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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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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에 의하면 여주는 충주목(忠州牧)이 거느리는 지주사(知州事)인 원주의 속현으로 황려현이라 되어 있다. 그 내용은 1018년(현종 9)에 원주의 속현이었다가 후에 감무(監務)가 설치되었으며 1257년(고종 44)에는 영의라 칭하였고 1305년(충렬왕 31)에는 황비 순경왕후 김씨의 내향(內鄕)이므로 여흥군으로 승격시켰다. 우왕(禑王) 때에는 황려부(黃驪府)로 승격되었다가 공양왕 원년인 1389년에 다시 여흥군으로 강등되었다. 천령현은 한때 광주목(廣州牧)의 속현이었다.

『고려사』 「지리지」는 고려 말기가 되면서 도(道)의 소관구역이 고정화되고 도의 장관인 안찰사(按察使)의 비중이 높아져 행정적인 역할이 커질 때, 주(州)·군(郡)· 현(縣) 이외에 향(鄕)·소(所)·부곡(部曲)·장(莊)·처(處) 등의 특수행정구역이 분포되었다. 이때 여주 관내에 있었던 소·장·처는 주 남쪽 30리의 방근곡처(防斤谷處), 주 서쪽 15리의 신제처(新提處), 주 서쪽 15리의 신잉이소(新仍伊所), 천령현 동쪽 20리의 등신장(登神莊)이었다. 소는 특정 부류의 사람들에게 공납품을 생산하도록 한 특수행정조직의 하나였고 장·처는 왕실을 비롯하여 궁원(宮院)과 사원(寺院) 등이 지배한 일종의 장원(莊園)이었다.

여주는 여말선초의 정권교체기를 거치면서 많은 변동을 겪게 된다. 우선 이 지역의 토성(土姓)인 황려 민씨(黃驪閔氏)가 무신정권 아래에서 새로운 관료층으로 대두하기 시작하여 원 복속기까지 지배세력으로 군림하게 되는 변화 속에서 원주(原州)의 속현이었던 황려현은 여흥군(驪興郡), 황려부(黃驪府)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 여주는 고려후기의 사상문제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곳이다. 고려후기 무인집권기에 활약했던 이규보(李奎報)가 황려, 즉 여주 사람이었다. 고려 삼은으로 알려진 이색(李穡)의 유적과 시문(詩文)이 한 세대를 풍미한 곳도 여주지방이었다. 신륵사에 있는 나옹선사(懶翁禪師)의 행적을 기록한 ‘보제존자시선각탑명(普濟尊者諡禪覺塔銘)’ 기문(記文)이 있고 시문으로는 여주의 연혁과 관계된 지명을 소재로 한 「천령음(川寧吟)」이 있다.

 

川寧吟有自川寧來訪者因述所懷
天地源兮竹嶺下丹山蘂坡驪興野奔流數百
有餘里舟入松京無晝夜川寧一邑好風煙東
岸楊根西利川公卿別墅遙相望春風秋
月開華筵我生鎭江近大海鯨波蹴空浩無外
風帆扣泄遊紫汀當時樂事眞一快白頭
軟紅塵底行狂歌往往難爲情聖恩如天
領史翰官閑祿厚榮吾生吾生儘榮奈無
用所以江山入淸夢何當明農向川寧聽
取岡頭有鳴鳳
내의 근원은 죽령(竹嶺) 밑인데,
단산(丹山)과 예파(蘂坡)가 여흥(驪興)들일세
빨리 흐르기를 수백리가 넘는데,
배가 송경(松京)으로 들어가기를 낮과 밤이 없네.
천령(川寧)한 고을은 바람과 연기가 좋아,
동쪽 언덕은 양근(楊根)이요
서쪽은 이천(利川)일세.
공경들의 별장(別莊)이 멀리 서로 바라보이는데
봄바람 가을 달에 화려한 술자리여라.
내가 난 것은 진강(鎭江)이요, 큰 바다에 가까워서,
그래 물결이 하늘을 차서 넓게 밖이 없네.
바람 돛이 노를 치면서 자정(紫汀)에 노니
당시의 즐거운 일이 참으로 하나의 쾌한 일이네.
흰 머리와 엷게 붉은 것이 티끌 밑으로 가니,
미친 노래 왕왕(往往)히 참을 수가 없네.
성은(聖恩)이 하늘과 같아 사한(史翰)을 거느리니,
벼슬은 한가하고 녹(祿)은 많아 내 삶이 영화로우네.
내 삶이 다 영화로워도 쓸데없는데 어이 하리,
강산이 맑은 꿈에 들어 도는 까닭이네.
어쩌면 내일 새벽에 천령으로 향하여
메뿌리 머리에서 우는 봉의 소리 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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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