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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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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대의 문신이자 대학자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尤齋)이다. 봉사를 지낸 송구수(宋龜壽)의 증손이고 도사 송응기(宋應期)의 손자이며 사옹원봉사 송갑조(宋甲祚)의 아들이다.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 외가에서 태어나 26세까지 거주하였다. 그후 회덕(懷德)의 송촌(宋村) 등지로 옮겨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인(懷德人)으로 알려져 있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宋浚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12세 때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擊蒙要訣)』·『기묘록(己卯錄)』 등을 배우면서 주자(朱子)·이이·조광조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1625년(인조 3) 도사 이덕사(李德泗)의 딸인 한산 이씨(韓山 李氏)와 혼인하였다. 이 무렵부터 연산(連山)의 사계 김장생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의 사후에는 그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27세 때 생원시에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급제하였다. 이때부터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사부(師傅)로 임명되었다. 약 1년간의 사부 생활은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효종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淸)으로 끌려가자,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여 년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斥和派) 및 재야 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과 사헌부장령 등의 관직을 내리자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이때 왕에게 올린 「기축봉사(己丑封事)」는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장문으로 진술한 것인데, 그중에서 특히 존주대의(尊周大義)와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北伐) 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계획의 핵심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해 김자점(金自點) 일파가 청(淸)에 조선의 북벌 동향을 밀고하여 송시열을 포함한 산당(山黨) 일파가 모두 조정에서 물러났다. 그후 1653년(효종 4) 충주목사, 1654년 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655년 모친상을 당하여 10년 가까이 향리(鄕里)에서 은둔하였다. 1657년 상을 마치자 곧 세자시강원찬선(世子侍講院贊善)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대신에 「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려 시무책(時務策)을 건의하였다. 1658년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贊善)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해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계획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659년 5월 효종이 급서(急逝)한 후 조대비(趙大妃)의 복제(服制) 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고 국구(國舅)인 김우명(金佑明)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데다가 현종에 대한 실망으로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조정으로부터 융숭한 예우와 부단한 초빙이 있었으나 거의 관직을 단념하였다. 다만 1668년(현종 9) 우의정,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 시종 재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은거하여 있는 동안에도 선왕(先王)의 위광과 사림(士林)의 중망(重望)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사림의 여론은 그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 대신들은 매사를 그에게 물어 결정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孝宗妃)의 상(喪)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된 후 삭출(削黜)되었다. 1675년(숙종 1)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거제(巨濟) 등지로 이배되었다.

유배기간 중에도 남인들의 가중처벌 주장이 일어나 한때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정계에 복귀하였다. 그해 10월 영중추부사로 임명되었고 또 봉조하(奉朝賀)의 영예를 받았다. 1682년 김석주(金錫胄)·김익훈(金益勳) 등 훈척(勳戚)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임신삼고변(壬申三告變) 사건에서 김장생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다가 서인의 젊은 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또 제자 윤증(尹拯)과의 불화로 1683년 노소(老少) 분당(分黨)이 일어나게 되었다. 1689년 1월 숙의(淑儀) 장씨(張氏)가 왕자를 낳자 원자(元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는데, 이때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疏)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그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전라도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관작(官爵)이 회복되었다.

송시열은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문장은 웅장하면서도 유려하고 논리적이면서도 완곡한 면이 있었으며 강건하고 힘이 넘치는 문장으로 평판이 높았다. 특히 묘비문 작성에 뛰어나 평생 동안 수백 편을 지었다. 당시 노론에서는 송시열의 문장에 송준길의 글씨를 받아 묘비를 세우는 것이 크게 유행하였다. 양송(兩宋)은 선조들의 훌륭한 공업(功業)을 현창하는 작업에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인 유학자들이기도 하다. 서체는 처음에 안진경체(顔眞卿體)를 익히다가 뒤에 주자(朱子)를 모방하게 되어 정체(正體)를 잃었으나 매우 개성적인 경지에 이르러 창고(蒼古)하고 힘에 넘치는 것으로 평가 받았다.

수많은 저서를 모아 1717년(숙종 43) 왕명에 따라 교서관(校書館)에서 처음으로 편집하고 167권을 철활자로 간행하여 『우암집(尤菴集)』이라 하였다. 이후 1787년(정조 11) 다시 누락된 것들을 수집 보완하여 평양 감영(監營)에서 목판으로 215권 102책을 출간하고 『송자대전(宋子大全)』이라 명명하였다. 그리고 1785년(정조 9)에 영(英)·녕릉(寧陵)을 참배하러 여주에 행차한 정조가 송시열을 제향하기 위해, 수행한 김양행(金亮行)에게 대로사(大老祠)를 짓게 하고 곧바로 사액(賜額)을 내렸다. “대로사”라는 명칭은 정조가 친히 지은 것으로 ‘덕망이 높은 노인’이란 뜻이며, 『맹자(孟子)』에 그 용례가 보인다. 송시열은 살아생전 여주에 머물 때마다 대로사 자리에서 효종의 능인 녕릉을 바라보고 비통해하였으며 후진들에게는 북벌의 대의를 주장했다고 한다. 수원을 비롯한 정읍·충주 등지에 그를 제향 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시장(諡狀)없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또한 덕원·화양동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 서원이 설립되어 전국적으로 약 70여개에 이르렀는데 사액서원만 37개에 달하였다.

□ 참고문헌 : 『효종실록』, 『현종실록』, 『숙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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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