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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 1864년(고종 1) 11월 5일:대왕대비가 전 여주목사 황주진을 동부승지에 임명할 것을 전교함
    • 내용 :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지시하기를, “전 여주목사(驪州牧使) 홍종화(洪鍾華)는 20년 동안 수령(守令) 노릇을 하면서 뛰어난 업적을 세웠으므로 내가 가상히 여겨온 지 오래다. 황주 목사(黃州牧使) 윤주진(尹周鎭)도 다시 임명된 후부터 자기 녹봉을 덜어서 나라 일에 보태어 거의 고을을 온전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 두 사람에 대해서는 설사 전한(前漢) 시대의 훌륭한 지방 관리와 다름이 없는 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니 거기에 대해 사의를 표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홍종화는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임명하고 윤주진은 특별히 품계를 올려줄 것이다.” 라고 하였다.
    • 출전 : 『고종실록』 권1, 고종 1년 11월 5일 임인.
  • 1867년(고종 4) 9월 17일:경기암행어사 박제관이 여주목사 김익현 등의 포상을 주청함
    • 내용 : 경기암행어사(京畿暗行御史) 박제관(朴齊寬)을 불러들여 만나보았다. 서면 보고를 바쳤는데 전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이승보(李承輔), 안성군수 이승로(李承老), 인천부사(仁川府使) 조운섭(趙雲涉), 이천부사(利川府使) 장익(張瀷), 가평군수(加平郡守) 김진(金瑨), 전 파주목사(坡州牧使) 조희풍(趙羲豊), 전 남양부사(南陽府使) 정태호(鄭泰好), 통진부사(通津府使) 신재지(愼芝), 전 지평현감(持平縣監) 유치도(兪致道), 전 음죽현감(陰竹縣監) 김순근(金恂根), 영화찰방(迎華察訪) 박연용(朴演鏞) 등에게는 죄를 주고, 양주목사(楊州牧使) 임한수(林翰洙), 지평현감(砥平縣監) 정기석(鄭箕錫)에게 임금의 인장이 찍힌 글과 안팎 옷감[表裏]을 주며, 전 양근군수(楊根郡守) 박효헌(朴孝憲), 전 고양군수(高陽郡守) 민태호(閔台鎬), 여주목사(驪州牧使) 김익현(金翼鉉), 파주목사 유환(柳晥), 교동부사(喬桐府使) 이근영(李根永), 김포군수(金浦郡守) 윤영하(尹永夏), 전전 고양군수(高陽郡守) 고석현(高奭鉉) 등에게는 차등있게 상을 줄 것을 주청하였다.
    • 출전 : 『고종실록』 권4, 고종 4년 9월 17일 정묘.
  • 1870년(고종 7) 4월 17일:여주에 양전을 시행하도록 함
    • 내용 :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에서 제의하였다. “지난날 여주(驪州)의 토지 면적에 폐단이 있는 것 때문에 공문으로 신칙한 바가 있었습니다. 방금 목사(牧使) 김인응(金寅應)의 보고를 보니 ‘정식 면적상의 이러저러한 사고는 원래 장부의 면적에 벗어나지 않는 것인데 턱없이 사고가 났다고 하는 면적이 많아진 관계로 대장 안에 있는 토지 면적이 줄어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원래 장부에 토지가 모자라기 때문에 아전들은 참람되게 마구 받아내니 온전한 토지도 따라서 장부 안의 사고인 것입니다. 이것은 법의 큰 원칙에서 허용할 수 없으므로 모두 실지 면적으로 돌려놓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지어 여러 가지 사고 명목으로 되어 있는 것까지도 글자 번호에 따르는 토지 면적수가 명백히 측량한 토지 대장에 있는 것이지만 모래에 묻혔거나 묵어서 버린 것과 같은 것으로서 조세에 응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허실이 많고 적은가 하는 데 대해서는 고을에서 점차 바로잡아서 묵은 토지를 일구는데 따라 조세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온전한 면적이나 여러 가지 사고가 난 면적이나를 논할 것 없이 모두 원 대장 안에 있는 것이며 사고가 났다고 염치없이 속인 것도 대장 안에 있는 토지가 사고 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대장 안에 있는 토지가 사고가 나서 모자라는 수량은 대뜸 해당 아전이 억울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되는데 이런 법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다고 하여 절대로 한 때의 잘못된 전례를 가지고 법의 원칙을 훼손시킬 수 없습니다. 이른바 정식 면적이라는 명목을 당장 없앤 다음 실지 면적으로 돌리게 할 것이며 여러 가지 사고를 핑계 대는 것은 수량대로 모조리 받든가 혹은 수량대로 형체가 없다든가 하는 것은 필시 문제가 있는 것으로써 일단 조사하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묵는 대로 일구어서 점차 조세를 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임진년(壬辰年)에 모래에 묻힌 것이라든가 갑인년(甲寅年)에 강물에 떠내려가서 이전부터 묵어오는 72결에 대하여 말하더라도 일단 재해 면적에 들어가기만 하면 어쩔 수 없는데 이것이 어찌 토지법 때문에 그렇습니까. 다시 일구어서 등록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거듭 밝힌 뒤에 조금이라도 덮어두는 것이 있으면 해당 수령(守令)은 중한 편으로 걸어서 죄를 논할 데 대하여 엄하게 신칙하기 바랍니다.” 승인하면서 이어 지시하기를, “이 고을의 토지 면적에 폐단이 있다는 것을 그전에 들은 일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아전이나 백성들의 작간이 아니라면 사실 바로잡기 어려운 점들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폐단을 과연 누가 만들어낸 것이며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이번의 정리사업은 아전들과 백성들을 크게 각성시키는 기회이다. 이것을 옛 규례대로 단단히 밝히지 않는다면 몇 해를 지나지 않아서 고을이 고을 노릇을 못하고 아전들과 백성들은 아마 없어지고 말 것이다. 호조와 선혜청에서 엄격히 신칙하여 바로잡을 것이며 다시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 좋겠다.” 라고 하였다.
    • 출전 : 『고종실록』 권7, 고종 7년 4월 17일 계축.
  • 1871년(고종 8) 3월 20일:여주의 강한사 등 47개 서원을 제외한 전국의 서원을 철폐함
    • 내용 : 예조(禮曹)에서 보고하기를, “한 사람에 한해 여러 군데 지은 서원을 헐어버리는 문제에 대해 두 차례에 걸쳐 내린 지시에 따라 신 조병창(趙秉昌)이 대원군(大院君) 앞에 들어가 문의한 결과 문묘(文廟)의 동쪽과 서쪽에 배향하는 여러 어진 선비들과 충성과 절개, 큰 의리를 남달리 뛰어나게 지킨 사람으로서 영원히 높이 모시는 데 실지로 부합되는 47개 서원을 제외하고는 다 제사를 그만두며 현판을 떼어내도록 지시를 받았습니다. 현판을 준 것으로서 계속 남겨두어야 할 곳은 47개의 서원입니다. 이제 별지에 써올려 비준이 내린 다음 각 도에 공문을 띄우겠습니다.” 라고 하였다【경기(京畿)에서는 개성(開城) 숭양서원(崇陽書院), 용인(龍仁) 심곡서원(深谷書院), 파주(坡州) 파산서원(坡山書院), 여주(驪州) 강한사(江漢祠), 강화(江華) 충렬사(忠烈祠), 광주(廣州) 현절사(顯節祠), 김포(金浦) 우저서원(牛渚書院), 포천(抱川) 용연서원(龍淵書院), 과천(果川) 사충서원(四忠書院), 양성(陽城) 덕봉서원(德峰書院), 과천(果川) 노강서원(鷺江書院), 고양(高陽) 기공사(紀功祠)이다. 충청도(忠淸道)에서는 연산(連山) 돈암서원(遯巖書院), 홍산(鴻山) 창렬사(彰烈祠), 청주(淸州) 표충사(表忠祠), 노성(魯城) 노강서원(魯岡書院), 충주(忠州) 충렬사(忠烈祠)이다. 전라도(全羅道)에서는 태인(泰仁) 무성서원(武城書院), 광주(光州) 포충사(褒忠祠), 장성(長城) 필암서원(筆巖書院)이다. 경상도(慶尙道)에서는 경주(慶州) 서악서원(西岳書院), 선산(善山)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咸陽) 남계서원(藍溪書院), 예안(禮安) 도산서원(陶山書院), 상주(尙州) 옥동서원(玉洞書院), 안동(安東) 병산서원(屛山書院), 순흥(順興) 소수서원(紹修書院), 현풍(玄風) 도봉서원(道峯書院),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 상주(尙州) 흥암서원(興巖書院), 동래(東萊) 충렬사(忠烈祠), 진주(晉州) 창렬사(彰烈祠), 고성(固城) 충렬사(忠烈祠), 거창(居昌) 포충사(褒忠祠)이다. 강원도(江原道)에서는 영월(寧越) 창절서원(彰節書院), 철원(鐵原) 포충사(褒忠祠), 금화(金化) 충렬서원(忠烈書院)이다. 황해도(黃海道)에서는 해주(海州) 청성묘(淸聖廟), 배천(白川) 문회서원(文會書院), 장연(長淵) 봉양서원(鳳陽書院)이다. 함경도(咸鏡道)에서는 북청(北靑) 노덕서원(老德書院)이고 평안도(平安道)에서는 영유(永柔) 삼충사(三忠祠), 안주(安州) 충민사(忠愍祠), 영변(寧邊) 수충사(酬忠祠), 평양(平壤) 무열사(武烈祠), 정주(定州) 표절사(表節祠)이다】.
    • 출전 : 『고종실록』 권8 고종 8년 3월 20일 경술.
  • 1873년(고종 10) 6월 24일:여주 대로사의 명칭을 강한사로 바꾸도록 함
    • 내용 : 예문관(藝文館)에서 임금이 현판을 써준 여주(驪州)에 있는 영의정(領議政) 벼슬을 추증받은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사당 현판 이름을 고칠 대안으로 강한(江漢), 동덕(同德), 경앙(景仰)을 제의(提議)하였는데, 강한으로 하도록 비준하였다.
    • 출전 : 『고종실록』 권10, 고종 10년 6월 24일 경자.
  • 1873년(고종 10) 9월 29일:여주 강한사에 향과 축문을 내리도록 함
    • 내용 : 예조(禮曹)에서 제의(提議)하기를, “여주목(驪州牧)의 강한사(江韓祠)에 현판을 다는 날은 오는 10월 12일로 받았다고 합니다. 제물은 본도에서 마련하게 하고 집사관(執事官)도 본도에서 임명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본조의 당하관(堂下官)이 사전에 향과 축문을 받아가지고 내려감으로써 현판을 달면서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승인하였다.
    • 출전 : 『고종실록』 권10, 고종 10년 9월 29일 갑술.
  • 1876년(고종 13) 5월 22일:판부사 홍순목의 계청으로 여주목의 전세미 등을 대납케 함
    • 내용 : 여주목(驪州牧)의 전세미(田稅米)와 콩 도합 900섬[石], 대동미(大同米)와 콩 도합 1,300섬은 모두 10년 동안 상정값으로 대신 바치고, 밭이 내로 되고 개펄로 떨어져나간 묵은 토지는 종전대로 재결(災結)로 잡아 면세(免稅)하라고 명하였다. 판부사(判府事) 홍순목(洪淳穆)이 입시(入侍)하였을 때 해당 목(牧)은 능침(陵寢)을 관리하는 곳이지만, 조세가 번잡하고 무거워서 아전(衙前)과 백성들이 모두 곤경에 처하였다고 보고하였기 때문이다
    • 출전 : 『고종실록』 권13, 고종 13년 5월 28일 정유 ; 『고종시대사』 1(1976, 국사편찬위원회), 886쪽.
  • 1879년(고종 16) 7월 29일:여주목 등에 휼전을 베풂
    • 내용 : 여주(驪州), 북청(北靑), 거제(巨濟) 등 고을에서 물에 떠내려갔거나 무너진 집과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 출전 : 『고종실록』 권16, 고종 16년 7월 29일 신축.
  • 1879년(고종 16) 9월 24일:여주 녕릉의 보수를 승인함
    • 내용 : 의정부(議政府)에서 제의하기를, “방금 녕릉보토당상관(寧陵補土堂上官)【여주목사(驪州牧使)】 홍순형(洪淳馨)의 장계(狀啓)를 보니 녕릉(寧陵) 구역 안의 사태가 나서 떨어져 나간 곳들을 고쳐짓는 비용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토록 할 것을 재가(裁可)하였습니다. 이전 규례를 상호 참고해서 선혜청(宣惠廳)의 돈 400냥(兩)을 떼어 보내어 그로 하여금 절약해서 쓰도록 하며 그 밖의 물자와 용역은 각 아문과 본도를 시켜 적당히 나눠보내고 공사를 완성하는 일을 곳곳에서 직접 맡아할 것을 엄하게 신칙(申飭)해서 알려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더니 승인하였다.
    • 출전 : 『고종실록』 권16, 고종 16년 9월 24일 갑.
  • 1879년(고종 16) 10월 29일:여주 녕릉 보수의 감동관 등을 포상함
    • 내용 : 녕릉(寧陵)을 보토(補土)할 때의 감동당상관(監董堂上官) 이하에게 차등있게 상을 주고 여주목사(驪州牧使) 홍순형(洪淳馨)은 품계를 올려주었다.
    • 출전 : 『고종실록』 권16, 고종 16년 10월 29일 무진.
  • 1880년(고종 17) 7월 21일:여주 양화진의 전세미가 불에 탐
    • 내용 : 의정부(議政府)에서 제의하기를, “지금 경기감사(京畿監司) 김보현(金輔鉉)의 보고를 보니, ‘이천부(利川府)의 조세를 바치는 포구창고가 여주(驪州) 길천면(吉川面) 양화진(楊花鎭)에 있는데, 전세미(田稅米) 366석(石)이 창고에 쌓여 있습니다. 창고 주변의 민가에서 화재가 일어나 연이어 창고 건물에까지 미치는 바람에 세미(稅米) 가운데서 123석(石)만 겨우 구해내고 243석(石)은 남김없이 타버렸으니, 지금 만약 현물로 바치도록 재촉한다면 형편상 장차 토지가 있는 백성에게 도로 징수시킬 것인데 궁한 백성들의 힘으로는 다시 마련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타버린 쌀 243석(石)은 특별히 상정 가격으로 쳐서 돈으로 대신 바치도록 허락해 줄 것입니다.’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영락된 고을에서 거듭 마련해 낸다는 것은 과연 시행할 수 없는 정사이니 청컨대 보고한 대로 시행하게 하기 바랍니다.” 라고 하니, 승인하였다.
    • 출전 : 『고종실록』 권17, 고종 17년 7월 21일 정혜.
  • 1882년(고종 19) 6월 11일:여주목사 민두호 등을 종친집사에 임명함
    • 내용 : 하교하기를, “영평군(永平君) 이경응(李景應), 완평군(完平君) 이승응(李昇應), 판종정경(判宗正卿) 이재면(李載冕), 춘천부사(春川府使) 이재완(李載完), 지종정경(知宗正卿) 이명응(李明應), 종정경(宗正卿) 이태응(李泰應)과 이재순(李載純), 화성판관(華城判官) 이상응(李商應), 이조참의(吏曹參議) 이재덕(李載德), 전 참의(前參議) 이재윤(李載允), 전 교관(前敎官) 이재극(李載克)과 이재구(李載九), 사용(司勇) 이재근(李載覲), 남녕위(南寧尉) 윤의선(尹宜善),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 행병조판서(行兵曹判書) 조영하(趙寧夏), 개성유수(開城留守) 조경하(趙敬夏), 호군(護軍) 김석진(金奭鎭), 경주부윤(慶州府尹) 김덕균(金德均), 호군(護軍) 윤용구(尹用求), 대교(待敎) 민영소(閔泳韶), 상호군(上護軍) 박제인(朴齊寅), 대호군(大護軍) 박제관(朴齊寬)과 김수현(金壽鉉), 조경호(趙慶鎬), 검교대교(檢校待敎) 조석구(趙晳九), 주서(注書) 조한국(趙漢國), 대호군(大護軍) 민영목(閔泳穆), 여주목사(驪州牧使) 민두호(閔斗鎬), 부호군(副護軍) 민영준(閔泳駿)은 모두 종친집사(宗親執事)로 임명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 출전 : 『고종실록』 권19, 고종 19년 6월 11일 을축.
  • 1882년(고종 19) 12월 22일:홍순목의 주청으로 여주의 조세를 10년 동안 대납하도록 함.
    • 내용 :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을 소견(召見)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여주(驪州)는 두 분의 능을 받들어 모시고 있는 곳으로서 양주(楊州)의 규례대로 조세 대신 돈으로 바치게 하였는데, 그 법이 시행된 지 오래되면서 간혹 본래 정한 곡물로 조세를 내게 하였기 때문에 끝내 완전한 판국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곳은 신이 조상 때부터 살아오던 고향이므로 백성들의 폐해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7년전에 가 있다가 돌아와서 아뢰어 기한을 두어 복구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작년에 다시 곡식으로 만들어 고을에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이번에 가서 흉년든 형편을 직접 보았는데 백성들의 정상은 대단히 불쌍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다시 10년 동안 돈으로 대납(代納)하게 함으로써 조정에서 돌보아주는 혜택을 베풀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 출전 : 『고종실록』 권19, 고종 12년 10월 22일 갑술.
  • 1885년(고종 22) 2월 27일:여주에서 민란 발생
    • 내용 :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금 경기감사(京畿監司) 심상훈(沈相薰)이 올린 장계(狀啓)를 보니 ‘여주목사(驪州牧使) 김영덕(金永悳)은 백성들의 소요와 관련하여 능침(陵寢)에 절기에 따라 지내는 제사[節祀]에 참가하지 않았으므로 할 수 없이 파면시켜 내쫓았으니, 그 죄상을 법사(法司)에서 품처(稟處)하도록 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여주(驪州)의 난민들이 도결(都結)을 혁파하고 본세(本稅)를 회복한 일로써 무리를 지어 몽둥이를 들고 관청 뜰에 뛰어드는 통에 마침내 민가가 파괴되고 사람이 불에 타죽기까지 하였습니다. 수령(守令)은 지방 백성들에 대하여 부모의 도리를 하여야 하는데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지 않고 감히 제멋대로 행패를 부리며 민가를 부수고 인명을 살해하여 누구도 어쩌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온 고을 백성들이 하자고 한 것이겠습니까? 필경 사단을 일으킨 큰 우두머리와 감추기 어려운 진상이 있을 것입니다. 수도 부근의 지방이 이처럼 한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을 다만 도(道)에서 조사하는 것으로 그만두게 할 수 없으니, 양주목사(楊州牧使) 윤성진(尹成鎭)을 안핵사(按覈使)로 임명하여 그 여주목(驪州牧)에 가서 구체적으로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곳 목사(牧使)가 도결(都結)을 없애고 본세(本稅)를 내게 한 것이 이미 제 마음대로 한 것이 아닌 이상, 이번에 뜻밖의 변란에 대하여 물론 전적으로 책임 지을 수는 없는 것이지만 체면상 놓고 볼 때 턱없이 용서하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통제사(統制使)에 참가하지 않은 것으로 하여 감사(監司)가 이미 파직시키고 잡아들일 것을 청한 조건에서 그 후임을 해당 조(曹)에서 각별히 잘 선발하여 임명하고 그 날로 내려 보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 출전 : 『고종실록』 권22, 고종 22년 2월 27일 정유 ; 『한국사연표』 1(1985, 역민사), 157쪽.
  • 1885년(고종 22) 3월 29일:의정부에서 여주민란에 대해 보고함
    • 내용 :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여주목 안핵사 윤성진(尹成鎭)의 조사본[査本]을 계하(啓下)하여 본 의정부(議政府)에 내려 보냈습니다. 이번에 조사할 것에 대한 이 명은 대체로 죄의 경중을 구분하여 처결하자는 데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민상(李敏庠)·박규호(朴圭浩)·조병선(曺秉善)·이병두(李秉斗)·곽승현(郭承鉉)·신필근(辛弼根)·경희(慶熙)는 이름이 지난 겨울의 통문(通文)에 죽 적혀있었고, 전 현감(前縣監) 조병직(趙秉稷)은 농상계(農桑契)의 무리들이 추대한 우두머리로서 통문을 보낸 사람들이 모두 그 집에 모였으니 실제로 물음에 대답할 장본인입니다. 그런데 이에 혹 서로 아는 사이 같기도 하다느니, 소요를 일으킬 줄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라느니 하는 등의 말을 가지고 미심스러운 것이 없다고 여기고 덮어둔 채 따지지 않았습니다. 더러는 조정 관리라고 하여 잡아다가 공술을 받을 것을 청하지 않았고, 더러는 또 소란을 피우기 쉽다고 하여 한 번 따져 묻고 돌려보냈는데 이런 것은 단지 엉성하고 구차하게 처리하였다고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퇴역 아전[退吏] 윤보길(尹甫吉)의 두 아우가 모두 죽은 것은 비참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이미 15가지 죄상이 백성들의 공술에서 나온 조건에서 만약 진짜 범죄가 있다면 응당 사형(死刑)에 처하여 여러 사람들의 말에 사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영(監營)의 죄수로서 옥에 갇혀있는데도 불구하고 조사하지 않았으니 일의 원칙으로 놓고 볼 때 매우 허술하고 잘못되었습니다. 해당 안핵사 윤성진(尹成鎭)을 처벌하여 파면시키는 형벌을 시행하며, 도망가서 아직 체포하지 못한 자는 감사(監司)가 4개의 진영(鎭營)과 해당 목사(牧使)에게 엄하게 신칙하여 기일을 정해놓고 기찰하여 체포하도록 하여 체포하여 온 뒤에는 다시 안핵사를 임명하여 해당 목(牧)에 급히 가서 신문하게 되어 있는 여러 사람들과 갇혀있는 윤 아전(尹衙前)을 철저히 신문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 감역(前監役) 박규호(朴圭浩)와 한용덕(韓用德), 현감(縣監) 조병직(趙秉稷)도 조사한 뒤에 모두 해당 의금부(義禁府)에서 잡아다가 처분하게 할 것입니다. 결세(結稅)의 일에 이르러서는 이제 막 도(道)에서 진달한 것과 관련하여 품계(稟啓)하여 공문을 띄웠으니 이것은 그대로 덮어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 출전 : 『고종실록』 권22, 고종 22년 3월 29일 무진.
  • 1885년(고종 22) 5월 6일:여주민란의 윤보길에 대해 형조에서 보고함
    • 내용 : 형조에서 여주(驪州) 양인(良人) 윤칠용(尹七龍)이 제 아버지 윤보길(尹甫吉)이 본 고을 백성들의 소요사건과 관련하여 지금 양주옥(楊州獄)에 갇혀있는데 즉시 감영(監營)에서 잡아 올려다가 명백히 다스리고 조사하게 해달라고 진달한 문제에 대하여 아뢰었다. 하교하기를, “윤보길(尹甫吉)의 범죄의 경중(輕重)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조사하지 않을 수 없으니 감사(監司)에게 엄하게 조사하고 신문하게 하되 만약 잡혀온 여러 범인들이 있으면 똑같이 신문해서 보고할 것에 대하여 분부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 출전 : 『고종실록』 권22, 고종 22년 5월 6일 갑진.
  • 1885년(고종 22) 6월 25일:여주민란의 윤보길에 대해 의정부에서 보고함
    • 내용 :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경기감사(京畿監司) 박제관(朴齊寬)의 보고문을 보니 이르기를, ‘형조(刑曹)에서 계하(啓下)받아 공문을 띄운 것과 관련하여 여주(驪州)의 퇴역 아전[退吏] 윤보길(尹甫吉)과 여러 죄인들을 자세히 신문하여 공술을 받았으니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하여주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온 고을의 모든 백성들이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을 품고 무리를 심지어 사단을 일으킨 것은 대체로 윤보길(尹甫吉)의 15가지 죄상에 기인됩니다. 하찮은 한 아전(衙前)이 온갖 방법으로 문건을 가지고 재간을 부리고 법을 가지고 농간을 부려 말썽을 가져오고 변란이 생기게 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성난 무리들이 억울한 마음을 풀기 위하여 그의 두 아우를 죽였으니 나라의 법을 가지고도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난민들의 고약한 행동이 통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그 자신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변란이 어떻게 생겼겠습니까. 첫째도 윤보길(尹甫吉) 때문이고 둘째도 윤보길 때문입니다. 더구나 모두들 죽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 이미 도(道)의 보고에 올라있고 나라법이 더없이 엄하다는 것을 그 자신도 알고 있는 이상 갇혀 있는 윤보길(尹甫吉)을 감사(監司)를 시켜 백성들을 많이 모아놓고 효수(梟首)하여 사람들을 경계시키도록 할 것입니다. 이병두(李秉斗)와 신필근(辛弼根)은 옥을 부수고 죄수들을 놓아준 내막을 모두 털어놓았습니다. 나쁜 일을 서로 도와주어 죄가 규율에 관계되는 만큼 다같이 형장을 엄하게 세 차례 쳐서 섬에 귀양보낼 것입니다. 경희(慶熙)는 과거(科擧)를 보았다고 하지만 핑계 대는 것을 가리우지 못하였습니다. 옥에 체포되어 와서 그 죄상이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큰 변란이 일어난 것에 대 하여 감히 모른다고 말하였으니 형장을 엄하게 두 차례 쳐서 멀리 귀양 보낼 것입니다. 통문(通文)을 돌릴 것을 주장한 이민상(李敏庠)·조병선(曺秉善)·곽승현(郭承鉉)은 모두 도망쳐서 감사(監司)가 지금 수색하여 체포하고 있으니 잡힌 뒤에 엄하게 조사하여 자복을 받은 다음 보고하고 법조문을 적용하게 할 것입니다. 전 현감(前縣監) 조병직(趙秉稷), 전 감역(前監役) 박규호(朴圭浩)·한용덕(韓用德)은 이전 제의에서 이미 잡아다가 죄를 지울 것을 청하였으며 여러 죄수들은 지금 이미 참작해서 처리하였으니 의금부(義禁府)에 분부하여 즉시 집행하게 할 것입니다. 안핵사를 임명해 보내는 것은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윤허하고 나서 하교하기를, “윤보길(尹甫吉)의 죄는 참으로 용서하기 곤란하니 어떻게 가볍게 처리할 수 있겠는가. 그 두 아우가 한꺼번에 죽은 것으로서도 물론 그의 죄를 가리울 수 없지만 그 정상을 따져보면 또한 슬픈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목숨을 용서하여 주어 한 번 엄하게 형장을 쳐서 멀고 험악한 곳으로 사형(死刑)을 낮추어 귀양 보낼 것이다.” 라고 하였다.
    • 출전 : 『고종실록』 권22, 고종 22년 6월 25일 임진.
  • 1886년(고종 23) 4월 7일:의정부에서 영·녕릉 보수에 대해 품의함
    • 내용 : 의정부(議政府)에서 제의하기를, “지금 보토당상관(補土堂上官)인 여주목사(驪州牧使) 김명규(金明圭)가 올린 장계(狀啓)를 보니 이러했습니다. ‘영릉(英陵)과 녕릉(寧陵) 구역 안의 떨어져나간 곳을 보수하는 데 드는 물자를 마련하여 뒤에 적었으니 묘당(廟堂)에서 지시를 받아 처리하게 하여주기 바랍니다. 1. 공사할 곳이 방대하므로 물자와 인건비로 돈 5,000냥을 떼 주어야 합니다. 1. 나무 말뚝 1,500개, 달고목(橽古木) 500개, 축말목(杻抹木) 4섬, 땔나무 150바리, 그물과 빈섬[空石] 2,000립을 각 고을에 나누어 바치도록 해야 합니다. 1. 철기계와 잡물들은 고을에서 빌려 쓸 것입니다.’ 보수하고 구축하는 공사가 중대한 만큼 거기에 드는 수량을 빨리 해결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전례를 참작해서 선혜청(宣惠廳)의 돈 2,500냥을 떼 주어 아껴 쓰면서 운영하고 나머지는 도처에서 재간껏 준비하여 빨리 공사를 완공하게 할 것입니다. 목물(木物)과 공석(空石)을 각 고을에 나누어 준비시키며 기계 같은 물건은 본 여주목(驪州牧)에서 편리할 대로 빌려 쓰도록 지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승인하였다.
    • 출전 : 『고종실록』 권23, 고종 23년 4월 7일 경오.
  • 1887년(고종 24) 9월 5일:예조에서 영·녕릉의 관리에 대해 품의함
    • 내용 : 예조(禮曹)에서 제의하기를, “지금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의 관리가 보고한 것을 보니 본 능의 능구역 안에 떨어져 나간 곳이 많다고 합니다. 보수하는 문제를 조금도 늦출 수 없는 만큼 전례대로 지방 관리인 여주목사(驪州牧使)를 시켜 자세하게 살펴보고 보고하게 한 뒤에 지시를 받아 처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하니, 승인하였다.
    • 출전 : 『고종실록』 권24, 고종 24년 9월 5일 기미.
  • 1887년(고종 24) 10월 29일:여주와 포천 대동소미의 대납을 3년 연기함
    • 내용 : 여주(驪州)와 포천(抱川) 두 고을에서 대동(大同) 소미(小米)를 상정가(詳定價)로 쳐서 대납하게 했었는데 기한이 다되었으니 특별히 3년간 기한을 연기하여 주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감사(監司)가 장계(狀啓)를 올린 것과 관련하여 의정부(議政府)에서 회답 제의했기 때문이다.
    • 출전 : 『고종실록』 권24, 고종 24년 10월 29일 임자.
  • 1888년(고종 25) 11월 20일:여주목사 홍우경에게 가자함
    • 내용 : 영릉(英陵), 녕릉(寧陵)에 흙을 더 씌울 때 일을 감독한 당상관(堂上官) 이하와 강화도(江華道)의 선원각(璿源閣)을 수리할 때와 신라 미추왕(味鄒王), 경순왕(敬順王)의 전각을 세울 때 감독한 관리 이하, 친군남영(親軍南營)의 장관 이하에게 다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여주목사(驪州牧使) 홍우경(洪祐慶)에게는 품계를 올려 주었다.
    • 출전 : 『고종실록』 권25, 고종 25년 11월 20일 정묘.
  • 1890년(고종 27) 7월 26일:여주의 대동미를 다시 대납하게 함
    • 내용 : 의정부(議政府)에서 제의하기를, “이제 경기감사(京畿監司) 이헌직(李憲稙)이 보고한 것을 보니, 여주목사(驪州牧使) 김가진(金嘉鎭)이 보낸 공문을 일일이 들어 말하기를 본 주(州)는 여러 가지 일과 공사가 다른 고을에 비하여 많기때문에 대동법(大同法)에 의한 조세(租稅)를 이미 상정 가격으로 쳐서 돈으로 바치게 했는데, 이제 그 기한이 차게 되니 백성들이 어찌할 줄 몰라 하므로 3년을 기한하고 다시 상정 가격으로 쳐서 돈으로 바치게 하여 달라고 했습니다. 정공(正供)에 대한 문제를 요청하는 대로 그대로 승인하는 것은 일의 원칙으로 보아 매우 신중하게 해야 할 일이지만, 본 주(州)는 다른 곳에 비해 유별하고 백성들의 힘이 아직도 많이 피지 못했으니, 다시 3년을 기한하고 상정가(詳定價)로 쳐서 돈으로 바치게 하여, 극진히 염려하는 조정의 혜택을 보여주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하니, 승인하였다.
    • 출전 : 『고종실록』 권27, 고종 27년 7월 26일 갑오.
  • 1892년(고종 29) 5월 6일:의정부에서 영릉 등에 사태가 난 곳을 보고함
    • 내용 : 의정부(議政府)에서 제의하기를, “여주목사(驪州牧使) 이호면(李鎬冕)이 올린 보고에 의하면 영릉(英陵), 영릉(寧陵) 구역 내의 사태(沙汰)가 난 곳들을 수축하는 데 쓸 물자에 대해 안을 세워 다음의 기록과 같이 올리면서 그대로 획급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1. 공사할 곳이 방대하므로 물자와 함께 돈 9,000냥[兩]을 획급해 주는 문제. 1. 빈 가마니[石] 8,000장[立]을 각 고을에 배정하는 문제. 1. 말뚝(抹木) 5,000개와 참나무 말뚝 10석(石), 굵은 섶나무 400바리[駄], 마른 박달나무 700개를 각 고을에 배정하는 문제. 1. 쇠로 만든 기계와 여러 가지 물건은 고을에서 세(貰)를 내어 사용하는 문제. 1. 지관(地官)과 시관(時官)을 해당 관청에서 선정하여 보내는 문제들입니다. 공사를 시작한 날은 이미 받았으니 거기에 소용되는 물자를 응당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의한 것을 보면 너무 많은 것 같으니 선혜청(宣惠廳)에서 돈 2,000냥[兩] 정도 획급하되 될수록 견고하게 쌓도록 할 것입니다. 목재와 빈 가마니를 각 고을에서 갖추게 하고 기계를 편리한 대로 세를 내어 쓰게 하는 문제는 지나간 관례대로 시행하며 지관(地官)와 시관(時官)은 각각 해당 관청에 분부하여 선정하여 보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승인하였다.
    • 출전 : 『고종실록』 권29, 고종 29년 5월 26일 계해.
  • 1894년(고종 31) 11월 15일:양호도순무영에서 보고한 여주지역 동학의 양상
    • 내용 : 양호도순무영(兩湖都巡撫營)에서 보고하기를, “소모관(召募官)인 지평현감(砥平縣監) 맹영재(孟英在)의 보고에 의하면, ‘비적(匪賊)의 괴수 신재규(辛載奎)와 정사원(鄭士元) 두 놈은 바로 유명한 자인데 본 현의 진사(進士) 서병승(徐丙升)과 유학(幼學) 유덕준(兪德濬)이 수단을 써서 잡아 바쳤으며, 양근(楊根)의 비적 괴수 이풍구와 따라다닌 윤창근(尹昌根), 윤복성(尹福星)과 여주(驪州)의 비적 한석룡(韓錫龍)은 각각 해당 현(縣)에서 의병들이 잡아 바쳤기 때문에 모두 죽였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어 교도소영관(敎導所領官) 이진호(李軫鎬)의 보고에 의하면, ‘대관(隊官) 이겸제(李謙濟)는 일본(日本) 군사와 함께 정탐하다가 옥천(沃川) 지방에서 비적의 접주(接主) 정원준(鄭元俊)을 붙잡아 쏘아 죽였으며, 탄환 20말[斗], 총 150자루, 환도(環刀) 100자루, 쇠창과 대창 도합 600자루를 노획하였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하여 보고합니다.” 라고 하였다.
    • 출전 : 『고종실록』 권32, 고종 31년 11월 15일 정해.
  • 1895년(고종 32) 5월 26일:23부제의 시행에 따라 충주부 여주군을 설치함
    • 내용 : 하교하기를, “내가 나라가 새롭게 됨을 당하여 실지 혜택을 백성들에게 베풀자고 하니 나의 말을 명심하여 들을 것이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으로서 근본이 든든해야 나라가 편안해 지는데 백성을 보존하는 방도는 정사를 하는 관리들에게 달려 있다. 우리 왕조의 지방 제도가 완전히 좋은 것이 못되다 보니 주(州), 현(縣)이 일정하지 못하고 필요 없는 관리가 많아서 가혹한 세금을 거듭 거두는 폐해가 백 가지로 나오는 통에 위의 은혜가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고 백성들의 실정이 위에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 아, 거문고와 비파가 조화되지 않으면 다시 뜯어고쳐야 하는 만큼 정사하는 도리는 때에 따라서 알맞게 해야 한다. 이제 감사(監司), 유수(留守) 등 낡은 제도를 없애고 부(府)와 군(郡)의 새 규정을 정하여 폐단의 근원을 막아버림으로써 만백성과 함께 태평한 복을 누리려고 하니 너희들 모든 관리와 백성은 나의 뜻을 체득할 것이다.” 칙령(勅令) 제97호 「감영(監營), 안무영(按撫營)과 유수(留守)를 폐지할 데 대하여」를 비준하여 반포하였으며 칙령 제98호 「지방 제도의 개정에 대하여」를 비준하여 반포하였다.

      지방 제도

      제1조. 전국을 23부(府)의 행정 구역으로 나누어 아래에 열거하는 각 부를 둔다. 한성부(漢城府), 인천부(仁川府), 충주부(忠州府), 홍주부(洪州府), 공주부(公州府), 전주부(全州府), 남원부(南原府), 나주부(羅州府), 제주부(濟州府), 진주부(晉州府), 동래부(東萊府), 대구부(大邱府), 안동부(安東府), 강릉부(江陵府), 춘천부(春川府), 개성부(開城府), 해주부(海州府), 평양부(平壤府), 의주부(義州府), 강계부(江界府), 함흥부(咸興府), 갑산부(甲山府), 경성부(鏡城府)

      제2조. 앞 조항 외에는 종래의 목(牧), 부(府), 군(郡), 현(縣)의 명칭과 부윤(府尹),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서윤(庶尹), 판관(判官), 현령(縣令), 현감(縣監)의 관직 명칭을 다 없애고, 고을의 명칭을 군(郡)이라고 하며 읍(邑)의 장관의 벼슬 이름을 군수(郡守)라고 한다.

      제3조. 각 부의 관할 구역은 아래와 같다.

      • 한성부:한성군(漢城郡), 양주군(楊州郡), 광주군(廣州郡), 적성군(積城郡), 포천군(抱川郡), 영평군(永平郡), 가평군(加平郡), 연천군(連川郡), 고양군(高陽郡), 파주군(坡州郡), 교하군(交河郡)
      • 인천부:인천군(仁川郡), 김포군(金浦郡), 부평군(富平郡), 양천군(陽川郡), 시흥군 (始興郡), 안산군(安山郡), 과천군(果川郡), 수원군(水原郡), 남양군(南陽郡), 강화군(江華郡), 교동군(喬桐郡), 통진군(通津郡)
      • 충주부:충주군(忠州郡), 음성군(陰城郡), 연풍군(延豊郡), 괴산군(槐山郡), 제천군(堤川郡), 청풍군(淸風郡), 영춘군(永春郡), 단양군(丹陽郡), 진천군(鎭川郡), 청안군(淸安郡), 여주군(驪州郡), 용인군(龍仁郡), 죽산군(竹山郡), 음죽군(陰竹郡), 이천군(利川郡), 양지군(陽智郡), 원주군(原州郡), 정선군(旌善郡), 평창군(平昌郡), 영월군(寧越郡)

      제4조. 각부 관청의 위치는 다음과 같다.

      -한성부【한성】, 인천부【인천 제물포】, 충주부【충주】, 홍주부【홍주】, 공주부【공주】, 전주부【전주】, 남원부【남원】, 나주부【나주】, 제주부【제주】, 진주부【진주】, 동래부【동래 부산】, 대구부【대구】, 안동부【안동】, 강릉부【강릉】, 춘천부【춘천】, 개성부【개성】, 해주부【해주】, 평양부【평양】, 의주부【의주】, 강계부【강계】, 함흥부【함흥】, 갑산부【갑산】, 경성부【경성】

      부칙(附則)

      제5조. 본 칙령은 개국(開國) 504년 윤(閏)5월 1일부터 시행한다.

      제6조. 본 칙령을 시행하는 날에 현임 부윤(府尹),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서윤(庶尹), 판관(判官), 현령(縣令), 현감(縣監)의 관직에 있는 자는 따로 임명하지 않아도 본 칙령에 의하여 각기 그 군(郡)의 군수로 된다.

    • 출전 : 『고종실록』 권33, 고종 32년 5월 26일 병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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