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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

  • 서기 1897년(광무 1) 11월 22일:명성황후의 묘지문을 지음
    • 내용 : 세상을 떠난 황후(皇后)의 묘지문은 이러하였다. 임금이 지은 행록(行錄)은 이러하다. “죽은 황후(皇后)의 성은 민씨(閔氏)이고 본향은 여흥(驪興)이다. 시조는 칭도(稱道)인데 고려(高麗) 때 상의봉어(尙衣奉御)를 지냈다. 3대(三代)는 영모(令謨)인데 벼슬은 집현전 태학사(集賢殿太學士) 상주국대사(上柱國大師)이고 시호(諡號)는 문경(文景)이었다. 4대는 종유(宗儒)인데 벼슬은 중대광찬성사(重大匡贊成事)이고 시호는 충순(忠順)이다. 문경과 충순은 고려사(高麗史)에 전한다. 본 왕조에 들어와서 심언(審言)인데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이고 충원(沖源)은 은일로 집의(執義)를 하였다. 3대(三代)인 제인(齊仁)에 이르러 호(號)는 입암(立巖)이고 좌찬성(左贊成)이었다. 또 4대인 광훈(光勳)에 이르러 관찰사(觀察使)로서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되었다. 다음 유중(維重)에 이르러 호(號)를 둔촌(屯村)이라고 하였는데 우리 인현 성모(仁顯聖母)를 낳았다.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을 봉하였고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었다. 나라의 기둥과 주춧돌로서 선비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효종(孝宗)의 사당에서 함께 제사지냈다. 진후(鎭厚)의 호(號)는 지재(趾齋)인데 좌참찬(左參贊)이고 시호는 충문(忠文)이었다. 사려가 깊고 계책이 많아 나라의 충실한 신하가 되었다. 경종(景宗)의 사당에서 함께 제사지냈는데 이가 황후의 5대 조상이다. 고조(高祖) 익수(翼洙)는 은일로 장령(掌令)을 지냈고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추증되었는데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다. 선비들에게 도를 강론하여 선비들의 첫째 꼽히는 사람으로 되었다. 그래서 숙야재(夙夜齋) 선생이라고 불렀다. 증조(曾祖) 백분(百奮)은 대사성(大司成)을 지냈고 좌찬성(左贊成)을 추증 받았는데 강의하고 과감하여 바른 말을 하면서 흔들리지 않았다. 조부(祖父) 기현(耆顯)의 호(號)는 이송(二松)인데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고 영의정(領議政)을 추증 받았다. 효도와 우애와 청백하고 검소한 것으로 하여 당대에 명망이 있었다. 아버지 치록(致祿)은 호(號)가 서하(棲霞)인데 첨정(僉正) 벼슬을 지냈으며 여성부원군(麗城府院君) 영의정(領議政)을 추증 받았고 시호는 순간(純簡)이었다. 학식이 많고 연원이 있었다. 원래 아내인 해녕부부인(海寧府夫人) 오씨(吳氏)는 은일로서 찬선(贊善)을 지내고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추증받은 문원공(文元公) 희상(熙常)의 딸이었으며, 후실인 한창부부인(韓昌府夫人) 이씨(李氏)는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추증받은 규년(圭年)의 딸인데 이조판서로서 영의정을 추증받은 충정공(忠貞公)으로서 호(號)가 창곡(蒼谷)인 현영(顯英)의 후손이다. 한창부부인(韓昌府夫人)이 신해년(辛亥年) 9월 25일 정축일(丁丑日) 자시(子時)에 여주(驪州) 근동면(近東面) 섬락리(蟾樂里)의 자기 집에서 황후를 낳았다. 이 날 밤에 붉은 빛이 비치면서 이상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찼었다. 황후는 성품이 단정하고 아름답고 총명하고 인자하여 어려서부터 행동하는 것이 떳떳하였으며 과격하게 말하거나 웃는 일이 없었다. 처녀 아이들이 꽃을 꺾어 가지고 벌레와 희롱하니 말리며 말하기를, ‘벌레들을 잘 기르고 자래우는 것은 너를 기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생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모든 사람들보다 일찍이 뛰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순간공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두세 번만 읽으면 곧 암송하였다. 알기 어려운 심오한 뜻을 분별해서 대답하였고 조목조목 통달하였다. 또 기억력이 비상하여 심상한 사물이라도 한 번 보기만 하면 빠짐없이 잘 알았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여 역대의 정사에 대한 잘잘못과 옳고 그른 것을 마치 손바닥을 보듯이 환히 알았으며 나라의 근거가 될 만한 옛 일과 역대 임금들의 좋은 말과 아름다운 행실과 혹은 『야사(野史)』나 『보감(寶鑑)』에 실려 있는 것까지도 능히 말하니 이것은 그 가정의 견문이 본래 있어서이므로 다른 집은 미칠 바가 못되었다. 왕비(王妃)의 자리에 올라서 도운 것이 많은 것은 평상시에 공부한 힘이다. 9살 때 순간공의 초상을 당하자 곡(哭)을 하며 우는 초상 범절은 마치 어른이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염할 때에 집안 사람들이 나이가 어린 것을 생각하여 잠깐 피할 것을 권하자 정색하여 말하기를, ‘어째서 남의 지극한 인정을 빼앗으려 합니까.’ 라고 하였다. 장례 때에도 일을 끝마치고 섧게 실컷 운 다음에야 물러갔다. 부부인(府夫人)의 초상을 당했을 때에도 장례와 관련한 모든 자재들을 집안에서 마련하였고 도가 넘도록 슬퍼하였으며 오빠인 민승호(閔升鎬)의 초상 때에도 마치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는 듯이 슬퍼하였다. 황후의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는 대체로 타고난 천성에서 나온 것이다. 을축년(乙丑年)에 안국동(安國洞) 자기 집에서 꿈을 꾸었는데 인현 성모가 옥규(玉圭) 하나를 주면서 가르치기를, ‘너는 마땅히 내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다. 너에게 복을 주어 자손에게 미치게 하니 영원히 우리 나라를 편안하게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부부인의 꿈도 같았다. 성모가 가르치기를, ‘이 아이를 잘 가르칠 것이다. 나는 나라를 위하여 크게 기대한다.’라고 하였다. 집의 사당 앞에 반송이 있었는데 이 해에 묵은 뿌리에서 가지가 돋아 났고 옥매화가 다시 피었다. 황후의 집은 바로 인현 성모의 집이다. 대청이 있었는데 감고당(感古堂)이라고 하였다. 옛날 우리 영조(英祖)가 여기에 와서 우러러보고 절한 다음 친필로 현판을 써서 성모가 일찍이 있던 곳에다 걸어놓았다. 덕 있는 가문에 경사가 나고 상서로움이 보이여 그 자손들에게 좋은 계책을 물려줌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있었다. 병인년(丙寅年)에 선발되어 별관에 있으면서 『소학(小學)』, 『효경(孝經)』, 『여훈(女訓)』 등의 책을 공부하는데 밤이 깊도록 손에서 놓지 않았다. 공부를 좋아하는 것은 역시 천성이었다. 3월 20일 기묘일(己卯日)에 왕비로 책봉되고 다음 날에 혼인예식을 거행하였다. 왕후(王后)가 궁에 들어와서 우리 신정성모(神貞聖母)를 지성으로 섬겼고 크고 작은 일을 환히 알아서 반드시 먼저 문의한 다음 그 의견대로 하였다. 성모가 늘 말하기를, ‘왕비는 효성스럽다.’ 라고 하였다. 성모가 나이 많아지자 아침 저녁으로 문의하는 것 외에도 일상 생활과 접대하는 절차를 반드시 적당하게 하였다. 경인년(庚寅年)에 앓을 때에도 황후(皇后)가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아픈 부위를 손으로 주물러 주었다. 성모(聖母)가 그의 수고를 생각하여 그만두고 돌아가 쉬라고 말하였으나 그래도 물러가지 않았다. 침전(寢殿)의 약을 달이는 것과 음식을 올리는 것을 황후가 권하고 올리는 것이 아니면 들지 않았다. 때문에 올리는 시간을 감히 어기지 않았다. 하루는 성모가 손을 잡고 말하기를, ‘나는 늙고 또 병이 심하다. 그렇지만 한 가지 생각은 오직 백성들과 나라의 바깥일에 대해서는 임금이 있고 안의 일에 대해서는 왕비에게 부탁했으니 내가 다시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성모의 초상을 당하자 장례와 관련한 모든 일을 반드시 효성스럽게 하였고 제사지내는 것을 반드시 공경스럽게 하였다. 또한 사용하는 모든 물건들을 더없이 정결하게 하기 위하여 힘썼다. 일찍이 성모가 좋아하는 것을 얻었을 때에는 꼭 효모전(孝慕殿)에 올리었다. 부제사(祔祭祀) 때에 휘장도 황후 자신이 손수 만들었다. 늙은 궁인(宮人)들을 만날 때마다 문득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눈앞에 부딪히는 것은 모두가 슬프다.’ 라고 하였다. 황후는 성모를 종신토록 사모하였다. 종묘(宗廟)와 궁, 능(陵)과 원(園), 여러 산과 강에 제사지내는 그릇이나 제사지내는 물건이 넉넉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모두 내탕고(內帑庫)의 것을 내서 보충하였다. 기신제(忌辰祭)에도 반드시 제사지내는 옷을 갖추고 밤을 지새웠으며 개인 제사에도 그렇게 하였다. 매해 음력 2월달에는 친히 북쪽의 후원(後苑)에서 누에를 쳐서 바쳤으며 제명원(齊明苑)에 과일이 처음 익으면 햇것을 먼저 올려 제사에 쓰게 하였는데 이것은 황후가 조상을 추모하고 근본을 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친척들을 사랑하니 멀고 가까움이 없이 모두 다 기뻐하였다. 혹 은혜를 바라는 사람이 있으면 경계하여 말하기를, ‘항상 억제할 것이다. 그만해도 오히려 교만하고 사치할까봐 우려되는데 더구나 깃을 빌려준다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해치는 것으로 된다.’ 라고 하였다. 이것은 황후가 화목할 것을 숭상한 것이다. 계유년(癸酉年)에 황후가 꿈을 꾸었는데 하늘이 자시에 열리더니 5색 구름이 영롱하였다. 하늘에서 글을 내려보내서 말하기를, ‘만년토록 태평할 것이다.’ 라고 하므로 황후는 절하고 받았다. 다음해 황태자(皇太子)가 태어났다. 황후는 황태자에게 은정과 사랑을 부지런히 돌리면서도 옳은 법도가 있게 가르치는 것을 스승처럼 엄하게 하였다. 어려서부터 말을 잘 하였기 때문에 책을 주었고 글을 터득할 나이가 되어서는 날마다 서연(書筵)을 열었다. 황후는 매번 강론한 글의 뜻을 물었으며 날마다 생활과 실천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가지고 비유를 설정하여 그 뜻을 명백히 깨닫게 하였다. 반드시 이해하고 분석하게 될 때에는 다시 그와 관련된 뜻을 더 찾아 토론하게 해서 되도록 자세히 알고 공고히 기억하기에 힘썼다. 오늘 훌륭한 학문을 성취하게 된 것은 황후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 자녀를 사랑하고 궁중을 인도하는 데 있어서 화목하고 임금을 도와주는 그 덕화는 봄날의 화기처럼 애애한 것이 있었다. 자기 소생이 있게 되자 은혜가 갖추어져 더 지극하였다. 온 나라에 수재와 한재의 재변이 있을 때마다 얼굴에는 근심스러운 기색을 띠고 너그럽게 돌봐주기에 힘썼고 무더운 여름과 혹한의 겨울에는 수도의 빈궁한 백성들을 돌봐주는 것을 해마다 떳떳한 일로 여겼다. 빈한하여 혼례(婚禮)와 상례(喪禮)를 치르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후하게 돌봐주었다. 병자년(丙子年)에 큰 흉년이 들자 조세를 감면해주었고 경비가 궁색하면 돈과 곡식을 내주어 보충하도록 하였다. 호위 군사들이 고통을 겪는 것과 밖에 나가 있는 군사들이 한지에서 날 때에는 특별히 음식을 공급하도록 하였다. 위문하는 심부름꾼이 서로 연이으니 군사들이 다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었으며 사람들은 저마다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였다. 여러 번 화재를 겪었기 때문에 늘 궁중 하인들에게 불을 조심하게 하였으며 진기한 물품을 아예 없애서 한 번도 물어보는 일이 없었다. 진전(眞殿)과 남쪽 전각에 은그릇을 잃어도 곧 안에서 주조해 주도록 하고 사람들을 따져서 신문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은 무고한 사람이 걸려들까봐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아랫사람들을 통제하는 데는 관대하면서도 엄하여 은혜와 위엄을 같이 보이니 궁중에서 감화되어 서로 경계하기를, ‘이 황후의 인자하고 두터운 혜택이 사람들에게 깊이 젖어 있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하였다. 집에서 대대로 의리를 강론하니 황후가 어려서부터 배운 점이 있어서 착하고 간사한 것을 판별하고 옳고 그른 것을 밝혀 내는 데는 과단성이 있어서 마치 못과 쇠를 쪼개는 듯이 하였고 슬기로운 지혜는 타고난 천성이어서 기틀을 아는 것이 귀신 같았다. 어려운 때를 만난 다음부터는 더욱 살뜰히 도왔다. 짐의 기분이 언짢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아침이 되기를 기다려 앉았고 짐이 근심하고 경계하는 것이 있으면 대책을 세워 풀어 주었다. 심지어 교섭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는 나를 귄해서 먼 곳을 안정시키도록 하니 각국에서 돌아온 사신들이 말하기를, ‘다른 나라 사람들이 모두 감복한다.’라고 하였다. 황후가 일찍이 짐을 도와서 말한 것이 있는데 근년에 지내면서 보니 다 황후가 일찍이 말한 것으로서 일마다 다 징험되어 딱딱 들어맞았다. 심원한 생각으로 미래에 대한 일을 잘 요량하는 황후의 통달한 지식은 고금에 따를 사람이 없으며 사람들이 미칠 바가 아니다. 임오 군란(壬午軍亂) 때 황후는 온화한 태도로 임시방편을 써서 그의 목숨을 보존하였다. 궁궐로 돌아오자 혹은 말하기를 군란을 일으킨 군사들을 깡그리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말하였을 때 황후가 말하기를, ‘내가 덕이 없고 또한 운수에 관계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찌 그 무리들이 한 짓이겠는가.’ 라고 하였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크게 포용하면 덕은 끝이 없다.’ 라고 하였으니 황후의 덕이 그러한 것이다. 갑신년(甲申年) 역적 신하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박영교(朴泳敎)가 난리를 일으켜 사변이 생겼을 때 전(殿)과 궁(宮)이 피난가고 나라 형편이 위급하여 순간에 달려 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이보다 먼저 황후가 역적 영효를 타일러 그 음모를 좌절시켰는데 그 세력이 확대되자 여러 역적들이 스스로 서로 의심하며 각기 도망쳤으므로 난리는 곧 평정되었다. 황후는 성의 동쪽에 피해 있으면서 자성(慈聖)을 호위하고 세자(世子)를 보호하였는데 창황히 시종한 사람들이 한 명도 흩어져가지 않았다. 이것은 황후가 평상시 은혜로서 돌봐 주었기 때문에 어려운 때를 당해서도 용감한 사나이가 있었던 것이다. 갑오년(甲午年)에 외국 군사가 대궐에 들어오므로 짐이 황후와 태자에게 건청궁(乾淸宮)으로 피신할 것을 권고하였는데 조금 있다가 도로 함화당(咸和堂)에 돌아와 말하기를, ‘한 궁궐 안에서 가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차라리 여기 있으면서 여러 사람들의 심정을 안정시키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칼자루를 잃어서 이미 여러 역적의 머리를 베지 못할 바에야 우선 포용해서 그 흉악한 칼날을 늦추어 놓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여러 역적들이 이어 법과 제도를 고치고 크고 작은 제사도 다 생략하였다. 황후가 크게 한숨 쉬며 말하기를, ‘이것이야 어찌 덜어버리거나 보탤 수 있는 일이겠는가. 여러 역적들은 이미 하늘과 귀신에게 죄를 지었으니 죄가 많다.’고 하면서 진전(眞殿)에 제사지내는 물품을 한결같이 옛 규례대로 따라서 하였다. 황후가 대궐의 하인을 신칙하여 여러 역적들이 알지 못하게 하였다. 황후(皇后)가 일찍이 인재를 등용하는 데 언급하여 거듭 신칙하면서 말하기를,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것과 편안하고 위험에 처하는 것은 오직 인재를 잘 쓰는가 못쓰는가 하는 데 달려 있다. 그가 어질다는 것을 알았다면 마땅히 전적으로 임명하여 의심하지 말아야 하며 그가 어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면 마땅히 빨리 제거해야 한다. 대체로 크게 간사한 자는 충성하는 것 같으므로 이 때문에 요순(堯舜)도 사람을 알기 어려워하였다. 심지어 그 간사한 것을 의심까지 하면서도 우선 임명하여 쓴다면 이것은 화를 빚어내는 원인으로 된다.’ 라고 하였다. 내가 일찍이 황후의 말이 정확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일찍 용단을 내려 김홍집(金弘集), 유길준(兪吉濬), 조희연(趙羲淵), 정병하(鄭秉夏) 네 역적을 제때에 처형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가만히 외국 군사를 불러들이게 하였으며 훈련한 부대를 몰래 사촉하여 만고 천하(萬古天下)에 있어본 적이 없는 을미년(乙未年)의 큰 변란을 일으키기까지 하였다. 아, 짐(朕)이 황후를 저버렸다. 황후는 짐에게 간절한 한 가지 생각으로 받들었다. 비록 문안하는 것과 같은 절차에 대해서도 오직 빠짐이 있을까봐 근심하여 성실하게 하였으나 짐은 황후의 몸을 궁중에서 잘 보존하지 못하였으니 아, 내가 황후를 저버린 것이다. 지금 슬퍼하고 추모한들 후회와 여한이 어찌 없겠는가. 황후는 경복궁(景福宮)의 곤녕전(坤寧殿) 합문(閤門)에서 8월 20일 무자일(戊子日) 묘시(卯時)에 세상을 떠났다. 나이는 45세이다. 이 날 새벽에 짐(朕)과 황후가 곤녕전의 전각문 북쪽의 작은 난간에서 거닐고 있을 때 흉악한 역적들이 함부로 대궐 안에 들어와 소동을 피우니 황후가 개연히 짐에게 권하기를, ‘원컨대 종묘 사직(宗廟社稷)의 중대함을 잊지 말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비록 위급한 때라고 하더라도 종묘사직을 돌보는 마음이 이와 같았다. 조금 후에 황후를 다시 볼 수 없었으니 오직 이 한 마디 말을 남기고 드디어 천고의 영결을 지었다. 아, 슬프다. 이번 장례와 관련하여 의복을 비롯한 여러 가지 기물과 휘장 등속은 안에서 마련하여 쓰고 탁지부(度支部)에 번거롭게 하지 맒으로써 황후가 그 전에 나라의 계책을 생각하고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도록 한 지극한 뜻을 체득하게 할 것이다. 홍집(弘集)과 병하(秉夏) 두 역적은 이미 사형(死刑)을 적용하였으나 길준(吉濬)과 희연(羲淵) 두 역적은 다 도망쳐서 아직까지 체포하지 못하였으니 황태자가 복수하려는 생각에 대해서는 참으로 보기 안타깝다. 여러 신하들이 옛날 시호법을 상고하여 온 나라에 빛이 미쳤다 해서 ‘명(明)’이라 하고 예법과 음악이 밝게 갖추어졌다고 하여 ‘성(成)’이라고 하였다. 책봉하는 시호(諡號)는 ‘명성(明成)’이라고 하였고 능(陵) 이름은 ‘홍릉(洪陵)’이라고 하였으며 전각(殿閣) 이름은 ‘경효(景孝)’ 라고 하였다. 무덤 자리는 양주(楊州) 천장산(天藏山) 아래 간방(艮方)으로 앉은 언덕에 정하고 광무 원년(光武元年) 정유년(丁酉年) 10월 29일 갑신일(甲申日) 진시(辰時)에 장례를 지냈다. 석물을 세우는 공사는 우선 오른쪽을 비워 놓는 제도를 쓰지 않았다 하더라도 짐의 의도가 있어서 한 것이다. 영구 위의 글자는 황태자가 공경히 썼고 무덤 속에 묻는 관의 명정(銘旌)은 짐이 직접 썼다. 이렇게 해서 효성스런 생각을 펴고 슬픔을 다소나마 풀 수 있었다. 황후는 여러 차례 책봉하는 글을 받았다. 계유년(癸酉年)에는 조신(朝臣)들이 존호(尊號)를 올려 ‘효자(孝慈)’라고 하였고 무자(戊子), 경인(庚寅), 임진년(壬辰年)에는 황태자(皇太子)가 존호(尊號)를 더 올려 ‘원성 정화 합천(元聖正化合天)’이라고 하였다. 정유년(丁酉年)에는 높고 낮은 신하와 백성들이 나라가 독립의 기초를 세우고 자주권을 행사한 것 때문에 명(明)나라 이후로부터 천하의 예법과 음악이 다 우리 나라에 있었는 만큼 마땅히 황제의 계통을 계승해야 한다고 하였다. 관리들과 선비들과 백성들과 군사들과 저자 사람들이 일치한 말과 같은 목소리로 수십 통의 글을 올리기에 짐(朕)이 여러 차례 사양하였으나 더 할수가 없어서 바로 9월 계묘일(癸卯日)에 하늘땅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서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정하였다. 이 해를 광무 원년(光武 元年)으로 삼아 태사태직(太社太稷)에 고쳐쓰고 금인장과 금책문에 왕후(王后)를 황후로,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로, 왕태자비(王太子妃)를 황태자비(皇太子妃)로 쓰도록 지시하였다. 대체 황후가 훌륭한 공덕으로 짐의 곁에서 잘 도와 주었기 때문에 내가 정사를 잘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오늘날까지 있어서 보고 있으나 황후는 보지 못하니 아, 슬프다. 네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황태자는 둘째 아들이다. 좌찬성(左贊成)으로서 영의정(領議政)을 추증받은 충문공(忠文公) 민태호(閔台鎬)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내를 삼았다. 맏아들과 셋째 대군(大君), 넷째 대군, 그리고 딸 하나 공주(公主)는 모두 일찍 죽었다. 완화군 선(完和君瑄)은 장가도 못들고 죽었고 의화군 강(義和君堈)은 지금 군수(郡守) 김사준(金思濬)의 딸에게 장가 들어서 옹주(翁主)가 둘이 있었으나 다 죽었다. 아, 황후가 대궐에 있으면서 정사를 도와준 것이 30년인데 실로 순리에 처하지 못하고 정상적인 길을 밟지 못한 관계로 도리어 간고하고 험난한 일만 하더니 제 명을 살지 못하고 중년 나이에 죽었다. 이것이 어찌 하늘 탓이겠는가. 보좌가 서로 이루어지고 안에서 다스리는 것이 어질고 밝아서 만대에 훈계로 될 만한 것이 진실로 한두 가지가 아니었건만 곤란한 일이 많고 지극히 비통한 가운데여서 대체로 기억할 수 없다. 그리고 또 황태자가 지은 행록(行錄)이 있는데 거기에 자세히 씌여 있으니 백 대를 징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짐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아, 황후로 하여금 오랜 나이를 살게 하였더라면 숨은 공로와 부드러운 덕화가 나라를 빛나게 하여 책에 기록할 것이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이에 대해서 짐이 하늘의 이치에 의심하는 것이고 유감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아, 슬프다.”
      황태자가 지은 행록은 이러하다. “슬프고 슬프다. 사람으로서 누군들 부모가 없으며 부모로서 누군들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겠는가 만은 지극히 자애로운 은정은 어머니가 나에게 베푼 것 만한 것이 없으며 지극히 비통한 슬픔은 내가 어머니에 대한 것 만한 예가 없을 것이다. 내가 이미 성장하였으나 그래도 어루만져 주는 것은 마치 젖먹이 어린아이처럼 하였다. 주리거나 배부르거나 춥거나 덥거나 할 때 마음속에 하려고 하는 바가 있으면 어머니가 반드시 먼저 알았으며 병이 있으면 음식을 들고 잠자는 것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내가 만약 몹시 아프지 않으면 억지로 밥을 먹였으며 밤에는 혹 잠자는 척하면서 나의 근심어린 마음을 풀어주려고 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일상생활을 몰래 살펴보면 밤에도 방 안의 불빛이 환희 비치었고 말소리가 오히려 낭랑하였다. 내가 천연두를 앓을 때에 어머니가 밤에 꼭꼭 밖에 나가 하늘에 빌었으므로 이내 다시 회복되었으며 내가 일찍이 옆구리의 담증으로 고통을 겪을 때 몹시 아프지는 않았지만 음식 먹는 데 방해되자 어머니는 오래되면 혹 종처로 될까봐 늘 걱정하면서 침을 바르라고 가르쳐주어 퉁퉁 부었던 것이 내려 마침내 평상시와 같이 되었으나 어머니는 보지 못하였다. 내가 겨우 젖니를 갈 때 어린 궁인(宮人)과 뜰에서 놀이를 하는데 어머니가 말하기를, ‘너는 이 놀이를 즐기는가.’ 라고 하고는 또 ‘이보다 즐거운 것이 있다.’ 라고 하면서 문득 글자를 써서 입으로 외우고 손으로 쓸 것을 가르쳐 주었다. 공부할 나이가 된 후부터 서연(書筵) 에서 강론한 것을 어머니가 매번 그 글 뜻을 찾아서 풀어 주었으며 비근한 일을 들어 반복 비유하여 쉽게 이해하도록 하였으며 알게 되어 마음이 기뻐할 때 바야흐로 다음 배울 것으로 넘어 갔기 때문에 아는 것이 정확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나라의 옛 고사(古事)와 선대 여러 임금들의 훈계를 가르쳐주기에 힘썼으므로 지금까지 귀에 쟁쟁하여 듣는 것 같다.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을 잘 꾸려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편안하게 하는 요령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대체로 몸에 배고 골수에 젖어 몸소 체득하여 실행하기에 절실하였으며 더욱이 운수를 찾아서 얻는 데 힘이 있었다. 어머니는 효성이 타고난 천성이어서 조상을 받드는 모든 일에 더할 나위 없이 하였다. 외조부 순간공(純簡公)의 묘지를 옮길 때에 상지관(相地官)들이 말하기를, ‘아무 곳에 좋은 묘(墓)자리가 있는데 남의 무덤을 옮겨야 합니다.’ 라고 말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부모를 위하는 마음은 높은 사람이건 낮은 사람이건 같은데 어찌 나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 남을 해하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좋은 묘(墓) 자리를 보령(保寧)에 정했을 때 길이 너무 멀어서 경비가 지내 많이 드는데도 타산하지 않고 모두 내탕고(內帑庫)의 것을 내서 마련하였으며 나라의 물건과 백성들의 노력은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 묘를 쓰는 지역 안의 백성들의 집을 철거하는 것과 영구가 지나가는 길의 논밭 곡식이 손상되는 것과 조각돌 하나, 흙 한 삽에 대해서도 반드시 다 해당한 값을 넉넉히 주었으니 백성들의 생계를 돌보는 어머니의 훌륭한 생각은 어디에나 미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어머니가 일찍이 나에게 가르치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이 굳어야 나라가 편안하다. 혹시 위에서 백성을 돌보지 못한 관계로 곤궁하게 되어 살아갈 수 없다면 그 백성은 우리의 백성이 아니니 백성이 없다고 말해도 옳을 것이다. 종묘사직(宗廟社稷)을 너에게 부탁하니 너는 이것을 깊이 생각하고 오직 백성에 대한 문제로 마음을 삼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어릴 때여서 그 뜻을 깨닫지 못했으나 그래도 가르친 말은 잊지 않았다. 지금 이 훈계를 더욱 깨닫게 되니 만대의 귀감으로 될 수 있다. 어머니의 공로와 덕은 하늘땅과 같아서 이름할 수 없으니 책봉하는 글로 찬양하고 성대한 의식을 빌려 기뻐하는 것은 우리 왕실의 떳떳한 법이다. 내가 여러 차례 글을 올려 간곡히 청하였고 심지어 조정의 관리들을 인솔하고 부지런히 요청하였으나 매번 백성들이 현재 곤궁하기 때문에 이런 예식을 거행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하면서 승인하지 않았었다. 겸손한 그 덕은 공경히 우러르게 되고 칭송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 자식으로서 이 예식을 거행하지 못한 여한은 일생토록 끝이 없을 것이다. 늙은이를 봉양하는 것은 옛 규례이다. 내가 일찍이 안에서 여러 차례 간곡하게 청하여 대체로 장수한 사람을 데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만년 장수를 빌었다. 계사년(癸巳年)에 영조(英祖)가 이미 실행한 전례를 따라 내외에 잔치를 차리고 늙은이, 곱사등이들이 춤을 추며 만수를 축원하였다. 그 때 이 잔치에 참가한 사람들은 지금도 모두 넓고 큰 은택을 입고 살아있는데 오직 우리 어머니만이 다시 볼 수가 없으니 아, 슬프다. 임오년(壬午年) 6월에 군졸들이 변란을 일으켜 창황한 가운데 행차가 길을 잃어 어디에 있는지 한 달이 되었으나 의식과 위험은 오히려 안정되지 않아서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봉상시정(奉常寺正) 서상조(徐相祖)가 글을 올려 말하기를, ‘누추한 곳에 가만히 가서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어 충주(忠州) 장호원(長湖院)에 있는 충문공(忠文公) 민영위(閔泳緯)의 집에 가서 맞이하여 8월 1일에 궁궐로 도로 돌아왔다. 갑신년(甲申年) 역적 박영효(朴泳孝), 김옥균(金玉均), 홍영식(洪英植), 박영교(朴泳敎)의 무리들이 거짓말로 사변을 만들어내서 행차가 피난 갔으며 위기가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처하였다. 내가 신정왕후(神貞王后)와 우리 어머니를 모시고 동성(東城) 밖으로 피난 갔는데 어머니가 나에게 가르치기를, ‘나는 진실로 이 무리들이 거짓말을 하였다고 의심한다. 이 무리들을 죽이면 자연히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조금 있다가 역적이 과연 평정되었다. 갑오년(甲午年)에 여러 역적들이 조정을 뒤엎고 선대 임금들이 이루어놓은 법을 다시 남겨두지 않았으며 크고 작은 제사에 이르기까지 역시 다 없애치웠다.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때에 따라서 덜어버리고 보태는 것은 시기에 맞추기 위해서이다. 고의로 바꾸거나 전과 다르게 하자는 것은 아닌데 일체 개혁을 하였으니 어찌 다 실행하겠는가. 또한 제사는 하늘과 조상을 섬기는 것이다. 흉악한 무리들의 악한 행동은 이미 차고 넘쳤다. 원통하고 원통하다.’ 라고 하였다. 을미년(乙未年) 8월 20일 사변은 만고천하(萬古天下)에 있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아, 저 김홍집(金弘集)은 실로 흉악한 역적의 우두머리이며 유길준(兪吉濬), 정병하(鄭秉夏), 조희연(趙羲淵)은 한 패거리로서 결탁하여 흉악한 음모를 비밀리에 꾸몄는데 형적(形跡)이 자못 폭로되었다. 어머니가 급히 피하려고 하니 병하가 길을 막으며 피하지 말 것을 청하였다. 외국 군사가 대궐에 함부로 들어왔으니 병하가 청한 이것은 우리의 변란을 일으킨 군사들을 중지시키려 한 것뿐이었다. 아, 네 흉악한 역적의 심보는 모두 한결같지만 그 중에서도 병하(秉夏)는 더구나 극히 흉악하고 참혹한 자이다. 외국 군사가 와서 호위한다는 거짓 조서를 22일에 자기가 써서 강제로 반포하였으니 조서(詔書)는 다 네 역적이 한 것이다. 네 역적의 죄는 비록 그 잔당을 남김없이 씨를 말린다 한들 어찌 나의 끝없는 원통을 조금이나마 씻을 수 있겠는가. 홍집(弘集)과 병하(秉夏)는 이미 처단하여 형벌을 바로 적용하였지만 길준(吉濬)과 희연(羲淵)은 체포망에서 새어나갔다. 내가 거상 중에 있으면서 군사와 나라를 위하여 흉악한 역적을 처단하지 못했으니 감히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 우리의 모든 신하와 백성들이 다 같이 일에 종사할 것을 원하고 있으니 만약 사람의 윤리가 있다면 그 의리도 같을 것이다. 생각하건대 우리 황제 폐하의 높은 공적과 훌륭한 덕은 하늘의 운수와 배합되어 능히 큰 왕업을 넓혔고 자주권(自主權)을 행사하였다. 모든 관리들과 군사와 백성들이 일치한 말로 우러러 황제 폐하로 될 것을 청하였는데 굳이 사양하다가 사람들의 심정을 막을 수 없어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빈전(殯殿)의 의장과 기물은 다 황색을 써서 제도대로 하였다. 그런데 황후 폐하는 자신이 직접 볼 수가 없었으니 미치지 못한 나의 비통은 더구나 그지없다. 황제폐하가 친히 지은 행록은 지극하고 극진하다. 내가 다시 무슨 말로 더 하겠는가. 그러나 어머니의 지극한 자애로움과 나의 지극히 비통함을 더 자세히 써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중복됨을 구태여 피하지 않았다. 또한 귀와 눈으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역시 감히 그만둘 수 없었다. 생각건대 우리 어머니의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동은 어찌 여기에 그치겠는가. 아, 슬프고 슬프다.”
      “신 영소(泳韶)는 돌아간 황후의 묘지문을 짓는 관리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이 임무를 감히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황송하고 두려워서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또 지시를 받았는데 지시에서 말하기를, ‘행록을 짓고 이어 묘지문을 짓는 것은 명릉(明陵)은 신사년(辛巳年), 홍릉(弘陵)은 정축년(丁丑年)의 전례에 이미 있는 것이다. 지금 행록을 내려 보내니 묘지문에는 황태자가 몹시 슬퍼하는 것을 쓸 것이며 또 다 기록하지 못한 것을 거두어 모아 더욱 상세하게 쓸 것이다. 백대 후에 가서도 반드시 그 뜻을 슬퍼하고 그 효성을 탄복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니 일체를 묘지문의 뒤에다 새기도록 하고 역시 글짓는 관리를 시켜서 그 사실을 그 밑에다가 첨부하여 기록하도록 할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공경히 받아 읽어보고 칭송하고 감탄하기를 마지않았으며 계속하여 눈물이 두 볼로 저도 모르게 적셨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황제폐하가 간곡히 돌보며 슬퍼하는 생각은 장례까지 극진하게 하려고 하는 데서 나타나며 심지어 광중에 들여 놓는 글까지 해와 별처럼 밝게 비쳐 주었습니다. 또 생각건대 우리 황태자의 효성은 타고난 천성으로서 끝없는 비통한 생각을 품고 원통함을 생각하면서 격려하는 뜻이 글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아, 이미 짓고 또 지었으니 그 훌륭한 글이 간결하면서도 실속이 있어 마치 하늘과 땅이 포용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신이 가까운 시일에 친밀하게 지시를 받은 것과 수십 년 동안 훌륭한 덕과 아름다운 모범이 장차 역사에 기록되고 내세에 지시가 될 것에 의하여 귀와 눈으로 직접 본 것만 해도 그 만 분의 일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때문에 신은 한 자(字) 한 구(句)가 친절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감탄합니다. 옛글에 이르기를, ‘큰 덕은 반드시 얻는다[大德必得者].’ 라고 한 것은 반드시 이러한 이치가 있기 때문에 어진 사람이 정확하게 말한 것입니다. 대체로 우리 황후의 인자하고 착한 공로와 덕은 마땅히 하늘이 도와주어 영원히 늙지 않도록 복을 줄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백성들로 하여금 그 복과 은택을 영원히 받게 해야 할 것인데 이어 위험한 구렁텅이에 빠져 간고한 시련과 위험한 고비를 겪더니 심지어 만고천하(萬古天下)에 들어보지도 있어보지도 못한 더없이 흉악한 참변까지 있었습니다. 대체로 이치라고 말하는 것은 이 마당에서 더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치란 바로 하늘인데 하늘 역시 때에 따라서 비운과 암흑에 빠지는 것입니다. 일체 세상의 일찍 죽고 오래 사는 것, 재앙과 복을 주재하지 못하고 괴이하고 간사한 것을 반드시 쳐 없애지 못한다면 하늘도 과연 믿을 수 없습니다. 아, 슬픕니다. 예로부터 흉악한 역적이 어느 대(代)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어찌 을미년(乙未年)의 여러 역적들과 같은 그러한 큰 역적이 있었겠습니까. 을미년의 변란은 갑신년(甲申年)에서 시작한 것으로서 문관(文官)들과 무관(武官)들이 안일 해이하여 구차하게 그럭저럭 살아가다보니 능히 같은 목소리로 일제히 성토하여 남김없이 처단하지 못한 까닭에 마침내 가장 흉악하고 포악한 무리들로 하여금 조정의 반열에 있으면서 서로 은밀히 결탁하여 선대 임금들의 법도를 변경시켜 하나의 큰 사변을 무르익히게 하였습니다. 신하 된 사람치고 누가 감히 그 죄에서 빠져 나가겠습니까? 두 역적을 이미 처단했지만 절대로 나라의 법을 통쾌하게 적용하고 귀신과 사람의 울분을 씻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괴수가 법의 그물에서 빠져 나가 아직도 천지간에 숨 쉬고 있으므로 온 나라 신하와 백성들이 그의 살점을 씹어 먹고 그의 피를 마시는 것을 먼 데나 가까운 데가 구별이 없고 낮은 사람이건 높은 사람이건 오직 한결같습니다. 그런데 원한을 참고 견디면서 저 푸른 하늘을 함께 이고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치는 이미 없어졌고 의리도 또한 없어질 것입니다. 『춘추(春秋)』의 의리로 나라를 위하여 무시로 일을 하는 사람이 나라의 원수를 보복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나라의 기강이 무너진 것이고 형벌에 관한 정사가 폐지된 것입니다. 설사 나라가 없다고 말해도 옳은 것입니다. 황태자가 일찍이 조정에서 신하들을 면대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나라를 나라라고 하겠는가.’ 라고 하니 뜰에 가득 찼던 신하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고 땀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몸 둘 바를 몰라 하였으며 감히 우러러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루 동안에 그 소문이 구역에 두루 퍼져서 거리의 아이들까지 무시로 일을 따르는 의리를 알게 되었으며 역시 『춘추』의 법을 능히 말하였습니다. 신은 반드시 여러 역적들을 앞으로 나라에서 처단하여 그 죄를 똑바로 밝히고 큰 의리를 천하에 펼 날이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것이 나라의 큰 일이며 황태자가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남긴 뜻입니다. 생각건대 세상을 떠난 우리 황후는 평상시에 좋은 계책과 좋은 훈계로 충성과 효도를 숭상하여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마음과 골수에 젖어 있으니 우리나라의 만 대의 왕업에 기본이 되어 있습니다. 황제는 용맹과 지략은 하늘이 내놓은 것으로서 큰 국난을 평정하고 비로소 자주권을 세웠으므로 높고 낮은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왕위를 높이고 존호(尊號)를 올렸습니다. 황후는 실로 보배로운 존호를 받았으니 이것은 큰 덕을 지닌 분에게 하늘이 보답한 것입니다. 신이 이에 대해서 감히 글을 못한다고 사양할 수 없고 또 감히 외람되다고 해서 스스로 막아 나서면서 빠질 수도 없습니다. 신이 편벽되게 은혜를 입고 지어 친필로 ‘한 마음으로 폐하(陛下)를 섬기라.’는 글을 써 주는 것을 받았습니다. 은총을 많이 입었으나 우러러 생각할 때 조금도 보답하지 못하였습니다. 아, 훌륭합니다. 아, 슬픕니다.”(궁내부 특진관 민영소가 지어 올렸다.)
    • 출전 : 『고종실록』 권36, 고종 34년 1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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