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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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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민왕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부(仲父), 호는 가정(稼亭)이고 이자성(李自成)의 아들이며 이색(李穡)의 아버지이다. 충청도 한산의 이름 없는 향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이곡은 13세에 부친을 여의고 고향을 떠나 유랑하다 영해(寧海, 지금의 경북 영덕군 영해면)에 정착하여 그 지방의 토호인 함창 김씨(咸昌 金氏) 김택(金澤)의 사위가 된다.

이곡은 1317년(충숙왕 4) 20세의 나이로 거자과(擧子科)에 급제하였고 3년 뒤 문과에 다시 급제하였으나 출신이 워낙 한미하여 크게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이곡은 원나라 과거를 통해 입신을 꿈꾸게 된다. 29세 때인 1326년 원나라에서 치르는 정동행성(征東行省) 향시(鄕試)에 3등으로 합격하고 1333년(충숙왕 복위 2) 원나라 전시(殿試)에서 당당히 갑과 2등으로 합격한다. 고려인으로서 이런 성적을 거둔 것은 이곡이 처음이었다. 고려로 돌아온 이곡은 정당문학(政堂文學, 종2품), 진현관(進賢館)대제학, 광정대부(匡靖大夫, 정2품), 도첨의(都僉議) 찬성사(贊成事) 등의 벼슬을 하였고 뒤에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이곡이 여주에서 귀양살이 할 때의 이야기다. 당시 원나라에서는 고려의 동녀들을 마구 징발하여 갔기에 고려인들로부터 원성이 높았었는데 이곡이 원나라 황제에게 고하여 동녀차출을 금지시켰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원나라 관리들이 고려에 압력을 넣었고 압력을 못이긴 이곡은 어쩔 수 없이 원주 지내촌(지금의 북내면 가정리)으로 귀양을 오게 되었던 것이다. 어느 여름 갑작스런 폭우에 금당천(金堂川)이 범람하였는데 이상하게도 금당천 한복판을 중심으로 여흥 쪽으로는 홍수가 넘쳐나고 강원도 쪽은 물이 얕아 낚시하기에 좋을 정도의 여울이 졌다고 한다. 이즈음 개성으로부터 하루를 사이에 두고 두 패의 군사들이 이곡을 찾아 여흥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먼저 내려온 군사들은 이곡을 억류하여 멀리 영해로 귀양지를 옮기게 하라는 명을 받고 오는 군사들이요, 뒤에 내려온 군사들은 귀양지를 옮기지 말고 석방하여 대궐로 모셔오라는 새로운 명을 받고 온 군사들이었다. 먼저 온 군사들은 홍수로 인해 금당천을 건너지 못하였고 하루 뒤에 도착한 군사들은 물이 빠진 금당천을 건너 이곡을 개성으로 모셔갔다는 이야기가 오늘에 전하고 있다. 이곡이 머물렀던 북내면 가정리(稼亭里)의 지명이 이곡의 호에서 유래된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저서로는 『가정집(稼亭集)』이 있고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 참고문헌 : 『고려사』, 『가정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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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