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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 1609년(광해군 1):장령 이충양(李忠養)이 사사로이 여주(驪州)에서 죽은 동생의 상에 곡을 한 일로 사직하기를 청함
    • 내용 : 장령 이충양(李忠養)이 아뢰기를, “신이 전에 성균관 전적으로 있을 때 사사로이 경기의 여주(驪州)에 가서 죽은 동생의 상에 곡을 하였습니다. 직명(職名)이 있는 몸이 마음대로 출입해 잘못이 크니 그대로 언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을 바로잡아서는 안 됩니다. 신의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는데,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 출전 : 『光海君日記』 권17, 광해군 1년 6월 22일 신미.
  • 1609년(광해군 1):여주목사 이영의 파직을 사간원에서 요청함
    • 내용 : 사간원이 연계하여 민희건을 귀양 보내기를 청하고, 또 아뢰기를, “여주목사(驪州牧使) 이영(李瑩)은 나이가 들어 늙은데다가 병까지 들어, 부임한 뒤로 정사를 하리에게 맡기고 오랫동안 관청에 나가 앉지 않아서 백성들이 얼굴도 알지 못합니다. 잔폐(殘弊)한 고을을 날로 형편없게 만들고 있으니, 이런 사람은 하루도 관직에 둘 수 없습니다. 파직을 명 하소서.” 하였다.
    • 출전 : 『光海君日記』 권20, 광해군 1년 9월 19일 정유.
  • 1610년(광해군 2):여주 등 경기지방의 산성수리에 대해 비변사에서 건의함
    • 내용 : 비변사가 아뢰기를, “경기지방의 산성이 무려 열일곱 곳이나 되는데 적이 물러간 뒤로 점점 폐지되고 오직 수원(水原)의 독성(禿城)만이 꾸준히 수리되어 왔습니다. 지난날 본사에서 중수할 일을 의논할 때에 먼저 수원과 파주(坡州) 등 세 곳의 산성을 거론하였고, 그 나머지 인천(仁川)·용진(龍津)·광주(廣州)·고양(高陽) 등 네 산성은 앞으로 점차 조치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주(驪州)의 파사성(婆娑城) 같은 곳은, 논의하는 이들이 모두들 형세가 상자를 기울여 둔 것처럼 북쪽은 높고 남쪽은 낮아서 멀리 외부에서 보면 밑바닥이 훤히 보이고 안쪽에서 외부를 방어하려면 지세가 기울어지고 험하여 결코 수비할 수 있는 지형이 아니라고 하여 수선의 범주에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8개 읍의 산성은 앞으로 본도 감사로 하여금 방어사와 회동하여 형세를 살펴보아 만일 어쩔 수 없이 수비하여야 할 것이라면 하나하나 계문할 것을 이미 이문(移文)하였는데, 본도 감사 등이 수선할 것을 계청한 것이 없습니다. 즉시 수리하라는 전교를 지금 받았으나 도신의 평가를 받지 못하여 아직 형세의 험난 여부나 위급할 때 산성의 경중 여하를 알지 못하니, 감사에게 문의하여 편부(便否) 여하를 헤아려 계문하게 한 후에 처치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본사가 뜻을 두고 요리하여 차례대로 수축하고 보완함으로써 폐기되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라.” 하였다.
    • 출전 : 『光海君日記』 권24, 광해군 2년 1월 17일 갑오.
  • 1610년(광해군 2):김권(金權)을 여주목사(驪州牧使)로 삼음
    • 내용 : …… 유색(柳穡)을 성균관 사성으로, 송영구(宋英耉)를 시강원 필선으로, 이욱(李稶)을 사헌부 장령으로, 김권(金權)을 여주목사(驪州牧使)로 삼았다【김권의 사람됨은 선량하나 다른 재능이 없었다. 이이와 성혼을 존숭하여 현인이라 하였다. 일찍이 청반(淸班)에 들어가 시론(時論)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당적(黨籍)을 좋게 여겨 백발이 되도록 어정거렸으나 다만, 문장과 뛰어난 재능이 없었다】.
    • 출전 : 『光海君日記』 권26, 광해군 2년 3월 23일 기해.
  • 1611년(광해군 3):이덕형이 『여지승람』을 간행할 때 잘못된 부분을 개정하기를 청하니 들어줌
    • 내용 :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의 8대조인 이집(李集)은 고려 말에 이름이 난 사람입니다. 문장과 기개가 당세에 유명하였고,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과 교유하였습니다. 공민왕(恭愍王) 무신년에 곧은 성격으로 인해 신돈(辛旽)의 비위를 거슬렀는데, 돈이 죽이려고 하자, 몰래 연로한 부모를 모시고 낮에는 숨고 밤에는 길을 가며 온갖 고초를 다 겪었습니다. 돈이 처형되고 나서야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이로부터 벼슬할 뜻이 없었습니다. 이에 여주(驪州) 천령현(川寧縣)으로 물러가 몸소 농사짓고 독서하며 지내다가 공민왕 정묘년에 별세하였는데, 몽주와 숭인 등이 만시를 지어 곡하였습니다. 그 후 10여 년 뒤에 고려가 망하고 성조(聖朝)가 개국하였습니다. 그 사적의 전말은 이처럼 분명하게 고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지승람(輿地勝覽)』을 편찬할 때에 임사홍(任士洪) 부자가 이극감(李克堪) 형제를 매우 미워하여 이에 역사 편찬하는 사람에게 이집(李集)이 아조(我朝)에 들어와 벼슬하였다고 속여 마침내 광주(廣州) 본관의 인물 아래에 기록하고, 이어서 『시림(詩林)』에 기록함으로써 잘못된 것을 그대로 이어받아, 믿음을 전해야 하는 책이 끝내 근거 없는 책이 되고 말았습니다. 소인이 기탄없이 흉악한 마음을 멋대로 부린 잘못이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 출전 : 『光海君日記』 권39, 광해군 3년 3월 26일 병인.
  • 1611년(광해군 3):여주 유생 신협이 소를 올려 정인홍의 소를 불태울 것을 청함
    • 내용 : 여주(驪州) 유생 신협(申協)이 소를 올려 정인홍의 소를 불태우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소를 살피고서 그대들의 뜻을 잘 알았다.” 하였다.
    • 출전 : 『光海君日記』 권41, 광해군 3년 5월 12일 신해.
  • 1613년(광해군 5):죄수 박응서가 역모를 고변하니 의금부로 옮겨 국문하게 하다
    • 내용 : 이에 앞서 서인(庶人) 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허홍인(許弘仁)·박응서(朴應犀)·박치의(朴致毅) 등이 생사를 같이 할 친구 관계를 맺고 때도 없이 어울려 돌아다녔다. 양갑은 고(故) 목사 서익(徐益)의 첩의 아들이고 우영은 고 감사 심전(沈銓)의 첩의 아들이고 응서는 고 정승 박순(朴淳)의 첩의 아들로서 모두 명가(名家) 출신이었을 뿐만 아니라 꽤나 글을 잘 한다는 이름들이 있었는데, 과거 시험을 보는 데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장사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기유년부터는 여주(驪州) 강변으로 거처를 옮긴 뒤 각 집안을 합쳐 재물을 공동으로 사용하면서 매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으므로 그 고을 사람들이 매우 이상하게 여겼는데, 양갑과 치의 등의 강도 사건이 드러나자 그들이 도적이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 출전 : 『光海君日記』 권65, 광해군 5년 4월 25일 계축.
  • 1613년(광해군 5):서청에 나아가 박응서를 먼저 친국함
    • 내용 : 왕이 서청(西廳)에 나아가 친국하였는데, …… 먼저 박응서(朴應犀)를 국문하였는데, 응서가 공초하기를, …… 7년 전에 서양갑이 맨 먼저 역모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심우영·허홍인·유효선(柳孝先) 등과 함께 여주(驪州) 강변의 넓은 들판에 같이 살며 의식(衣食)을 함께 하였는데, 어느 날 흉모를 이야기하기를 ‘우리들이 뛰어난 재질을 갖고 있는데도 오늘날의 법 제도 때문에 출세길이 막혀 뜻을 펴지 못하고 있다. 사나이가 죽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죽는다면 큰 이름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 뒤로 김평손(金平孫)·김비(金斐)와 결탁하는 한편 또 무사들과 관계를 맺으려 하였으나 금은이 없는 것을 한스러워하였습니다.
    • 출전 : 『光海君日記』 권65, 광해군 5년 4월 25일 계축.
  • 1613년(광해군 5):서인갑을 공초함
    • 내용 : 2경(更)에 왕이 대내(大內)에 들어갔다가 3경에 어전에 나와 서인갑(徐寅甲)【인갑은 양갑(羊甲)의 동생이다】의 공초를 받았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신은 여주(驪州)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또 문자를 알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양갑의 동료들이 나를 무시하면서 자리 지키는 사람이라고까지 일컬었는데 무슨 일을 하는지 신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리고 그들이 어찌 감히 이런 일이야 했겠습니까?” 하였다.
    • 출전 : 『光海君日記』 권65, 광해군 5년 4월 25일 계축.
  • 1613년(광해군 5):심우영 등을 친국함
    • 내용 : 왕이 친국을 행하여 심우영·박종인·김비·박치인의 공초를 받았는데, 심우영이 공초하기를, “신은 빈한하여 살림 밑천이 없는데다 먹여 살릴 식구도 많아 생활이 무척 곤란하였습니다. 그래서 서양갑과 서로 아는 처지라서 같이 상의하여 기전(畿甸)의 공한지(空閑地)를 얻어 볼까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듣건대 여주(驪州) 양화강(楊花江) 가에 버려진 제언(堤堰)이 있다고 하기에 이를 수축해서 농사도 짓고 또 어염(魚鹽)의 이익도 챙길 목적으로 그 지역으로 주거를 옮겼는데 박응서도 따라와 같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뒤 제언을 수축하여 농사를 지었으나 농사도 제대로 되지 않아 먹고 살기가 더욱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춘천(春川)에 있을 때 민간 백성의 딸을 첩으로 데리고 살았었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왕래하며 관곽(棺槨)을 팔아 생활 수단으로 삼으면서 몇 년을 보내었을 뿐입니다. …… 원하건대 모두에게 공초를 받아보도록 하소서. 그러고도 의심할 만한 단서가 있게 된다면 그 뒤에는 달가운 마음으로 형을 받겠습니다.” 하였다.
    • 출전 : 『光海君日記』 권65, 광해군 5년 4월 27일 을묘.
  • 1613년(광해군 5):서양갑·김경손이 역모를 부인함
    • 내용 : 왕이 친국하여 서양갑(徐羊甲)·김경손(金慶孫)의 공초를 받았다. …… 경손이 공초하기를, “신은 어려서부터 천식으로 기가 위로 올라오는 증세 때문에 대문 밖을 나오지 못한 지 40년이 지났으므로 서로 아는 사람이 매우 적은데 심우영이나 서양갑 등과는 대대로 교분이 있는 집안인 관계로 그냥 알고 지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신이 살고 있는 철원(鐵原)과 여주(驪州)와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기유년부터는 서로 만나는 일조차 드물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게 된 사람이 무슨 희망이 있다고 멸족을 당할 죄를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 출전 : 『光海君日記』 권65, 광해군 5년 4월 28일 병진.
  • 1613년(광해군 5):유효선을 친국하였으나 역모를 부인함
    • 내용 : 왕이 친국하여 유효선(柳孝先)의 공초를 받았는데, 이르기를, “미혹하고 보잘것없는 제가 노모를 모시는 여가에 독서하여 과거에 응시해서 이름을 이루려고 기약한 결과 본래 큰 재주는 없으나 일단 초시(初試)에 합격했고 또 금고(禁錮)가 되지 않고 이미 허통(許通)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역을 하다니 어찌 차마 그럴 수 있겠습니까. 일찍이 여주(驪州)에 살 때 심우영(沈友英) 등과 알고 지냈습니다만 지금은 거처를 옮겨 산 지가 벌써 수년이나 되었습니다. 신이 서울에 있으면서 이 사람들이 은상(銀商)에게 강도짓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척 놀랐는데, 양반의 자제로서 차마 이런 일을 하다니 알고 지내던 사람의 입장에서도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하고는 형언할 수 없는 말을 지어내어 요행히 면할 계책을 꾸미고 있으니 이 세상에 이런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였다.
    • 출전 : 『光海君日記』 권65, 광해군 5년 4월 29일 정사.
  • 1613년(광해군 5):이경준·김경손 등에게 압슬을 가했으나 승복하지 않고 박응서가 공초함
    • 내용 : 박응서가 공초하기를, “신윤선과 권순성은 본래 서양갑과 교우관계를 맺은 사이로서 그 집의 묘소를 골라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순성이 요즈음에는 우영과 조금 소원해졌으니 역모에 대해서는 필시 그에게 말해 주지 않았을 것이고 윤선도 듣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계허는 나이가 많아 쓸모가 없는 사람이고, 신응망(辛應望)·신응기(辛應期)와 정대붕(鄭大鵬)·정대한(鄭大翰)과 김양(金暘) 등은 그와 왕래했을 따름이니, 비밀히 의논한 일을 필시 들어 알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대체로 변계허 등 5명은 당초 박응서의 공초에 나오지도 않았는데, 여주목사(驪州牧使) 심언명(沈彦明)이 서양갑 등과 그들이 같이 노닐었다는 말을 듣고 잡아 가둔 뒤 보고한 것이었다.
    • 출전 : 『光海君日記』 권66, 광해군 5년 5월 3일 경신.
  • 1613년(광해군 5):심섭을 형추하니 승복함
    • 내용 : 좌우가 이에 심섭을 형추하도록 청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심섭은 나이가 어리니 경장(輕杖)을 쓰도록 하라.” 하였다.
      심섭이 형장을 한 차례 맞고는 승복하겠다고 부르짖으면서 말하기를, “서양갑이 괴수가 되어 여주(驪州)와 이천(利川)의 군사를 가지고 서울을 공격하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의 아비가 과연 노추(奴酋)를 청해 오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그 뜻은 서울을 공격하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였는데, …… 왕이 이르기를, “왕이 될 자는 필시 달리 있을 것인데 정협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으니 다시 형신하여 물어보도록 하라. 그리고 여주와 이천에서 군사를 모으려고 한 것이 분명한데 그곳에서 역모에 참여한 사람들을 일일이 물어 아뢰어라.” 하였다.
    • 출전 : 『光海君日記』 권66, 광해군 5년 5월 4일 신유.
  • 1613년(광해군 5):서양갑이 박응서와 대면하여 공초함
    • 내용 : 서양갑(徐羊甲)에게 형신을 가하였는데【모두 4차 형신을 하였는데 압슬과 화형(火刑)을 세 차례 하였다】, 서양갑이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나자, 좌우가 속히 형추(刑推)할 것을 청하였다. 서양갑이 형신에 임해서 승복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또 박응서(朴應犀)와 대면하고 공초하기를 청하였다. 이어 응서와 대면하고 공초하기를 “…… 부원군이 장사(壯士)를 많이 얻으려 하면서 또 절친한 사람을 훈련도감의 대장으로 앉히려 하였습니다. 이 때 관직이 낮은 사람으로 물망에 오른 것이 정협(鄭浹)이었는데 전 병사(兵使) 이수(李璲)도 일찍이 보고서 그를 대장으로 삼았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또 이지효(李止孝)라는 자가 있었는데 본방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이 사람이 만약 역모를 몰랐다면 어떻게 그를 쓰려고 했겠습니까. 그리고 훈련도감과 수원(水原)의 군사를 가지고 야간 훈련이라고 핑계대면서 바로 거사하여 대궐을 범하려 하였고, 이밖에 여주(驪州)나 이천(利川)의 군사를 동원한다는 설은 모두가 허황된 것입니다.
    • 출전 : 『光海君日記』 권66, 광해군 5년 5월 6일 계해.
  • 1613년(광해군 5):역적 심우영 등이 거처했던 고을의 수령을 파직하고 그 읍호를 강등하게 함
    • 내용 : 의금부가 아뢰기를, “역적 심우영(沈友英)·심섭(沈燮)·박종인(朴宗仁)·서양갑(徐羊甲) 등을 이미 전형(典刑)으로 바루었으니, 법전에 따라 그들이 각각 거처했던 고을의 수령을 파직하고 그 읍호(邑號)를 강등시켜야 할 것입니다. 심우영과 심섭이 당시 홍천(洪川)에 거주했고 서양갑은 당시 여주(驪州)에 거주했으니, 해조로 하여금 예에 따라 거행토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그러나 여주는 선조(先朝) 왕후의 고향이니 읍호를 강등하는 일은 대신과 의논한 다음에 아뢰어라.” 하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대신에게 의논했더니 영의정 기자헌과 좌의정 심희수가 의논드리기를 ‘여주는 선조 왕후의 적향(籍鄕)일 뿐만 아니라 선릉(先陵)이 위치해 있는 지역이니 똑같이 거행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해관(該官)으로 하여금 예전 규례를 상세히 조사하게 한 다음 참작해서 처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의논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 출전 : 『光海君日記』 권66, 광해군 5년 5월 12일 기사.
  • 1613년(광해군 5):손비·춘화·이천우·말질지의 공초를 받음
    • 내용 : 손비(孫非)【박치의의 종이다.】·춘화(春花)·이천우(李天宇)·말질지(末叱之)의 공초를 받았다. 손비는 근처에 살면서 관련이 있는 사람이다. 당시에 경기 감사 조탁(曺倬)이 공로와 총애를 탐하여 역적의 족속이랍시고 마구 잡아들이니 고을이 온통 텅텅 비었다. 이윽고 방을 붙여 선포하고 돌아가서 농사일을 보게 하였다. 그러나 즉시 그와 근사한 자를 잡아들여서 도망간 자를 사로잡은 것이라고 보고하니 여주(驪州)와 양주(楊州) 사이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 출전 : 『光海君日記』 권68, 광해군 5년 7월 23일 기묘.
  • 1615년(광해군 7):사헌부가 오희길·이심의 파직을 청하니, 오희길만 허락함
    • 내용 : 사헌부가 아뢰기를, “…… 여주목사(驪州牧使) 이심(李愖)은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고 팔도에 소문났을 뿐만 아니라 요즈음 들어서는 더욱 심하게 혼미해져서 하리들의 말만 한결같이 따라서, 그 동안 백성을 침해하는 걱정이 끝이 없습니다. 이에 온 여흥군이 현재 도탄 속에 빠져 있으면서 언제나 없어질까 원망하는 소리가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잠시라도 관직에 있게 할 수 없습니다.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심의 일은 서서히 결정짓겠다.” 하였다.
    • 출전 : 『光海君日記』 권91, 광해군 7년 6월 22일 정유.
  • 1615년(광해군 7):사헌부가 이심·성진선의 파직을 청함
    • 내용 : 사헌부가 아뢰기를, “…… 여주목사(驪州牧使) 이심(李愖)은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고 세상에 이름이 났으며, 민생에 폐해를 입힌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하루도 그로 하여금 백성들 위에 있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상께서는 즉시 윤허하지 않으시고 감사에게 하문하셨으니, 이것은 언책(言責)이 감사에게 있는 것입니다. 대간의 논계가 역시 경시받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근래에 사기(士氣)가 쓸쓸하고 공론(公論)이 신장되지 않아 교만한 변장과 탐오한 관리가 조금도 징계되지 않고 도리어 대간의 논계를 비웃고 있는바, 조정의 기강을 세우는데 이루 말할 수 없이 방해가 되고 있습니다. 이심을 파직하소서.”
    • 출전 : 『光海君日記』 권91, 광해군 7년 6월 26일 신축.
  • 1615년(광해군 7):홍문관 부응교 윤효선의 상소문
    • 내용 : 홍문관 부응교 윤효선(尹孝先)이 상소하기를, “신은 금년 초봄에 여주(驪州) 고향 집에 돌아가 있다가, 갑자기 임금이 돌아가셨다는 슬픈 소식을 듣고 달려서 조정으로 돌아왔는데, 곧바로 사간원 헌납을 제수 받았습니다. 그때에 역적 이진이 은밀히 흉악한 계책을 품고서 바야흐로 빈소(殯所) 옆에 있었는데, 그가 가병(家兵)을 지휘하는 상황과 칼과 철퇴를 싸가지고 들어갔다는 말을 사람들이 모두 자자하게 이야기하였으므로, 국가에서 호위병을 많이 늘여 밤낮으로 경계를 엄중히 하였습니다. 이에 종신(從臣)의 반열에 있는 사람들은 걱정하고 두려워하여, 모두들 불측한 화란(禍亂)이 곧 닥칠 것으로 여기고 서로 더불어 변란을 처리할 방법을 비밀히 의논하였으나, 감히 드러내어 발론하지는 못하였습니다.”
    • 출전 : 『光海君日記』 권6, 광해군 7년 7월 신묘.
  • 1616년(광해군 8):호조가 원주에서 구입한 재목을 목면과 바꾼 까닭을 아뢰다
    • 내용 : 호조가 아뢰기를, “…… 금년 7월 12일에 원주 목사가 첩보(牒報)하기를, ‘전에 내려 보낸 소금 2백 석으로 연목(椽木) 1천 4백 50거리(巨里), 판자(板子) 6백 10엽(葉), 재목(材木) 24조(條)를 사서 색리(色吏)더러 뗏목을 띄워 올려 보내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중에 판자 2백 55엽은 여주(驪州)에 있고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신들이 산원(算員)으로 하여금 가서 살피게 하였더니, 이른바 연목이라는 것이 휘어지고 가늘어서 공가(公家)의 용도에 합당하지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퇴자를 놓아 보내어 다시 준비하게 하려 하였으나, 오고 가는 데에 폐단이 있을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 출전 : 『光海君日記』 권106, 광해군 8년 8월 5일 계묘.
  • 1616년(광해군 8):양사가 합계로 9년 전의 역적들을 소급하여 죄줄 것을 청함
    • 내용 : 양사가 합계로 비밀의 일을 아뢰고, 또 아뢰기를, “…… 성영은 여주(驪州)에 출몰하며 상황을 엿보고 지내면서 무뢰한 자제들로 하여금 양갑(羊甲)·우영(友英)의 무리들과 사귀어 역적들의 소굴을 드나들면서 그들과 한 패거리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런 자가 요행으로 죽음을 면하였는데도 여전히 징계되지 아니하고, 임금을 모함하고 어진이를 공격하는 상소를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담당하였습니다. ……”
    • 출전 : 『光海君日記』 권107, 광해군 8년 9월 20일 무자.
  • 1617년(광해군 9):곽천구가 늦게 도착한 이유를 서계함
    • 내용 : 가주서(假注書) 곽천구(郭天衢)가 서계하기를, “신이 이달 17일에 명을 받들고 달려가서 18일 정오에 영의정을 여주(驪州) 강가에서 만나 성상의 비답과 유서(諭書)를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 글 한 장을 지어서 신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신이 강릉에서 승지보다 하루 늦게 출발하였는데 인마(人馬)가 갖추어지지 않아서 원주(原州)에 도착해서 배를 타고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듣건대 물의(物議)가 있다고 하므로 급히 달려가서 명령을 기다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순조롭지 않아서 며칠 동안에 조금밖에 가지 못하여서 겨우 여강(驪江)에 도착하였는데, 물의가 막 일어났습니다. 그런데도 사관을 보내어 도타이 유시하기까지 하였으며, 또 역말을 타고 달려오라고 전교하시었으므로, 신은 감격스러움을 이길 수가 없어서 단지 눈물만 떨구었습니다.’ ……”
    • 출전 : 『光海君日記』 권112, 광해군 9년 2월 21일 병진.
  • 1617년(광해군 9):경기감사 유희량이 여주목사 김용의 고변을 치계함
    • 내용 : 경기감사 유희량(柳希亮)이 여주목사(驪州牧使) 김용(金涌)이 고변한 것에 대해 비밀히 치계하였다.
    • 출전 : 『光海君日記』 권117, 광해군 9년 7월 23일 을유.
  • 1617년(광해군 9):여주목사 김용의 익명서장에 대해 전교함
    • 내용 : 여주목사(驪州牧使) 김용(金涌)이 고한 김해정(金亥丁)의 익명서장(匿名書狀)에 관해 비밀히 전교하였다. “이 서장을 의논하여 처리하라. 판의금부사는 집에 있으면서 의논을 아뢰게 하라.”
    • 출전 : 『光海君日記』 권117, 광해군 9년 7월 24일 병술.
  • 1617년(광해군 9):사헌부가 여주목사 김용의 탄핵 등을 아룀
    • 내용 : 사헌부가 아뢰기를, “…… 여주목사(驪州牧使) 김용(金涌)은 국가에서 이번에 서둘러 집을 짓는 날을 당하여 목재(木材)를 초관(哨官)에게 분담시켰습니다. 비록 청심루(淸心樓)를 짓는다고 핑계하였으나 사실 부득이한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하여 원망을 사서 변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김해정(金亥丁)이 정고(呈告)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던 만큼 이는 이름 없는 소장인데 심지어 치계(馳啓)까지 하여 큰 옥사를 일으켰으니, 그 마음씨가 몹시 가증스럽습니다. 파직하라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서서히 결정하겠다. 일소(一所)에 동참했던 차비관은 모두 파직하라.” 하였다.
    • 출전 : 『光海君日記』 권118, 광해군 9년 8월 2일 갑오.
  • 1617년(광해군 9):여주(驪州)에서의 익명서에 관한 옥사로 죄인이 된 6명을 석방함
    • 내용 : 전교하기를, “죄인 김해정(金亥丁)·윤은금(尹銀金)·윤흥복(尹興福)·윤은천(尹銀天)·윤은로(尹銀老)·이흥남(李興男) 등을 모두 석방하라.” 하였다. 여주(驪州)에서 발생한 익명서(匿名書)에 관한 옥사이다.
    • 출전 : 『光海君日記』 권118, 광해군 9년 8월 3일 을미.
  • 1617년(광해군 9):경기감사 유희량이 여주(驪州)에서 상변한 일로 대죄하니 회유함
    • 내용 : 경기감사 유희량(柳希亮)이 여주(驪州)에서 상변(上變)한 일로 장계를 올려 대죄하니, 전교하기를, “일이 대역(大逆)에 관계되는데 허위든 사실이든 간에 방백수령(方伯守令)이 어찌 덮어두고 계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금도 잘못이 없으니 안심하고 대죄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회유(回諭)하라.” 하였다.
    • 출전 : 『光海君日記』 권118, 광해군 9년 8월 5일 정유.
  • 1618년(광해군 10):경기감사 유희량이 박의립의 고변 사건에 대해 장계함
    • 내용 : 경기감사 유희량(柳希亮)이 장계를 올리기를, “광주목사(廣州牧使) 김두남(金斗南)의 비밀 첩정(牒呈)에 ‘여주(驪州)의 주민 박의립(朴義立)이 주(州) 안에 사는 이귀향(李貴香)에게 을묘년에 빌려 쓴 목면(木綿)의 강제 징수와 관련하여 소지(所志)를 올릴 때 석이암(石耳庵)의 승려 봉충(奉忠) 명의의 소지를 슬쩍 끼워넣어 바쳤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즉시 박의립을 불러 물어보기를 ‘이런 큰 일을 왜 직고(直告)하지 않고 봉충의 명의로 정고(呈告)했는가?’ 했더니, 의립이 말하기를, ‘봉충 명의의 소지를 같이 바친 적이 없다’고 하면서 다방면으로 변명하였습니다. 이에 바로 의립에게 형구(刑具)를 채워 수금(囚禁)한 뒤에 원장(元狀)을 아울러 올려 보내는 한편, 목사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이능운(李凌雲)을 체포하게 하고, 여주와 이천(利川) 등 두 고을에 조대윤(趙大允)과 서준(徐濬)을 추적해 체포하라고 이미 비밀히 행이(行移)하였는데, 그 흉서(兇書) 속에서 위의 사람들이 사냥의 모임을 갖는다는 핑계를 대고 실제로는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박의립·봉충·조대윤·서준을 모두 잡아와 조사해서 처치하라.” 하였다.
    • 출전 : 『光海君日記』 권126, 광해군 10년 4월 29일 무오.
  • 1618년(광해군 10):이정수(李廷綬)를 여주목사(驪州牧使)에 제수
    • 내용 : 김지남(金止男)을 남양부사(南陽府使)로, 이정수(李廷綬)를 여주목사(驪州牧使)로 삼았다.
    • 출전 : 『光海君日記』 권129, 광해군 10년 6월 8일 을축.
  • 1621년(광해군 13):기한 내에 전세와 삼수량의 추가 징수분을 바치지 않은 수령 감사의 처벌을 명함
    • 내용 : 호조가 아뢰기를, “작년 가을에 경비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경신년의 전세(田稅)와 삼수량(三手糧)의 추가 징수분을 올해 안으로 정하여 상납하라고 여러 차례 하유하였습니다. 그러나 각 고을의 수령들이 태만한 것이 습관이 되어 지금까지도 다 바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여주(驪州)·음죽(陰竹)·이천(利川)·양성(陽城)·용인(龍仁)·진위(振威)·적성(積城)·김포(金浦)·통진(通津)·교동(喬桐)·포천(抱川)·영평(永平) 등 열두 고을은 전세와 삼수량의 추가 징수분을 전혀 바치지 않았는데, 본도의 감사도 검칙하지 않고 있으니 지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감사와 여주 등 고을의 수령을 모두 되도록 중하게 추고하고, 이달 안으로 본도의 도사가 엄하게 독촉하여 상납하게 하되 기한 내에 다 바치지 못하면 감사와 도사는 녹봉을 감액하고 수령은 파직한다는 것을 다시 신칙하여 하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따랐다.
    • 출전 : 『光海君日記』 권162, 광해군 13년 2월 7일 기묘.
  • 1621년(광해군 13):여주에 우거중인 한준겸을 도원수로 삼음
    • 내용 : 한준겸(韓浚謙)을 도원수로 삼았다【이때 준겸은 적소(謫所)에서 사면을 받은 다음 여주(驪州)에서 우거하였다. 변방의 사세가 날로 위급해지자, 묘당이 조용(調用)할 것을 계청한 것이다】.
    • 출전 : 『光海君日記』 권168, 광해군 13년 8월 24일 계사.
  • 1622년(광해군 14):임기지·이원여·이경익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 내용 : 임기지(任器之)를 헌납으로, 이원여(李元輿)를 이조 정랑으로, 이경익(李慶益)을 수찬으로, 민심(閔)을 이조 좌랑으로, 윤성임(尹聖任)·한급(韓迲)을 부수찬으로, 심형(沈悍)을 청송 부사(靑松府使)로, 이문빈(李文賓)을 영월 군수(寧越郡守)로, 김충보(金忠輔)를 장기현감(長岐縣監)으로 삼았다【심형은 바로 심열(沈悅)이다. 그는 세족의 이름난 경(卿)으로서 시속에 따라 부앙(俯仰)하는 것을 면하지 못했다. 당시 영건 도감의 제조로서 감독하는 일에 전력하였으므로 사론(士論)이 비루하게 여겼다. 이때 청송 부사로 나가기를 청하여 여주 목사(驪州牧使)와 바꾸었으니 대개 사람들의 말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정랑으로서 좌천된 것에 대해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 출전 : 『光海君日記』 권183, 광해군 14년 11월 5일 정유.
  • 1623년(광해군 15):여주목사에 민성징을 낙점함
    • 내용 : 전교하기를, “승지에 가까운 고을의 수령들도 아울러 의망하라.” 하였다. 여주목사(驪州牧使)에 민성징(閔聖徵)이 낙점을 받았다【처음에 성징의 아우 민성복(閔聖復)이 역적의 옥사에 연루되었는데, 성징이 이때 영변 판관으로 있으면서 아우를 구제하는 일을 급하게 여겨 궁인과 결탁해서 드디어 모면하였다. 그 후로도 궁인과 서로 통하여 수령에 제수되었는데, 속례에 따라 물품을 바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이러한 제수가 있었다고 한다】.
    • 출전 : 『光海君日記』 권185, 광해군 15년 1월 11일 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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