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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직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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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즉위년인 1800년 8월 성(姓)과 이름 첫 글자의 음이 임금과 같으니 이성보(李城輔)란 이름을 고치게 해 달라고 상소하여 허락 받은 사람이 있었다. 그가 당시 대사헌이던 이직보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자는 유종(維宗)이며 호는 중주(中洲) 또는 돈암(遯庵)이다. 월사 이정구의 후손이며 이도신(李度臣)의 아들이다. 1784년(정조 8)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선공감역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이듬해 익위사부수가 되었다. 그후 공조참판·도승지·우참찬·대사헌·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이직보가 과거를 보지 않았던 사연이 대동기문(大東奇聞)에 실려 있다. “이직보가 젊어서 과거 공부에 힘쓰던 때였다. 그런데 매번 과거시험장에 가보면 요로의 인사에게 청탁하는 규격화된 서신, 즉 관절(關節)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이직보는 번번이 그 관절을 받지 않았다. 그러자 종형(從兄)인 판서 이익보(李益輔)가 그에게 관절을 받아 오도록 권하였으나 이직보는 그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지암(止庵) 김양행(金亮行)을 따라 여주에다가 살 곳을 정한 뒤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이익보는 이렇게 책망하였다. ‘선비가 과거공부를 하여 벼슬하기를 일삼지 않으면 자신을 내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관절을 하면서까지 벼슬길에 나가지는 않겠다는 소신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니 이는 그의 조용하고 욕심이 적었던 타고난 성격 때문이었다. 이직보의 종질(從姪) 이술원(李述源)은 늘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종숙은 바로 옛날에 이른바 속세를 떠나 은둔 생활하던 신선 같은 선비올시다’ 하였다.” 뒤늦게 벼슬길에 오른 이직보에 대한 정조의 기대는 남달랐다. 이직보는 두 번에 걸쳐 유선을 지내면서 세자 시절의 순조(純祖)와 뒤에 익종(翼宗)으로 추존된 효명(孝明)세자를 가르쳤다. 이직보는 경사에 박통(博通)하며 겸손하고 신중하여 평소에 선비들의 중망을 받았고 제자들을 가르칠 때에는 항상 『논어』와 『맹자』중에서 인용하기를 좋아하였으며 특히 재물에 관심이 없어 평생을 청렴하게 지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1899년에 편찬한 『여주읍지』의 은일편에 등재되어 있다.

□ 참고문헌 : 『정조실록』, 『순조실록』, 『대동기문(大東奇聞)』, 『여주읍지』(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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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