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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의 향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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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는 예로부터 어향(御鄕), 묵향(墨香), 문향(文鄕)의 고장으로 알려졌다. 여주의 향풍에 서는 바로 이러한 문제들을 논의해야 되는데, 그 논거를 제시하고 설명하기가 쉽지 않아 여주의 특색, 즉 지방색이나 향토색을 찾아보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을 하기 전에 먼저 여주의 역사적 배경을 알아보면 청동기시대 유적으로 1977년 서울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로 확인된 점동면 흔암리 집터와 반월형석도, 갈돌[碣石], 무문토기, 홍도(紅陶) 등을 들 수 있다. 또 기원전 10세기경에는 여주에도 쌀, 보리, 조, 수수 등의 곡물이 있었다고 하니 청동기시대 이미 이 지역에 농경문화가 발달되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그리고 삼한시대는 여주지방이 마한의 영역에 포함되었고, 신라·백제·고구려가 정립한 삼국시대에는 백제 영역에 소속되었다. 삼국시대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영토 분쟁이 극심했는데, 특히 5~6세기에는 한강유역을 놓고 한반도에서의 주도권 쟁탈전이 벌어졌다. 그만큼 이 지역은 예로부터 서로 뺏고 빼앗기는 군사적 요충지에 해당되었던 것이다. 여주지방은 온조왕 때부터 백제의 영토에 속했는데, 고구려가 남하하여 한강지역을 차지하게 됨에 따라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었고, 그 후 진흥왕 때는 신라가 한강을 점령하면서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여주는 신라 때에 한주(漢州) 기천군(沂川郡) 영현(領縣)으로 황효현(黃驍縣)이라 했는데, 고구려의 골내근현(骨乃斤縣)을 경덕왕 때 개칭한 것이라고 한다.1)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시대는 원주의 속현으로 이곳 여주를 황려현(黃驪縣)이라 했다. 그 후 1257년(고종 44)에는 영의(永義), 충렬왕 때는 여흥군(驪興郡), 우왕 때는 황려부(黃驪府)로 되었다가 공양왕 원년에는 여흥군으로 강등되었다. 이처럼 여흥군으로 강등된 여주는 조선시대 태종 원년에 다시 부(府)로 승격되고 태종 13년에는 도호부(都護府)로 명명되었다. 이때 여주도호부는 충청도에 배속되었다가 경기도로 이관되는 과정을 거친다. 예종 원년(1469) 광주에 있던 세종대왕의 능을 여주의 북성산으로 옮기게 되자 천령현(川寧縣)을 없애 이곳에 병합시키고 지금의 명칭인 여주(驪州)로 개칭된다.

여주의 지리적 배경은 경기도의 남동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강원도와 충청북도 등 두 도와 도계를 이룬다. 한강의 지류인 남한강이 여주를 북동지역과 남서지역으로 크게 가르면서 관통한다. 동쪽으로는 원주, 북쪽으로는 양평, 남쪽으로는 충주, 서쪽으로는 이천과 광주를 경계로 한다. 여주는 동으로 우리나라의 등줄기인 태백산맥이 완만한 경사를 지으며, 한강을 끝으로 그 모습이 서서히 멈춰지면서 평야와 맞닿는다. 또한 남쪽으로 차령산맥이 멀리 충청도에서 치어 올라와 강원도의 치악산을 거쳐 오대산에 이르러 태백산맥과 연결되면서 여주의 남쪽을 병풍처럼 막아준다. 가까이는 동북쪽에 용문산과 칠보산이 보이고, 말감산 너머 아득한 구름 아래 치악산이 둘러 있다. 원적산과 양자봉이 서북쪽으로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고 오감산과 강금산이 남쪽의 절경을 이룬다. 여기에 유유히 흐르는 여강과 드넓은 여주이천 평야가 펼쳐져서 ‘여주이천쌀’이라는 고급 품종의 경기미를 생산해 낸다. 자연환경이 수려하고 비옥한 농토에서 품질 좋은 쌀을 생산해내니, 사람 살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지닌 곳이란 평을 들어왔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지리적 조건을 지닌 여주의 특색을 들어보면 옛날에는 남한강의 수로를 이용한 강항(江港)으로서 상업과 수운업의 중심지였다. 임금을 위한 여주의 3대 진상품이었던 자채쌀과 도자기와 잉어는 물론 인근의 각종 물산들이 여강의 뱃길을 따라 서울로 운송되었다. 황포돛배는 분주히 마포 서강 행주나루를 오르내렸다. 정선, 평창, 단양, 충주 등지와의 교역도 활발했다. 물고기, 소금, 쌀, 비단, 기타 각종 잡화류가 배에 실려 거래되었다. 거창한 뗏목이 꼬리를 물었고, 나락을 실은 농구코트만한 배들이 수면 위를 떠다녔다. 그러나 이러한 수운 교통은 우리나라가 산업화, 정보화, 첨단 과학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옛말이 되고 말았다. 현재는 수로교통이 사라지고 육로교통이 사통오달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여주를 거치는 고속도로는 영동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 등이 있고, 그 외 국도가 사방으로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 서울은 물론 전국 어디를 가는데도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특히 강릉, 속초, 삼척 등 영동지방을 가려면 여주를 거쳐야 하니, 이곳을 우리나라 교통의 중심지라 표현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여주는 문화유산이 많은 역사의 고장이다. 특히 세종대왕과 소헌왕후를 합장한 영릉(英陵)이 있는 곳이다. 세종대왕 능은 처음에 광주에 있었는데, 1469년(예종 원년)에 현 능지로 이장한 것이다. 이 지대가 풍수지리상 좋다 하여 옮긴 것이지만, 세종대왕 능을 천장하였기 때문에 조선왕조가 백 년이 더 연장되었다는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설이 있다. 세종대왕은 조선 개국 후 고려 유신들의 반발로 흔들리는 정치 기반을 바로잡고 문물의 기틀을 정립함은 물론 밖으로 야인을 정벌하여 4군과 6진을 개척하였다. 학문을 숭상하여 많은 학자를 길러 훈민정음을 창제한 일은 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1975년에는 영릉 보수정화사업을 추진하였고, 1977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분부로 세종전을 새로 짓고 성역화 사업을 실시하였다. 성역화 이후 이곳은 국민 교육의 도장으로, 관광명소로서 매일 수천 명의 참배객들이 찾아와 세종대왕의 문화 창조 정신과 위업을 기린다.

북성산의 울창한 수림 속에는 세종대왕 능 외에 산등성 하나를 사이에 두고 효종대왕과 인선왕후의 쌍릉인 녕릉(寧陵)이 있다. 녕릉 역시 양주의 동구릉 서쪽에 있었던 것을 1673년(헌종 14)에 이곳으로 천장한 것이다. 효종은 병자호란 후 심양에 인질로 잡혀간 적이 있었고,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다음에는 북벌계획을 세워 군비를 정비하였다. 송시열·송준길 등을 등용하여 군정(軍政)에 힘썼으나 도중에 청의 힐문으로 일시 중지되었다. 그 후에도 북벌 준비를 계속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렇더라도 당시 북벌 주역들의 묘소나 사당이 여주에 모여 있는 점은 흥미로운 일이다. 녕릉 외에도 녕릉을 중심으로 북벌의 핵심 인물이었던 우암 송시열의 사당 대로사가 여주 내에 있고, 당시 영의정을 지낸 기천 홍명하의 묘소가 흥천면 문장리에 있으며, 당시 훈련대장이었던 이완대장의 묘소가 여주시 상거동에 위치해 있는 점이 여주와 북벌과의 관련성을 시사해 준다.

여주의 문화유산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 유명한 신륵사이다. 신륵사는 아름다운 경관과 많은 유물·유적들을 간직하고 있지만 이 절의 내력은 소상치 않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유물이나 유적은 없고, 1376년(고려 우왕 2)에 나옹선사가 입적하면서 유명한 절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대다수의 사찰들이 산속에 자리 잡고 있는 데 비하여, 이 신륵사만은 강가에 위치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산과 강이 한데 어우러진 절경 속에 자리해 있으니,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았다. 이곳에는 보물 제180호인 신륵사 조사당(祖師堂)과 다층전탑, 다층석탑, 보제존자석종, 보제존자석종비,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대장각기비 등 7점의 보물이 보관되어 있다.

명성황후생가는 여주시 능현동 능말 주택가에 있다. 조선 제26대 고종의 비인 민씨의 생가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1687년(숙종 13)에 숙종의 장인 민유중의 묘막으로 건립되었는데 당시 건물로 남아 있는 것은 안채뿐이다. 최근에는 1975년과 1976년에 안채가 중수되었고, 1996년에는 안채가 수리되고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복원되었다. 생가를 나와 왼쪽으로 가면 명성황후가 어렸을 때 열심히 글을 읽었다는 공부방이 있던 자리에 그녀의 탄생을 기념해 세운 비인 명성황후탄강구리비(明成皇后誕降舊里碑)가 자리 잡고 있다. 이 비의 앞면에는 “明成皇后誕降舊里”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광무팔년갑진오월 일배수음체경서(光武八年甲辰五月 日拜手飮涕敬書)”라고 새겨져 있다. 명성황후생가 앞에는 명성황후기념관이 있어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여인의 몸으로 열강들의 틈 속에서 쓰러져가는 나라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다 왜인에게 시해당한 황후의 자취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고달사지(高達寺址)는 북내면 상교리에 있는데, 일명 고달원지(高達院址)라고도 한다. 서기 764년(경덕왕 23)에 창건되었고, 고려시대는 역대 임금의 비호를 받던 사찰이다. 창건 당시의 사역은 광대하여 지금의 상교리 일대가 전부 사역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때 승려들의 조석공양에 쓰이는 쌀뜨물로 고달천 10리를 장식했다는 고달사는 규모나 남아 있는 유물로 보아 엄청난 사찰이었는데, 지금은 폐사가 되어 무성한 잡초 속에 찬바람만 흩날린다. 국보 제4호인 고달사지 승탑은 북내면 상교리 산중턱 무성한 수림 속에 감추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승탑으로서 탑 전체의 미려함과 세부조직이 섬세하여 우리나라 제일의 승탑으로 알려졌다. 이외에도 보물 제6·7·8호로 각각 지정되어 있는 원종대사탑비, 원종대사탑, 고달사지 석조대좌 등이 남아 있는데, 이들 석조유물들은 넘치는 힘과 호방한 기상을 나타낸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밖에도 보물 제91·92호로 지정된 여주 창리·하리의 삼층석탑, 금사면 이포리에서 한강을 따라가다 보면 대안동편(對岸東便)에 위치한 파사성지(婆娑城址), 여주시 하동에 자리한 강한사(대로사), 금사면 사무소 맞은편 300미터 거리에 있는 이포리의 기천서원, 삼신당, 점동면의 흔암리 선사유적, 강천면 소재의 목아박물관 등은 여주지역이 문화의 고장, 문화유산·유물의 보고임을 증명해 준다.

여주는 역대 임금의 왕비를 많이 배출한 지방이다. 왕비를 모두 8분 배출했는데, 시대 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순경왕후(順敬王后) 김씨는 고려 원종의 비로 1235년(고종 22) 원종이 태자에 책봉되자 태자비가 되어 경목현비(敬穆賢妃)에 봉해졌다. 1274년 충렬왕이 즉위한 다음에는 순경태후(順敬太后)에 추존되었다.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는 조선 태종의 비로 1392년(태조 1) 정령옹주(靖寧翁主)에 봉해지고, 1400년(정종 2) 방원이 세자에 책봉되자 태종의 즉위와 함께 정비(靖妃)에 진봉되었다. 소생은 세종과 함께 4대군과 4공주를 두었다.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는 조선 숙종의 계비이고,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딸이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났을 때 폐위 서인이 되었다가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복위되었다.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는 김한언(金漢焉)의 딸로 1745년(영조 21) 여주읍에서 출생하였다. 1759년 15세에 영조의 계비로 책봉되어 왕비로 17년, 대비로 23년 있었다. 순원왕후(順元王后) 김씨는 조선 순조의 비로 김조순(金祖淳)의 딸이다. 1802년(순조 2)에 왕비에 책봉되고, 1827년 명경(明敬)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1834년 헌종이 즉위한 다음에는 대왕대비가 되어 수렴청정을 하였다. 효현왕후(孝顯王后) 김씨는 영흥부원군 김조근(金祖根)의 딸이다. 1837년 9세에 헌종의 비로 책봉되고, 왕비로 9년을 지냈다. 추상존호는 단성(端聖), 경혜(敬惠), 정순(靖純), 효현(孝顯)이다. 철인왕후(哲仁王后) 김씨는 충순공 김문근(金汶根)의 딸이다. 1851년(철종 2) 15세에 철종 왕비로 책봉되었다. 추상존호는 명순(明純)이다.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는 영의정 민치록(閔致祿)의 외동딸이다. 1867년(고종 4) 16세 나이로 고종의 비가 되었다. 1895년 10월 8일 일본인 낭인들에 의하여 민비는 시해되었다. 1897년 대한제국이 되면서 명성황후로 추봉되었다.

여주는 쌀과 도자기의 산지로 유명하다. 조선조 초엽의 서거정은 『신찬동국여지승람』에서 여주벌을 두고 “강의 좌우로 펼쳐진 숲과 기름진 논밭이 멀리 몇 백리에 가득하여 벼가 잘 되고 기장과 수수가 잘 되며, 나무하고 풀 베는 데에 적당하고, 사냥하고 물고기 잡는 데에 알맞으며, 모든 것이 다 넉넉하다.”는 기술을 하였다. 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대동강변의 평양과 소양강 언저리의 춘천과 함께 여주 땅을 나라 안에서 가장 살기 좋은 강촌이라 하였다. 특히 “광주 분원사기 방아, 여주 이천 자채 방아”라는 민요의 가사가 전하는 여주는 자채쌀의 산지로 유명하다.2)  이 자채쌀은 밥을 지으면 윤기와 맛이 뛰어나 국내에서 최고의 품질로 쳤는데, 생산량이 적다는 이유로 5·16군사정변 이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여주에서 생산되는 쌀은 다른 지방에 비하여 벼알이 여무는 8~9월 날씨의 일교차가 섭씨 6.4도로 최고의 적온이라 밥맛이 좋다. 또 밥맛을 저해하는 아밀로스가 다른 쌀에 비하여 적게 함유되어 최고의 밥맛을 낸다. 이러한 이유로 여주 쌀은 예로부터 임금님께 진상했으며, 1998년에는 전국 농산물 품평회에서 영예의 대상을 받았다.

여주시 오학동·현암동 일대는 자기 공업이 주종을 이룬다. 한양요업, 동보공예사, 극동애자 등 대단위 공장 이외에 송학, 흥국도요, 서울요업, 예림도예 등 74개 업체가 있다. 이중에서 68개 업체가 고려청자, 이조백자 등 전통 민속도예에 종사하고, 6개 업체가 생활자기와 전기부품, 화분류 등을 생산한다.3) 여주는 옛날부터 자기공업이 발달하였는데, 이것은 여주시 현암동 싸리산 언저리를 중심으로 점토, 백토, 고령토 따위의 도자기 원료가 상당량 산출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료를 이용해서 그것들은 청자로 구워지고 백자로 변해지며 생활자기로 배출된다. 이처럼 여주는 도자문화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매년 4월 말경에 도예촌과 신륵사 관광지 일원에서 도자기 박람회가 열린다. 그 내용이 어떠한지는 「세계도자기 엑스포 2001 경기도」라는 제목의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한국 도자문화의 전통과 도예 혼이 살아 숨 쉬는 유서 깊은 도자벨트 경기도의 이천·여주·광주에서 2001년 8월 10일부터 10월 28일까지 엑스포가 개최됩니다. 흙으로 빚는 미래를 주제로 박물관 명품과 세기적 작가들의 걸작 1,000점 이상이 전시됩니다. 동북아 도자문화 르네상스를 선도할 제1회 세계도자비엔날레, 국제도자학술회의, 다채로운 문화예술 공연은 물론 각국의 도자기를 구입할 수 있는 문화상품 시장과 수준 높은 도자관광 프로그램이 마련됩니다.”4)라고 되어 있다. 이 도자기 축제는 국내 행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제수준의 거창한 행사라는 점과 감동과 화합의 새천년 한마당 문화축제라는 점, 그리고 반만년 한국도예 전통의 진면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여주인의 자긍심을 높여주는 이벤트라고 생각한다.

여주에는 거물급 유명인들의 유택이 많다. 1989년에 발간한 『여주군지』를 보면 159명의 능침 및 분묘가 소개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유적으로 서희장군 묘(경기도기념물 제36호)·이완장군 묘(경기도기념물 제16호)·원두표 묘(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8호)·최시형 묘(향토유적 제8호)·홍영식 묘(향토유적 제7호) 등을 꼽을 수 있다.

이제까지 논의하고 설명한 내용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여주의 인풍에서는 여주인들은 글공부를 많이 해서 문과에 급제하고 관리에 등용된 문신들이 특별히 많았으니 문풍(文風)이란 말을 쓸 수 있었다. 다음은 자신이나 집안의 영고성쇠를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하여 대의에 살다간 인물들이 많으니 의풍(義風)이란 말을 붙였다. 그 다음은 어떤 성격의 인물보다도 여주에서는 효자가 많이 배출되었으니 효풍(孝風)이란 말을 붙였다. 그래서 여주의 인풍(人風)을 문풍·의풍·효풍이란 말로 집약하였다. 여주의 향풍에서는 여주의 역사적 배경, 지리적 배경, 인간적 배경을 고찰하면서 여주지방의 특색, 지방색이라고 자랑할 만한 것들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를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옛날에는 남한강의 수로를 이용한 강항으로서 상업과 수운의 중심지였다. ②여주는 문화유산이 많은 역사의 고장이다. 그래서 문화유적, 유물, 문화재의 보고라 하였다. ③여주는 역대 임금의 왕비를 많이 배출한 지역이다. ④여주는 쌀과 도예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⑤여주에는 정관계, 종교계의 거물급 인물들이 묻혀 있는 곳이다. 그만큼 풍수지리학적으로 명당이 많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상의 몇 가지를 여주지방의 특색, 즉 향풍이라고 정의하였다. 한마디 덧붙이면 여주는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영명한 세종대왕께서 잠든 곳이니, 그 세종의 얼을 되살리고 세종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과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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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