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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 1724년(영조 원년):조태억이 민진원을 중도 부처하는 것 등에 관해 아룀
    • 내용 : 조태억이 또 이르기를, “…… 듣건대 부부인(府夫人)이 지금 여주(驪州)에 있다 하는데, 만약 민진원을 양이(量移)하여 충주(忠州)·제천(堤川) 등지로 중도 부처(中道付處)한다면 모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2, 영조 원년 11월 17일 정사.
  • 1725년(영조 1년):윤급의 복과를 등에 관한 헌납 채응복의 상소문
    • 내용 : 헌납(獻納) 채응복(蔡膺福)이 상소하였는데, …… 또 말하기를, “근년에는 8도(八道)에 거듭 흉년(凶年)이 들자 양민(良民)이 도둑이 되어 심지어는 일산을 펼쳐들고 불러대며 재물로써 사람을 죽여 쓰러뜨리는 자가 있으니, 여주(驪州)·양근(陽根) 등 고을이 더욱 그 해(害)를 입고 있습니다. 마땅히 별도로 위풍과 무력이 있는 원[倅]을 뽑아서 날렵하게 체포하는 임무를 맡겨주소서.”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8, 영조 1년 11월 8일 임인.
  • 1727년(영조 3년):사간 이근이 여주목사 조수의 파직을 상소
    • 내용 : 사간 이근(李根)이 상소하여 군덕(君德)과 시폐(時弊)에 관하여 논하고, 또 논하기를, “재령군수(載寧郡守) 최유태(崔裕泰)는 탐욕스럽고 포학하여 외람하게 사람을 죽이는 죄를 저질렀으니, 유사(攸司)로 하여금 감안하여 처단하도록 하고, 여주목사(驪州牧使) 조수(趙脩)는 망령되고 패리(悖理)한 짓을 했으니,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11, 영조 3년 3월 27일 갑인.
  • 1727년(영조 3년):조태억이 전 여주목사 이헌의 부정에 대해 상언함
    • 내용 : 조태억이 말하기를, “이헌(李瀗)이 여주목사(驪州牧使)로 있을 적에 실어가지고 온 8백 석(石)의 쌀은 끝내 간 곳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로 두라. 정우관(鄭宇寬)의 일은 물을 필요가 없다. 명자(名字)도 상세히 말하지 못하는 사람인데 따질 것이 뭐 있겠는가? 그대로 두라.”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13, 영조 3년 10월 6일 무자.
  • 1728년(영조 4년):역적 안익태·안박 공초
    • 내용 : 안익태를 문초하니, 안익태가 공초하기를, “…… 신이 다시 정관빈을 만나 의논했더니, 정관빈이 말하기를, ‘적의 무리가 떠나기를 기다렸다가 너와 함께 여주(驪州)로 가 홍상(洪相)을 만나 말하자’ 하기에 신 역시 그렇게 서로 약속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적도들이 매양 그 무리로 끌어들이고자 하여 안박이 또 신을 보고 말하기를, ‘왜 모임에 오지 않는가?’ 하였습니다. ……”
    • 출전 : 『英祖實錄』 권16, 영조 4년 3월 17일 丁卯.
  • 1728년(영조 4년):판중추부사 홍치중이 여주로부터 입조하니 위유함
    • 내용 :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홍치중(洪致中)이 여주(驪州)로부터 입조(入朝)하니, 임금이 인견하고 위유(慰諭)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여주와 이천(利川)은 평소 도적이 많고 지금 사민(士民)들이 흩어져 옮기는 자가 많으니, 청컨대 무신(武臣)을 가려 보내게 하소서.”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16, 영조 4년 3월 18일 무진.
  • 1728년(영조 4년):이행검을 여주 목사에 제수함
    • 내용 : 유척기(兪拓基)를 양주목사(楊州牧使)로, 이행검(李行儉)을 여주목사(驪州牧使)로, 영남 사람 전(前) 참의(參議) 이형상(李衡祥)을 발탁하여 가선(嘉善) 자급으로 하고, 전(前) 응교(應敎) 조덕린(趙德隣)을 통정(通政) 자급으로 하여 아울러 경상도소모사(慶尙道召募使)로 삼았다.
    • 출전 : 『英祖實錄』 권16, 영조 4년 3월 19일 기사.
  • 1728년(영조 4년):여주목사 정우주를 체직함
    • 내용 : 박사수(朴師洙)를 영남안무사(嶺南按撫使)로 삼았다. …… 박사수는 청하기를, “오중주(吳重周)와 유성추(柳星樞)를 불러 쓰게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여주목사(驪州牧使) 정우주(鄭宇柱)는 실지(失志)한 사람으로 바야흐로 여주에 머물고 있었는데,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상유(上游)는 중요한 지역이니 이런 사람에게 맡길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체직하라 명하고, 이행검으로 대신 명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16, 영조 4년 3월 19일 기사.
  • 1728년(영조 4년):권혁이 여주에서의 죄인 호송·남태징의 일을 아룀
    • 내용 : 정언(正言) 권혁(權爀)이 상소하기를, “금랑(禁郞)이 여주(驪州)에서 죄인을 붙잡아 오는데 호송하는 군졸이 하나도 없고, 죄인 역시 낭두(囊頭)를 하지 않고 밤에는 칼[枷]을 풀어주어 도망하게 했으니, 금랑과 나졸은 국문해야 마땅하며, 이천부사(利川府使) 강세윤(姜世胤) 역시 나포해 국문해야 마땅합니다.”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16, 영조 4년 3월 22일 임신.
  • 1728년(영조 4년):김동필이 여주목사 이행검 등을 자신의 절제를 받도록 하자고 장계함
    • 내용 : 남한순무사(南漢巡撫使) 김동필(金東弼)이 장계하기를, “…… 바라건대, 유척기에게 명하여 미음강(渼陰江)으로 옮겨 방어하게 하고, 춘천방어사(春川防禦使) 정도원(鄭道元), 여주목사(驪州牧使) 이행검(李行儉)도 모두 신의 절제를 받도록 명하여 유척기와 함께 협력해 방수(防守)하게 하소서.”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16, 영조 4년 3월 23일 계유.
  • 1728년(영조 4년):윤천경의 공초 기사
    • 내용 : 정국(庭鞫)하여 윤천경(尹天擎)을 문초하니, 윤천경이 공초하기를, “…… 여주(驪州) 사람 신윤조(辛胤祖)와 일찍부터 서로 알고 지냈는데, 이번에 갑자기 와서 말하기를, ‘이번 소란에 경상 감사(慶尙監司) 황선(黃璿)이 적에게 참살(斬殺)당했다는 말이 있는데, 과연 그러한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어찌 이런 괴이한 말을 하는가?’ 하니, ……”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16, 영조 4년 3월 24일 갑술.
  • 1728년(영조 4년):이사성의 공술
    • 내용 : 역적 이사성(李思晟)이 붙잡혀 서울에 왔다. …… 이사성에서 낙형(烙刑)으로 위세를 보이니, 이사성이 공초하기를, “전년 6월 사이에 신이 박필현 및 한세홍과 함께 묵동(墨洞) 박필현의 서제(庶弟) 박만호(朴萬戶)의 집에서 회의를 하였습니다. 한세홍이 말하기를, ‘여주(驪州)·이천(利川)·광주(廣州)의 친구로 함께 모의하는 자가 10여 인이다’ 하였는데, 그때 혹 그 성만 말하고 그 이름은 말하지 않았으니, 대개 상의할 때에는 각기 친한 자가 있으나 그 사람과 친하다고 남에게 언급하지 않는 것은 후일 일이 혹 누설되어도 대질(對質)할 증빙이나 증거를 없애려는 계책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10여 인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16, 영조 4년 3월 25일 을해.
  • 1728년(영조 4년):정조윤·곽중희의 공초
    • 내용 : 죄인 정조윤(鄭祚胤)을 문초하니, 정조윤이 공초하기를, “…… 신이 죽산(竹山)에 가서 동병(動兵)하는 상황을 보고는 놀라움을 이기지 못해 밤중에 도주하면서 가죽 주머니를 훔쳐 가지고 와 여주(驪州) 관아에 고했습니다. 이인좌(李麟佐)가 그 무리 가운데서 가장 낫기 때문에 대원수(大元帥)로 삼고, 최경우(崔擎宇)는 상인(喪人)으로서 우장군(右將軍)이 되었습니다.”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16, 영조 4년 3월 26일 병자.
  • 1728년(영조 4년):탕춘대·여주 등지의 군사를 파함
    • 내용 : 탕춘대(蕩春臺)에 유둔(留屯)해 있는 군사와 여주(驪州)·춘천(春川) 등 여러 고을의 군사를 파해 보내라 명하였으니, 군사를 줄이고자 한 까닭이었다.
    • 출전 : 『英祖實錄』 권16, 영조 4년 3월 28일 무인.
  • 1728년(영조 4년):안익태의 공초 기사
    • 내용 : 안익태가 공초하기를, “…… 신이 정관빈의 집에 이르러 이를 말하니, 정관빈이 말하기를, ‘조금 전에 안헌장(安獻章)도 또한 와서 말하였는데, 그대의 말과 같았으니, 나와 함께 여주(驪州)의 홍정승(洪政丞) 집으로 가서 이를 고하자’고 하기에, 신은 대답하기를, ‘여주는 길이 멀으니, 수원부(水原府)에 고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정관빈이 말하기를, ‘13일에 마땅히 함께 가야 한다’고 하기에, 신이 집에 돌아가 가속(家屬)을 처치(處置)한 뒤에 나아갔더니, 정관빈이 먼저 가버렸으므로, 신은 미처 동행(同行)하지 못하였습니다. 정상(情狀)을 앎이 실지대로입니다.”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17, 영조 4년 4월 1일 신사.
  • 1728년(영조 4년):여주 거주 죄인 이정·조상을 신문하였으나 모두 불복함
    • 내용 : 정국(庭鞫)에서 이정(李檉)과 조상(趙鏛)을 신문하였으나, 모두 불복(不服)하였다. 처음에 금부도사(禁府都事)가 조상을 잡으려 여주(驪州)의 조상의 집으로 갔는데, 조상이 이미 도망갔으므로, 조상의 형을 잡아 가지고 오다가 중로(中路)에서 또 잃어버리게 되었다. 금부도사가 다시 여주로 가서 조상의 뒤를 밟아 찾았으나 능히 찾아내지 못하고 조상의 아이종을 찾아내어 결박하고 물으니, 종이 ‘조상이 깊은 산골짜기 속으로 들어갔으나 있는 곳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으므로, 그 종을 잡아 가지고 함께 가서 두루 산골짝 속을 뒤졌는데, 갑자기 말 한 필이 골짜기 속에서 나왔으므로, 종이 ‘이것이 조상의 타는 말이다’고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17, 영조 4년 4월 2일 임오.
  • 1728년(영조 4년):여주에 낙향했던 윤휴 관련 기사
    • 내용 : 대사간(大司諫)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역적 윤휴(尹携)의 자손으로서 여주(驪州)에 있는 자가 변란(變亂)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철가(撤家)하여 도피해 숨었으니, 형적(形跡)이 수상한 데 속하며, 또 듣건대, 이인좌가 또 역적 윤휴의 손서(孫壻)라고 하니, 청컨대 해부(該府)로 하여금 조사해 내어 절도(絶島)에 정배(定配)케 하소서.”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17, 영조 4년 4월 9일 기축.
  • 1728년(영조 4년):신효조의 공초 기사
    • 내용 : 신효조(辛孝祖)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 정읍 현감(井邑縣監) 목중형(睦重衡)은 반역을 도모할 뜻이 있었고 그의 계자(繼子)로서 아명(兒名)이 광원(光遠)인 자가 여주(驪州)에 있었는데, 그 생부(生父)는 곧 목천제(睦天齊)로서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사성(李思晟)과 난만(爛慢)하게 서로 의논하였으며, 적변(賊變)이 일어난 뒤에 목광원은 그 아비가 호남의 역적의 대장(大將)이 되었음을 듣고 서울로 올라오다가 정읍(井邑)으로 내려가 중도(中道)에서 돌아왔습니다. ……”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17, 영조 4년 4월 13일 계사.
  • 1728년(영조 4년):조세추의 공초 기사
    • 내용 : 조세추(曹世樞)를 신문(訊問)하였다. …… 조세추가 공초(供招)하기를, “…… 신석영(申錫永)은 여주(驪州)에 사는데 우윤(右尹)을 지내다가 귀양 가서 죽은 사람의 아들입니다. 이 사람과 동작(銅雀) 나루에 살다가 문경으로 이사를 간 이세주(李世舟)란 사람도 그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17, 영조 4년 4월 16일 병신.
  • 1728년(영조 4년):이윤행의 공초 기사
    • 내용 : 이윤행(李允幸)을 신문하여 한 차례 형신하니, 이윤행(李允幸)이 공초(供招)하기를, “지난해 12월 한세홍(韓世弘)이 와서 문경(聞慶) 선교(船郊)의 보(洑)를 축조하는 데 대한 성사(成事) 여부를 점치고, 이어 말하기를, ‘변산(邊山)의 적도가 매우 성대한데 이현좌(梨玄佐)와 여주(驪州)의 한가(韓哥) 등이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17, 영조 4년 4월 24일 갑진.
  • 1728년(영조 4년):이사로와 임환을 대질시킴
    • 내용 :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친국(親鞫)하였다. 이사로(李師魯)·임환(任環)을 대질(對質)시켰다. 임환이 말하기를, “…… 사자(士子) 1,000여명이 처음에 큰 절에서 모이고 다시 산속에서 모인 것은 대개 3월 13, 14일인데, ‘보름 이전에 호남 군사가 서방에 응하여 일어나고, 민관효(閔觀孝) 등의 이천(利川)·여주(驪州) 군사가 중간에서 일어나고, 성안이 소란하면 이유익·남태징이 이때에 군사를 거느리고 성안을 소탕할 것이니, 일이 쉬울 것이다.’라고 약속하였습니다. ……”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18, 영조 4년 5월 1일 신해.
  • 1728년(영조 4년):조동규가 무고임을 자복하게 하고 비로소 참형에 처함
    • 내용 :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친국(親鞫)하였다. 조동규(趙東奎)를 다시 추문(推問)하였는데, 다섯 차례 형신(刑訊)하니, 조동규가 공초(供招)하기를, “…… 신이 신의 형에게 말하기를, 적이 패하면 우리도 살 수 없을 것이니, 여주(驪州)에 군사를 출동시킬 때에 급히 알리면 필마(匹馬)로 가서 종사관(從事官)이 되겠다’ 하였습니다. ……”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18, 영조 4년 5월 9일 기미.
  • 1728년(영조 4년):박필상과 신효조를 대질시킴
    • 내용 : 박필상(朴弼祥)과 신효조(辛孝祖)를 대질(對質)시켰다. 신효조가 말하기를, “3월 13일 늦게서야 네가 와서 말하기를, ‘여주(驪州)·이천(利川)은 시끄러운 근본이다. 이천의 정가(鄭哥)가 갑자기 달아나 간 곳을 모르므로 죽었으리라고 생각하였더니, 봄에야 비로소 와서 말하기를, 「내가 영남청룡대장(嶺南靑龍大將)이 되었는데, 대장 12원(員) 가운데에서 제1장(第一將)은 정가이고 제2장은 박필현(朴弼顯)이고 내가 제6장이다. 호남 대장(湖南大將)은 배를 타고 순풍을 만나 곧바로 강화(江華)로 향하고 지평(砥平) 군사는 남한(南漢)으로 나아갔다」 하더라’ 하였다. 이렇게 시끄러운 일을 네가 어찌 나에게 전하지 않았겠는가?”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18, 영조 4년 5월 12일 임술.
  • 1728년(영조 4년):민백효의 공초 기사
    • 내용 :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친국(親鞫)하였다. 민백효(閔百孝)를 다시 추문(推問)하였는데, 세 차례 형신(刑訊)하니, 민백효가 공초(供招)하기를, “…… 신이 재작년 봄에 여주(驪州)에 가서 청심루(淸心樓)에 앉아 있는데 임서호(任瑞虎)가 그 제자 안귀만(安龜萬)을 보내어 말을 전하기를, ‘어찌하면 서로 만나겠는가?’ 하기에, 신이 안귀만에게 말하기를, ‘영남(嶺南) 군사가 크게 일어나려 하는데, 이인좌(李麟佐)는 본디 일을 좋아하는 무리이고 또 임서호와 공을 다투려는 마음을 가졌고 또 그 대장(大將)을 다투므로 반드시 저해하려 할 것이니, 그대가 모름지기 한세홍에게 말하여 중간에 들어 조정하는 바탕을 만들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18, 영조 4년 5월 16일 병인.
  • 1728년(영조 4년):박필상의 공초 기사
    • 내용 : 박필상(朴弼祥)을 다시 추문(推問)하였다. 한 차례 형신(刑訊)하니, 박필상이 공초(供招)하기를, “…… 정조윤이 말하기를, ‘군관은 필연코 달아났을 것이다. 목중형(睦重衡)이 15일까지 판교(板橋)에 와서 모여야 할 것인데 오지 않았다. 두 사람이 약속하였는데 다 오지 않으니, 우리들은 청주로 가야 하겠다’ 하였습니다. 11일 밤에 적들이 청주로 가려 하는데, 신은 그 꾀를 알고 달아나 여주(驪州)로 돌아왔습니다. 반역을 꾀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18, 영조 4년 5월 16일 병인.
  • 1728년(영조 4년):조일규의 공초 기사
    • 내용 : 조일규(趙一奎)를 두 차례 형신(刑訊)하니, 조일규가 공초(供招)하기를, “…… 또 말하기를, ‘적들이 혹 여주(驪州)에 두루 미칠는지 모르니, 너희들은 일찍 원주(原州)로 피란하라’ 하기에, 신이 듣고 놀라서 곧 방에 들어가 조덕규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 내가 관가에 고하겠다.’ 하니, 조덕규가 크게 노하여 목침으로 신을 때렸습니다. 이튿날 새벽에 조덕규는 이미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정상을 안 것은 사실입니다.” 하였다. 법대로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18, 영조 4년 6월 4일 계미.
  • 1728년(영조 4):조형규의 공초 기사
    • 내용 : 조형규(趙亨奎)를 세 차례 형신(刑訊)하니, 조형규가 공초(供招)하기를, “조덕규(趙德奎)가 한세홍(韓世弘)의 무리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표목(標目)을 만들어 아무개는 쓸 만하고 아무개는 쓸 만하지 못하다 하였는데, 번번이 임서호(任瑞虎)를 쓸 만하다 하였고, 경중(京中)은 이유익(李有翼)을 주인(主人)으로 삼고 민원보(閔元普)도 넣었으며, 여주(驪州)의 정석진(丁錫震)과 원주(原州)의 한덕징(韓德徵)과 신의 형 조관규(朝觀奎)·조덕규를 한세홍이 다 쓸 만하다 하였습니다. ……”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18, 영조 4년 6월 16일 을미.
  • 1728년(영조 4):영릉에 전알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간쟁으로 그침
    • 내용 : 임금이 장차 영릉(寧陵)에 전알(展謁)하려 하였는데, 신하들이 여러 번 간쟁(諫諍)하니 그만두고 내년 2월에 다시 품정(稟定)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임금이 장차 능에 전알하려 하였는데 능은 여주(驪州)에 있어 서울에 떨어진 것이 2일정(日程)이나 되므로, 대신(大臣)이 말하기를, “큰 변란이 겨우 평정되고 백성이 홍수에 손상되었으니, 군민을 노동시켜 먼 능에 거둥하실 수 없겠습니다.”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19, 영조 4년 8월 7일 을유.
  • 1728년(영조 4):역적 박필몽·이명의·이진유 등의 죄상에 대해 헌부에서 아룀
    • 내용 : 헌부(憲府)【지평(持平) 정익하(鄭益河)이다】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 역적 조상(趙鏛)·조관규(趙觀奎) 등은 동당(同堂)인 지친(至親)이며 여주(驪州) 읍촌(邑村)에 뿌리박고 사는데 남에게 지목받는 무리이니, 민암(閔黯)의 형제 자손의 전례에 따라 모두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소서.”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19, 영조 4년 8월 7일 을유.
  • 1729년(영조 5년):전 여주목사 이행검이 봉수가 역변을 보고하지 않은 점을 아룀
    • 내용 :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강(講)이 끝나자, 무신(武臣) 이행검(李行儉)이 아뢰기를, “지난 봄 역변(逆變)이 있을 적에 봉수(烽燧)가 하나도 역변을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그때 여주목사(驪州牧使)로서 죽산(竹山)의 영장(營將)에 임시로 차임되어 죽산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적도(賊徒)들이 경내(境內)에 가득했건만 본읍(本邑)에서 봉화를 올리는 것은 평상시와 같았기 때문에 신이 봉군(烽軍)을 불러서 힐문(詰問)해 보고는 그에 대한 법문(法文)을 강하고서 교습(敎習)시킨 다음 보냈습니다만, 다른 봉대(烽臺)에서는 끝내 향응(嚮應)하지 않았습니다. 각도(各道)에 신칙시켜 법문을 강하고 교습시키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22, 영조 5년 4월 12일 병술.
  • 1729년(영조 5년):여주 출신 전 제천현감 정석을 모역으로 무함한 이석효를 친국함
    • 내용 : 임금이 이석효(李錫孝)를 친국(親鞫)하였다. 이석효는 제천(堤川) 사람으로 여주(驪州) 민세철(閔世哲)의 집에 왔는데, 주머니 속에 역적의 글이 있으므로, 민세철이 목사(牧使) 박황(朴璜)에게 고발하고, 박황은 감사(監司) 조최수(趙最壽)에게 신보(申報)하니, 조최수가 계문(啓聞)했었다. …… 이석효가 그의 사촌(四寸) 이석형(李錫衡)을 끌어대었으므로, 이석형을 체포하여 이석효와 면질(面質)하도록 명한 다음에 면질한 문안을 불태우도록 명하였다. 여주 목사 박황을 추고(推考)하도록 명하였으니, 이석효를 올려 보낼 때에 민세철을 함께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출전 : 『英祖實錄』 권23, 영조 5년 8월 5일 정미.
  • 1729년(영조 5년):사간원에서 이석효를 고발한 민세철과 이일을 지체한 여주목사를 탄핵함
    • 내용 : 사간원【헌납 김상성(金尙星)이다】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 또 아뢰기를, “이석효가 무고(誣告)한 정상을 실정대로 털어놓기 전에 영문(營門)으로 올려 보낼 적에는 심상한 죄수에 견줄 수 없는 법인데, 단지 하나의 형리로 하여금 압령(押領)하게 하였음은 일이 지극히 소홀하고 지체되었습니다. 그리고 민세철은 이미 의당 추문했어야 하는 계제(階梯)인데, 당초에 아울러 보내지 않았으니, 청컨대, 여주 목사(驪州牧使) 박황(朴璜)을 파직하소서.”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23, 영조 5년 8월 6일 무신.
  • 1730년(영조 6년):여주·이천에 여역이 특히 심함을 장문한 경기감사 조최수를 파직함
    • 내용 : 이때 경기감사 조최수(趙最壽)가 여주(驪州)·이천(利川)에 여역(癘疫)이 특히 심하다고 치계(馳啓)하여 장문(狀聞)했는데, 임금이 딴 뜻이 있다고 의심하여 특별히 파직하고, 또 병조참판 이진순(李眞淳)이 군호(軍號)를 핑계로 마치 지적한 것이 있는 것 같았다고, 체차(遞差)를 명했는데, 이에 이르러 판중추부사 이태좌(李台佐)가 상소하기를, “여주·이천에 여역이 크게 번지고 있음은 신(臣)도 또한 들었습니다. 번신(藩臣)이 사실에 의거하여 장문하는 것은 실로 옛사람들이 수한(水旱)이나 도적(盜賊)을 주달하던 일입니다. 군호를 써서 올린 것은 일에 따라 규계(規戒)를 올리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지적했다’고 하시니, 자못 뜻밖입니다. 이는 모두 한때의 실수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는 대개 중화(中和)의 공부가 지극하지 못한 데가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25, 영조 6년 2월 6일 을사.
  • 1730년(영조 6년):여주 영릉에 행행함
    • 내용 : 임금이 여주(驪州) 영릉(寧陵)에 행행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25, 영조 6년 2월 25일 갑자.
  • 1730년(영조 6년):돌아오는 길에 여주·광주 등에 민역을 감함
    • 내용 : 임금이 회란(回鑾)하는 길에 이천(利川)의 행궁(行宮)에 이르러, 여주(驪州)·광주(廣州)·양근(楊根)·이천 네 고을에는 특별히 민역(民役)을 감해 주고, 여주의 사서(士庶) 중에 70세 이상은 음식물을 내리고, 80세 이상으로 두 번 행행(幸行)을 겪은 사람에게는 사서인(士庶人)을 막론하고 특별히 한 자급(資級)씩을 가자하도록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25, 영조 6년 2월 27일 병인.
  • 1730년(영조 6년):사간원에서 여주 등의 민심을 들어 심유현을 파가 저택할 것을 청함
    • 내용 : 사간원에서【대사간 윤혜교(尹惠敎)이다】 …… 윤혜교가 아뢰기를, “이 일은 여주(驪州)와 이천(利川) 사이에 사람들의 말이 매우 많습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면 어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25, 영조 6년 4월 19일 병진.
  • 1731년(영조 7):여주목사 홍용조가 양역 변통에 대해 아룀
    • 내용 :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여주목사(驪州牧使) 홍용조(洪龍祚)가 군액(軍額)에 궐원이 많고 양정(良丁)을 얻기 어렵다 하여 다른 고을로 이송하기를 청하였고, 도신(道臣)이 장문(狀文)까지 하였습니다. ……”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29, 영조 7년 3월 25일 무자.
  • 1731년(영조 7년):여주의 강물이 붉고 흐린 것이 열흘이 되었다고 도신이 보고함
    • 내용 : 경기의 여주(驪州)의 강물이 붉고 흐린 것이 열흘이 되었다고 도신(道臣)이 계문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29, 영조 7년 6월 13일 갑진.
  • 1731년(영조 7년):부제학 민응수가 여주(驪州)에서 상소함
    • 내용 : 부제학 민응수(閔應洙)가 여주(驪州)에 있으면서 상소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29, 영조 7년 6월 16일 정미.
  • 1732년(영조 8년):헌납 채응복이 진구하지 않고 사욕을 채운 여주 목사 김준의 처단을 청함
    • 내용 : 사간원【헌납 채응복(蔡膺福)이다】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여주목사(驪州牧使) 김준(金浚)이 진구하는 정책은 도외시한 채 버려두고 창고에 보관한 곡물(穀物)을 별환(別還)하는 데 모두 주어, 배에 싣고 육지로 운반하기를 서울과 지방에 널리 행하였습니다. ……”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31, 영조 8년 5월 8일 계사.
  • 1732년(영조 8):경기어사 이주진이 복명하니 진구하는 정치를 문답함
    • 내용 : 경기어사(京畿御史) 이주진(李周鎭)이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여러 고을의 진구하는 정치를 하문하자, 이주진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마치고, 여주(驪州)의 전세(田稅)인 황두(黃豆)를 마음대로 꺼내어 백성을 구제한 죄를 스스로 진술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세금으로 받은 황두 200석을 아까워하겠는가?” 하고, 인하여 호조에 명하여 특별히 탕감하여 본 고을의 조적(糶糴)으로 환산하여 보관하게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31, 영조 8년 5월 13일 무술.
  • 1733년(영조 9년):전라감사 조현명이 흉서 사건을 여주목사 최명주에게 맡김
    • 내용 : 전라감사 조현명(趙顯命)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 전주영장(全州營將)은 마땅히 자력(資歷)과 위망(威望)이 있는 사람을 선택하여 차임(差任)해야 되는데, 여주목사 최명주(崔命柱)는 청렴 강직하고 뛰어나게 총명하고, 전(前) 병사(兵使) 조담(趙倓)도 또한 계략(計略)이 있으니, 이 두 사람 가운데에서 선택하여 차송(差送)하소서. ……”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34, 영조 9년 4월 22일 계유.
  • 1734년(영조 10년):여주 출신 양응교가 체포된 기사
    • 내용 : 포도청의 죄인 윤정현(尹廷顯)을 강원감영으로 압송시켜 남격(南格)과 함께 철저히 조사하여 장문(狀聞)하라고 명하였다. 윤정현이 또 말하기를, “무신년의 변란(邊亂) 때 중군(中軍) 홍하성(洪夏成)이 본부(本府)에 유진(留陣)하고 있었는데, 여주(驪州) 사람 양응표(梁應標)란 자가 역적들의 도목(都目)을 가지고 춘천(春川)에 왕래하다가 고을의 장교(將校)에게 체포되었기 때문에 홍하성이 그 도목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37, 영조 10년 2월 16일 임술.
  • 1735년(영조 11년):사헌부가 여주목사 이의풍의 남형에 대한 처벌을 청함
    • 내용 : 헌부【장령 주형리이다】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여주목사(驪州牧使) 이의풍(李義豐)은 일찍이 수신(帥臣)이 되었을 때에 한 여인(女人)에게 위협을 당하여 거의 죽다가 겨우 살아났으니, 그의 허약하고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40, 영조 11년 8월 6일 임신.
  • 1737년(영조 13년) 경기 여주 개군산 신은천의 물이 몇 식경 동안 흐르지 않다
    • 내용 : 경기 여주(驪州) 개군산(介軍山)의 신은천(新恩川)의 물이 몇 식경(食頃) 동안 흐르지 않았다.
    • 출전 : 『英祖實錄』 권46, 영조 13년 11월 30일 계미.
  • 1738년(영조 14년):부제학 김진상이 여주로 낙향하여 나오지 아니함
    • 내용 : 부제학 김진상(金鎭商)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나오지 아니하였다. 이때 김진상이 여주(驪州)에 물러가 살았는데, 무릇 제배(除拜)의 명이 있어도 모두 간곡하게 사양하고 산수(山水) 사이에서 노닐기를 좋아하여 지역 안의 이름난 곳을 거의 두루 돌아다녔고, 시와 술을 가지고 스스로 즐기니, 사류(士類)들이 모두 칭찬했었다.
    • 출전 : 『英祖實錄』 권47, 영조 14년 12월 15일 계사.
  • 1740년(영조 16):행사직 이기진이 여주 목사직을 청함
    • 내용 : 행사직 이기진(李箕鎭)이 상소하여 걸군(乞郡)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이기진의 집은 여주(驪州)에 있었는데, 제수하는 왕명이 있을 적마다 어미가 늙었다 하여 사양하고 오지 않았었다. 임금이 어미를 모시고 올라오라고 명하기에 이르자 이기진이 드디어 이경여(李敬輿)·박장원(朴長遠)이 정경(正卿)으로서 걸군(乞郡)한 전례를 인용하여 상소하여 진정(陳情)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52, 영조 16년 9월 10일 무인.
  • 1741년(영조 17):고 상신 이완의 무덤을 수치하도록 경기 감사에게 명함
    • 내용 : 경기감사에게 명하여 고 상신(相臣) 이완(李浣)의 무덤을 수치(修治)하게 하였다. 승지 민통수(閔通洙)가 말하기를, “이완의 무덤이 여주(驪州)에 있는데, 자손이 영체(零替)해서 수호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무덤 앞의 섬돌들이 붕괴되었습니다. ……” 하니, 드디어 이런 분부가 있었다.
    • 출전 : 『英祖實錄』 권54, 영조 17년 7월 14일 병자.
  • 1744년(영조 20년):이조판서 이기진이 여주로 돌아감
    • 내용 : 특별히 이조판서 이기진(李ニ鎭)을 내쳐 홍주목사(洪州牧使)로, 이조참판 원경하(元景夏)를 내쳐 청풍부사(淸風府使)로 삼았다. 두 사람은 함께 전조(銓曹)에 있으면서 완만함과 준엄함이 각기 달랐기 때문에 가부(可否)를 논함에 있어 오랫동안 서로 잘 조화를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원경하는 소장을 올리고 도성을 나갔으며 이기진도 곧바로 여주(驪州)로 돌아갔기 때문에 원경하를 하옥시켰었다.
    • 출전 : 『英祖實錄』 권59, 영조 20년 1월 23일 신축.
  • 1745년(영조 21년):양근·여주의 백성들이 참선에 참가해 싣는 일을 금하자고 주청함
    • 내용 :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조선(漕船)이 강으로 내려갈 때 양근(楊根)·여주(驪州)의 연안(沿岸) 백성들이 여울을 파는 역(役) 때문에 농사를 폐하기에 이르니, 참선(站船)에 참가해 싣는 일을 마땅히 신금(申禁)해야 합니다. ……”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61, 영조 21년 4월 5일 정미.
  • 1745년(영조 21년):조순이 여주 읍호의 강등을 능침을 들어 부당함을 논함
    • 내용 : 이조에서 아뢰기를, “조순(趙錞)은 여주(驪州)에서 태어났으나, 능침(陵寢)이 있는 읍(邑)이므로 예(例)에 따라 읍호(邑號)를 강등시킬 수는 없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62, 영조 21년 11월 24일 신묘.
  • 1747년(영조 23년):이조판서 김약로를 여주목사에 제수함
    • 내용 : 이조판서 김약로(金若魯)를 여주목사(驪州牧使)로, 참판 이철보(李喆輔)를 이천부사(利川府使)로 특별히 전보시켰다.
    • 출전 : 『英祖實錄』 권65, 영조 23년 2월 25일 을유.
  • 1747년(영조 23년):여주목사 김약로와 이천부사 이철보를 내직으로 옮김
    • 내용 : 여주목사(驪州牧使) 김약로(金若魯)와 이천부사(利川府使) 이철보(李喆輔)를 내직(內職)으로 옮기도록 명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65, 영조 23년 3월 12일 임인.
  • 1748년(영조 24년):판부사 민응수가 여주 시골에 있으면서 오지 않자 누차 하유하여 부름
    • 내용 : 임금이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임금이 병이 있으면 약을 맛보는 것이 신하의 의리인 것이다. 대신의 일은 참으로 개연스럽다. 가령 내가 병이 심하다면 여주(驪州)에 있는 도제조가 입시할 수 있겠는가?” 하고, 아뢰는 말을 살펴서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주진을 추고(推考)하게 하였는데, 민응수가 이 소식을 듣고는 황공하여 즉시 와서 대명(待命)하고 드디어 출사(出仕)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68, 영조 24년 11월 11일 신유.
  • 1751년(영조 27):박춘신 등 5도 유생이 상서하여 여주목사 이유신을 죄줄 것을 청함
    • 내용 : 오도(五道)의 유생(儒生) 박춘신(朴春新) 등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호서(湖西)의 옥천군(沃川郡) 구룡(九龍)마을은 바로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태어난 곳입니다. 여주목사(驪州牧使) 이유신(李裕身)이 사론(士論)을 돌보지도 않고 국법(國法)을 안중에 두지 않은 채 갑자기 장지(葬地)로 점유하고 비밀리에 몰래 상(喪)을 치르면서 군(軍)을 출동시켜 진(陣)을 배치한 뒤 밤중에 장례(葬禮)를 끝마쳐버려 많은 선비들이 일제히 분개하고 있습니다. ……”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74, 영조 27년 11월 10일 임신.
  • 1755년(영조 31):전 좌참찬 김진상이 여주에서 죽음
    • 내용 : 전 좌참찬 김진상(金鎭商)이 졸(卒)하였다. 김진상은 김익훈(金益勳)의 손자이다. 신축년·임인년 이후에 벼슬하지 않고 여주(驪州)로 퇴거하여 향당(鄕黨)이 칭찬하였으며, 산수(山水)를 유람하다 일생을 마친 것이다.
    • 출전 : 『英祖實錄』 권85, 영조 31년 6월 23일 을축.
  • 1761년(영조 37):헌부에서 여주목사 조제태를 사판에서 삭제하기를 청함
    • 내용 : 헌부【지평 이재현(李載顯)이다】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또 상달하기를, “…… 그리고 여주목사(驪州牧使) 조제태(趙濟泰)는 본래 탐욕스러운 자로 금고(禁錮)에서 겨우 벗어난 상태인데 여태까지의 대평(臺評)이 그가 옛날의 습성(習性)을 고치지 않았는데도 공의(公議)가 있지 않아 지금까지 모람되게 버틴다고 하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해 버리도록 하소서.”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97, 영조 37년 4월 10일 기묘.
  • 1761년(영조 37):우의정 홍봉한이 여주목의 모곡을 감해 줄 것과 선창의 이거를 청함
    • 내용 :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예조판서와 선혜청 당상·비국 당상을 소견하였다. 우의정 홍봉한이 경기감사의 장본(狀本)으로 인하여 여주목(驪州牧)의 모곡(耗穀) 700석을 감하여 줄 것을 청하고, 또 경상좌수사 장문(狀聞)으로 인하여 선창(船倉)을 포이포(包伊浦)에 옮겨 설치하도록 허락하여 줄 것을 우러러 청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 출전 : 『英祖實錄』 권98, 영조 37년 8월 16일 임오.
  • 1767년(영조 43) 좌의정 한익모가 여주의 여덟 개 큰 숲에 대한 일을 아룀
    • 내용 : 좌의정 한익모가 여주(驪州)의 여덟 개 큰 숲에 대한 일로 아뢰자, 김치인이 말하기를, “그 숲은 여지도(輿地圖)에 실려 있습니다. 비록 두 능의 화소(火巢) 밖이기는 하나 경작해서는 미안할 듯합니다.” 하니, …… 이성규는 여주목사로서 여덟 개 큰 숲에 관한 일로 상경했다가 오랫동안 직임에 복귀하지 않았는데, 막 서용하지 말라는 명이 있었기 때문에 임금의 하교에 언급한 것이다.
    • 출전 : 『英祖實錄』 권109, 영조 43년 7월 20일 임오.
  • 1767년(영조 43):여주에 적간하려 갔던 선전관의 입시를 명하여 숲의 측량 등 을 그만두게 함
    • 내용 : 여주(驪州)에 적간(摘奸)하러 갔던 선전관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서계(書啓)를 보건대 백성들이 이익을 볼 곳은 아니니, 여덟 개의 큰 숲을 측량하는 것은 그만두도록 하라. 이 하교 뒤에 마땅히 참작이 있어야 할 것 같으니, 전 목사에게 ‘기한을 정하여 서용하지 않는다’는 명도 분간(分揀)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109, 영조 43년 7월 23일 을유.
  • 1773년(영조 49):여주·이천 어사가 복명하니 면려토록 함
    • 내용 : 여주(驪州)·이천(利川) 어사(御史)가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여주(驪州)는 유리(流離)하여 흩어진 자가 1백 60여 명에 이르니 잘 다스린 것인가, 못다스린 것인가? 바로 이 한 가지 일로서도 결단코 용서할 수 없다. 마땅히 친히 물어서 제도(諸道)를 면려(勉勵)하게 할 것이다. 이천(利川)은 한 사람도 흩어진 자가 없으니 심히 가상하다. 부사(府使) 이명중(李明中)에게 새서표리(璽書表裏)의 은전(恩典)을 특별히 베풀고, 임정원(林鼎遠)을 여주 목사로 삼으라.”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121, 영조 49 11월 15일 경오.
  • 1773년(영조 49):허임을 여주(驪州)에 충군하라고 명함
    • 내용 : 임금이 여주(驪州)에 충군(充軍)하라 명하고, 이상봉을 보내어 여주의 권향(權鄕)과 간리(奸吏)를 조사해 다스리게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121, 영조 49년 11월 17일 임신.
  • 1774년(영조 50):여주에 가서 봉심을 하고 온 승지 최민에게 녹피를 하사함
    • 내용 : 임금이 자극문(紫極門)에 나아가 승지를 보내어 사직단(社稷壇)에 봉심(奉審)을 하도록 하고, 여주(驪州)에 가서 봉심을 하고 온 승지 최민(崔)에게 녹피[鹿皮]를 하사(下賜)하도록 명하였는데, 그가 봉심을 하러 갔다가 빨리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 출전 : 『英祖實錄』 권122, 영조 50년 5월 5일 정사.
  • 1775년(영조 51):광주·여주·개성부의 전조를 감함
    • 내용 : 양주와 고양은 금년의 전조(田租)를 특별히 감하고 여러 읍(邑)은 반감(半減)하며 광주·여주(驪州)·개성부(開城府)는 반을 감한 외에 또 2푼[分]을 더 감하라고 명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125, 영조 51년 9월 5일 경술.
  • 1775년(영조 51):심상운 형제를 본가로 돌아가게 하도록 명함
    • 내용 : 대사헌 윤양후(尹養厚), 대사간 이택진(李宅鎭), 부제학 이미(李瀰) 등이 심상운을 잡아다 국문하여 엄히 문초하도록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그 소장을 보건대, 심골(心骨)이 다 시리다. 그에게 만약 인심(人心)이 있다면, 이제 청정(聽政)하는 때를 맞아 어찌 감히 이렇게 하는가? 그 마음이 이미 판명되었는데, 어찌 다시 묻겠는가? 빨리 방형(邦刑)을 바로 하여 그에게 마땅한 율을 시행해야 하지만, 아! 저 여주(驪州)를 바라보면 내 마음이 어떻겠는가? 그 소장이 그의 결안(結案)이 되는데, 무엇을 묻겠는가? 특별히 일률(一律)을 감하고, 함께 국중(國中)에서 살지 않겠다는 뜻을 보여 흑산도(黑山島)에 천극(栫棘)하는 율을 시행하되, 길을 배로 재촉해 압송하여 엄히 천극하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이제 심상운의 상서를 보건대, 천만 해괴하고 분하다. 이런 소인으로 하여금 만약 청평위(靑平尉)의 제사를 받들게 한다면, 내가 장차 무슨 낯으로 여주(驪州)에 절하겠는가? 심상운 형제는 아울러 그의 아비와 함께 본가(本家)로 돌아가게 하고, 해조(該曺)로 하여금 입후 문서(立後文書)를 지워버리게 하며, 청평위 집의 봉사(奉祀)는 무고(無故)한 자를 별택(別擇)하라.”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주를 바라보니, 차마 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 출전 : 『英祖實錄』 권126, 영조 51년 12월 22일 을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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