(豊川尉)가 되고 임숭재(任崇載)는 성종의 딸 휘숙옹주(徽淑翁主)에게 장가들어 풍원위(豊原尉)가 되었다. 임사홍은 1466년(세조 12)에 사재감사정(司宰監司正)으로서 춘시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였다. 그 뒤 홍문관교리·도승지·병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중국어에 능통하여 관압사·선위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승문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글씨는 촉체(蜀體)를 잘 썼고 특히 해서(楷書)에 뛰어났다. 임금과의 척분(戚分)을 이용해 권력 깊숙이 개입하였던 임사홍은 중종반정이 일어나던 날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愼守勤) 등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임사홍이 죽은 뒤 20여일 후에 새 임금 중종에게 의금부가 아뢰기를 “임사홍은 선왕조에서 붕당과 결탁하여 조정을 문란케 하였으되 오히려 관전(寬典)을 입어 처단을 모면하더니 폐왕조에 이르러서는 그 아들 임숭재를 연줄로 하여 나인 장녹수(張綠水)에게 빌붙어 온갖 꾀를 다 부리며 악한 일을 하도록 부추겼고, 충직한 사람들을 해치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며 임금을 불의에 빠뜨려 종사를 위태롭게 하였으니 그 죄는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적몰가산(籍沒家産)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중종이 박원종(朴元宗) 등 공신들에게 묻고 나서 전교하기를 “금부가 아뢴 대로 단죄하고 묘소의 석물(石物)도 철거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묘는 여주시 능현동에 있다.

□ 참고문헌 : 『성종실록』, 『연산군일기』, 『중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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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