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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선조

  • 1570년(선조 3):사헌부가 여주목사 이관의 파직을 청함
    • 내용 : 사헌부가 아뢰기를, “여주목사(驪州牧使) 이관(李瓘)과 남평현감(南平縣監) 신세림(申世霖)을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출전 : 『宣祖實錄』 권4, 선종 3년 4월 27일 갑자.
  • 1575년(선조 8):여주목사 황임을 대사헌으로 삼았으나 탄핵으로 체직됨
    • 내용 : 여주목사(驪州牧使) 황임(黃琳)을 특지(特旨)로 대사헌을 삼았다. 상이 이조에게 하문하기를, “현재 고을을 제일 잘 다스린 사람은 누구인가?” 하니, 이조가 여주목사 황임, 해주목사(海州牧使) 이인(李隣), 황간현감(黃澗縣監) 정인홍(鄭仁弘), 용안현감(龍安縣監) 김천일(金千鎰)로써 대답하였다.
    • 출전 : 『宣祖修正實錄』 권9, 선조 8년 7월 1일 정유.
  • 1576년(선조 9):사헌부가 여주목사 이충작의 폐단을 들어 파직을 청함
    • 내용 : 사헌부가 아뢰기를, “여주목사(驪州牧使) 이충작(李忠綽)은 본디 이재(吏才)가 없는데다가 무뢰배들을 데리고 멋대로 폐단을 부리고 있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출전 : 『宣祖實錄』 권10, 선조 9년 3월 14일 정미.
  • 1576년(선조 9):어사의 장계에 따라 군기를 보수하지 않는 여주 등의 수령의 파직을 명함
    • 내용 : 전교하였다. “경기 어사의 장계를 보니, 군기(軍器)를 보수하거나 갖추지 않은 것이 극심한 데가 여주(驪州)·광주(廣州)·안성(安城)·과천(果川)이었다. 이곳의 수령들은 먼저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라.”
    • 출전 : 『宣祖實錄』 권10, 선조 9년 4월 19일 임오.
  • 1579년(선조 12):동부승지 허진이 병으로 사면하고 여주목사로 나갔다
    • 내용 : 헌부에서도 역시 그를 미워하여 세상에 아부하고 올바른 사람을 욕했다는 것으로 탄핵하니, 상이 비록 윤허하지는 않았으나 자신이 스스로 부끄럽게 여겨 병으로 사면하고 여주목사(驪州牧使)로 나갔다.
    • 출전 : 『宣祖修正實錄』 권13, 선조 12년 7월 1일 을사.
  • 1580년(선조 13):재상 답험에 착오를 범한 수령을 파직한 고을
    • 내용 : 경기우도의 양주(楊州)·삭령(朔寧), 충청좌도의 온양(溫陽)·청풍(淸風), 충청우도 결성(結城), 경기좌도 여주(驪州), 황해도 봉산(鳳山), 강원도 인제(麟蹄)의 수령을 재상(災傷) 답험(踏驗)의 착오로 모두 파직하였다.
    • 출전 : 『宣祖實錄』 권14, 선조 13년 9월 18일 을유.
  • 1585년(선조 18):이해수를 여주목사에 제수
    • 내용 : 이해수(李海壽)를 여주목사(驪州牧使)로 삼았다. 앞서 이조 참의로 삼았는데 심의겸의 당이라 하여 배척당한 것이다.
    • 출전 : 『宣祖修正實錄』 권19, 선조 18년 6월 1일 경자.
  • 1588년(선조 21):구황 경차관 송언신이 구황에 신중을 기하지 않은 목사 이해수와 현령 조희안의 파출을 청하다
    • 내용 : 구황 경차관(救荒敬差官) 송언신(宋言愼)의 서장에, 여주목사(驪州牧使) 이해수(李海壽)와 용인현령(龍仁縣令) 조희안(趙希顔)은 구황 정책에 신중을 기하지 않으니 파출하라고 하였다.
    • 출전 : 『宣祖實錄』 권22, 선조 21년 4월 14일 정묘.
  • 1590년(선조 23):헌부가 도적의 횡포를 방치한 여주목사 이정호의 체차와 서윤 정경륜 등의 개정을 청하다
    • 내용 : 헌부가 아뢰기를, “여주(驪州)에 사나운 도둑이 떼를 지어 살상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해수(李海壽)가 목사로 있을 적에 계략을 세워 6~7명을 체포하여 법으로 다스린 뒤 그 무리가 뿔뿔이 흩어졌었는데, 이해수가 갈려 온 뒤로 그들이 다시 소굴로 돌아와 전에 체포에 힘썼던 도장(道將) 두 사람을 극도로 참혹하게 살해했을 뿐 아니라 그의 가족들도 모두 죽였습니다. ……” 하였다.
    • 출전 : 『宣祖實錄』 권24, 선조 23년 1월 20일 계해.
  • 1591년(선조 24):행 호군 이해수를 여주목사에 제수하였다
    • 내용 : 부제학 이성중(李誠中)을 충청 감사에, 행 호군(行護軍) 이해수(李海壽)를 여주목사(驪州牧使)에 제수하였다. 해수는 전에 여주목사를 지낸 적이 있는데 임기가 차서 체직되었다가 이제 재차 부임하였다.
    • 출전 : 『宣祖實錄』 권25, 선조 24년 1월 29일 병인.
  • 1592년(선조 25) 이달 3일 왜적이 경성에 침입하자 이양원·김명원이 퇴주하다
    • 내용 : 이달 3일에 왜적이 경성에 침입하자 이양원(李陽元)·김명원(金命元)이 퇴주(退走)하였다. …… 이들은 다시 충주에서 두 갈래의 길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여주(驪州)로 가서 강을 건너 양근(楊根)을 경유하여 용진(龍津)을 건너 경성의 동로(東路)로 진출하였고, 하나는 죽산(竹山)과 용인(龍仁) 쪽으로 나아가 한강(漢江)에 이르렀다.
    • 출전 : 『宣祖修正實錄』 권26, 선조 25년 5월 1일 경신.
  • 1592년(선조 25):적의 일군(一軍)이 여주·이천을 거쳐 용진으로 들어왔다
    • 내용 : 적이 경성을 함락시키니 도검찰사(都檢察使) 이양원, 도원수 김명원, 부원수 신각(申恪)이 모두 달아났다. 이에 앞서 적들이 충주(忠州)에 도착하여 정예병을 아군처럼 꾸며 경성(京城)으로 잠입시켰다. 왕의 파천이 이미 결정되었음을 염탐한 뒤에 드디어 두 갈래로 나눠 진격하였으니, 일군(一軍)은 양지(陽智)·용인(龍仁)을 거쳐 한강으로 들어오고 나머지 일군은 여주(驪州)·이천(利川)을 거쳐 용진(龍津)으로 들어왔다.
    • 출전 : 『宣祖實錄』 권26, 선조 25년 5월 3일 임술.
  • 1592년(선조 25):비변사가 강원도 조방장 원호가 여주 싸움에서 승리한 일로 보고하니 가자하다
    • 내용 : 비변사가 아뢰기를, “강원도 조방장(江原道助防將) 원호(元豪)는 여주(驪州) 싸움에서 심상치 않은 승리를 거둔 듯하지만 왜적의 머리를 베지 못하고 왜적의 장물(裝物)만 올려 보냈으니, 허사(虛事)는 아닐지라도 일일이 시상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였다.
    • 출전 : 『宣祖實錄』 권26, 선조 25년 5월 22일 신사.
  • 1592년(선조 25):비변사가 여주에 원호를 제수할 것, 음죽에는 원색을 차임할 것 등을 청하다
    • 내용 : 비변사가 아뢰기를, “여주(驪州)는 바로 왜적이 오가는 길목입니다. 목사 조수흥(趙守興)은 노쇠한 까닭에 민병(民兵)이 있어도 징발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 여주의 일은 다른 고을과 견줄 수 없이 중요합니다. 강원도 조방장(江原道助防將) 원호(元豪)는 향병(鄕兵)을 소집하여 여주 위쪽에서 잇따라 참획(斬獲)하는 공을 세웠습니다. ……” 하니, 상이 따랐다.
    • 출전 : 『宣祖實錄』 권26, 선조 25년 5월 26일 을유.
  • 1592년(선조 25):성영은 이미 여주목사에 제수하였기 때문에 교체하기 어려움을 아뢰다
    • 내용 : 비변사가 아뢰기를, “…… 성영(成泳)은 한창 군사를 모집하여 거사(擧事)를 꾀하는 까닭에 이미 여주목사(驪州牧使)에 제수하였으니 지금 교체하기 어렵습니다. 박기백은 조방장(助防將)에 차정(差定)하여 민망(民望)을 따르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출전 : 『宣祖實錄』 권29, 선조 25년 8월 13일 경자.
  • 1592년(선조 25):전 승지 성영이 여주에서 군대를 모집하다
    • 내용 : 전 승지 성영(成泳)이 여주(驪州)에 이르러 원호(元豪)의 구병(舊兵)을 얻고 모집한 인원과 합하여 군대를 만들었다. 이 일이 알려지자 가선대부에 가자(加資)하였다. 이때 기좌(畿左) 중에서는 여주와 이천(利川)에만 적의 둔영이 없었기 때문에 성영이 목사(牧使) 남언경(南彦經)과 방어사 변응성(邊應星)과 함께 모두 군사를 주둔시켰으나 감히 적을 공격하지는 못했다. 변응성이 한 차례 죽산(竹山) 길로 진출했다가 패군하여 퇴각하였다.
    • 출전 : 『宣祖修正實錄』 권26, 선조 25년 9월 1일 정사.
  • 1592년(선조 25):성영을 여주목사에 제수하다
    • 내용 : 성영(成泳)을 가선대부 여주목사(驪州牧使)에 제수하였다.
    • 출전 : 『宣祖實錄』 권30, 선조 25년 9월 9일 병인.
  • 1592년(선조 25):이천·여주·음죽·죽산의 의병은 성영의 절제를 받게 하자고 아뢰다
    • 내용 : 비변사가 아뢰기를, “…… 이제 심대(沈岱)의 장계를 보건대, 장단(長湍)과 삭령(朔寧)의 의병은 이정암(李廷巖)의 절제(節制)를 받게 하고, 이천(利川)·여주(驪州)·음죽(陰竹)·죽산(竹山)의 의병은 성영(成泳)의 절제를 받게 하고, 통진(通津)·양천(陽川)의 의병은 김천일(金千鎰)의 절제를 받게 하고, 파주(坡州)·양주(楊州)·광주(廣州)의 의병은 심대의 절제를 받게 하여 동서(東西)가 힘을 합하여 경성을 협공하고자 한다 하였는데, 그 계책이 온편하고 유익하며 일의 계획도 깊이가 있습니다. 이렇게 할 내용으로 제장에게 하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출전 : 『宣祖實錄』 권30, 선조 25년 9월 21일 무인.
  • 1592년(선조 25):비변사가 파직당한 권징 대신 여주 목사 성영이 군량을 조치하도록 청하다
    • 내용 : 비변사가 경기순찰사 권징(權徵)이 파직 당하였고 여주목사(驪州牧使) 성영(成泳)이 이미 가선(嘉善)으로 올랐으니 권징을 대신하게 하여 양향(粮餉)을 조치하되 한결같이 권징이 수취(收聚)한 규례대로 하기를 청하였다.
    • 출전 : 『宣祖實錄』 권32, 선조 25년 11월 17일 계유.
  • 1592년(선조 25):남언경을 여주목사로 삼았다
    • 내용 : 오억령(吳億齡)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심우승(沈友勝)을 지평(持平)으로, 성영(成泳)을 경기좌감사(京畿左監司)로, 이정형(李廷馨)을 우감사(右監司)로, 남언경(南彦經)을 여주목사(驪州牧使)로 삼았다.
    • 출전 : 『宣祖實錄』 권33, 선조 25년 12월 20일 병오.
  • 1594년(선조 27):비변사에서 경기 여주·이천 지방에 도적이 치성하니 토포할 것을 청하다
    • 내용 : 비변사(備邊司)가 아뢰었다. “경기감사(京畿監司)의 장계(狀啓)를 보니 여주(驪州)·이천(利川) 지방에 도적의 세력이 극히 성하여 매우 놀랄 만한데, 이것은 다른 까닭이 아닙니다. ……”
    • 출전 : 『宣祖實錄』 권49, 선조 27년 3월 1일 기묘.
  • 1594년(선조 27):사헌부에서 강원 감사·순변사·여주 목사 등의 파직을 청하다
    • 내용 : 사헌부가 아뢰기를, “…… 여주목사(驪州牧使) 김억추(金億秋)는 어사(御史)의 장계대로 파출(罷黜)했어야 마땅한데 대신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여 잉임(仍任)시켰습니다. 대저 죄를 범해 파출하여야 할 수령들을 매번 적임자(適任者)가 없다고 하여 그대로 둔다면, 봉명(奉命)한 사람의 권한이 가벼워져서 탄압할 수 없게 되는 반면 죄를 범한 이는 습성이 되어 기탄할 것이 없게 되니, 그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 하였다.
    • 출전 : 『宣祖實錄』 권49, 선조 27년 3월 7일 을유.
  • 1594년(선조 27):사간원에서 여주목사 최원의 체직을 청하다
    • 내용 : 사간원이 아뢰기를, “여주목사(驪州牧使) 최원(崔遠)은 용렬하고 나약하여 왜적을 만나자 먼저 도망하여 숨곤 했는데 아직 죄를 입지 않은 것만도 요행입니다. 상류(上流)의 보장(保障)에 관한 지역을 이 사람에게 맡겨둘 수 없으니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출전 : 『宣祖實錄』 권49, 선조 27년 3월 16일 갑오.
  • 1594년(선조 27):사간원에서 여주목사 김계현의 체직을 청하다
    • 내용 : 사간원이 아뢰기를, “여주목사(驪州牧使) 김계현(金繼賢)은 출신(出身)한 지 겨우 몇 해밖에 안 되어 나이도 어리고 경력도 없으며 별로 남보다 뛰어난 재질도 없습니다. ……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출전 : 『宣祖實錄』 권49, 선조 27년 3월 19일 정유.
  • 1595년(선조 28):사헌부에서 호조 참판 성영을 탄핵하다
    • 내용 : 사헌부가 탄핵하기를, “호조 참판 성영(成泳)은 친상(親喪) 중에 있으면서 친하고 미더운 사람을 보내 순찰사(巡察使)에게 요구하여 소모장(召募將)이 되고 여주 목사(驪州牧使)를 점유하였으며, 여러 의병들이 적의 목을 벤 공을 취하여 자기의 공으로 삼는 등 불효 불충한 자취가 시종 드러났으니,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 출전 : 『宣祖修正實錄』 권29, 선조 28년 2월 1일 갑진.
  • 1595년(선조 28):『주역』을 강하고, 일본과의 강화·둔장의 설치 등의 일을 논의하다
    • 내용 : 유영순이 아뢰기를, “전일 이덕형(李德馨)의 차자 중 연강(沿江) 일대에 둔장(屯長)을 설치하여 방수할 계책에 대해서는 위에서 이미 비변사로 하여금 시행케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이 일찍이 여주(驪州)에 우거할 때 오가며 보았는데, 변응성(邊應星)이 용진(龍津)에 진(陣)을 설치한 곳은 지세가 평이하여 의거할 만한 험지가 없고 진 앞에 얕은 여울이 있는데 인마(人馬)가 항상 통행하니 그것으로 험지를 삼기에는 부족했습니다. 변응성은 장목(長木)과 초석(草席)으로 여울을 막으려 하였으니, 그 계획은 매우 오활한 것이었습니다.” “…… 만일 변응성으로 하여금 승군(僧軍)을 거느리고 수축케 한 다음 강가 비옥한 땅에서 농사를 지어 추수한 곡식을 성 안에 쌓아두면서 농사도 짓고 방수도 할 계책을 한다면, 온당할 듯싶습니다. 그리고 여주 이진(梨津)의 건너편에 옛 산성이 하나 있고 그 아래에 얕은 여울이 있어 이름을 성탄(城灘)이라 하는데, 옛 사람이 이 성을 설치한 목적은 필시 이 여울을 지키려는 계획이었을 것입니다. 그 아래에 또 자진포(紫津浦)가 있어 농장(農場)이 매우 좋습니다. 여기에 둔장을 설치하고 농사를 지어 축적해 가면서 경작하고 수비하는 계획을 하는 것 또한 온당합니다. 이 두 곳에 이와 같이 한다면 연강(沿江)의 형세가 이어져서 역시 토적(土賊)의 환란도 없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 유영순이 또 아뢰기를, “여주 땅에 한 사인(士人)이 지금 모속관(募粟官)으로 있습니다. 그가 저번에 와서 이덕형을 보고 모속의 일을 의논했는데 모은 곡식이 역시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사람으로 하여금 둔장을 삼고 모은 곡식으로 둔(屯)의 종자를 삼아 농사를 짓게 할 일을, 혹은 훈련도감에 의논하고 혹은 비변사에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변사와 의논해서 처리하라.” 하였다.
    • 출전 : 『宣祖實錄』 권60, 선조 28년 2월 2일 을사.
  • 1595년(선조 28):예조가 공회빈이 묻힌 곳을 파는 일에 대해 대신들의 의견을 보고하다
    • 내용 : 예조가 아뢰기를, “…… 전 직장(直長) 윤백순(尹百順)은 지금 여주(驪州)에 있고 사옹원 봉사(司饔院奉事) 윤백상(尹百祥)은 지금 사기소(沙器所)에 있다 합니다. 올라오게 하여 함께 참여시켜야 하므로 감히 아룁니다.”
    • 출전 : 『宣祖實錄』 권63, 선조 28년 5월 20일 임진.
  • 1595년(선조 28):중종이 여주에 행행할 때 김안국의 충성스러움을 말하다
    • 내용 :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강관(講官)을 인견하였다. …… 헌국이 아뢰기를, “갑오년에 중종이 여주(驪州)에 행행할 때 김안국은 파직되어 향리에 있었습니다. 길가에 나가 배알하고자 하였지만 물의가 있을까 싶어 드디어는 의관을 갖추고 밭 사이에 몰래 엎드려 거가가 지나가기를 기다렸으니 대개 그의 충성스러움이 이와 같았습니다. 또 안국은 오랫동안 예조판서로 있으면서 외국인을 잘 대우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미담으로 여깁니다.” 하였다.
    • 출전 : 『宣祖實錄』 권64, 선조 28년 6월 15일 병진.
  • 1595년(선조 28):유성룡이 여주에 갔을 때 출신 몇 사람이 농한기에 군사연습을 하자고 하였다고 아뢰다
    • 내용 : 상이 별전에 나아가 비변사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 성룡이 아뢰기를, “소신이 전에 여주(驪州)에 갔더니 출신(出身) 몇 사람이 와서 ‘금년은 농사가 풍년이 들었으니 만일 농한기에 연습하면 어찌 성취되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듣건대, 이시발(李時發)이 군사를 훈련시키고 군사를 나누는 등의 일에 극히 정상(精詳)하다 하니, 경기·충청도에도 차례로 거행하게 하여 장수를 얻어 그에게 맡기면 군사가 없는 근심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파사성(婆裟城)은 극히 험한가? 형세가 어떠한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형세가 너무 드러나서 속에 은밀한 곳이 없고 성 뒤에는 봉우리가 있으니 반드시 평양의 모란봉처럼 험한 요새를 만들어 굳게 지켜야 됩니다.” 하였다.
    • 출전 : 『宣祖實錄』 권68, 선조 28년 10월 17일 병진.
  • 1595년(선조 28):여주에 있는 파사의 옛 성을 수축하다
    • 내용 : 여주(驪州)에 있는 파사(婆娑)의 옛 성을 수축하였다. 이 성의 상류를 방수(防守)하는 것이 가장 긴급하다는 대신의 건의에 따라 승장(僧將) 의엄(義嚴)을 보내 역사를 감독하게 하는 한편, 소주(小洲)에 목책(木柵)을 설치하여 좌방어사(左防禦使) 변응성(邊應星) 등에게 군사를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다. 그러나 성안에 우물이 없었으므로 군사들 모두가 ‘지킬 수 없다’고 하는가 하면 변응성 또한 굳은 뜻이 없어 공역만 요란스러워졌는데, 의엄 역시 지나치게 감독하였으므로 원망을 불러 일으켰다. 이때 산성을 쌓는 일 모두가 그저 수고롭기만 했을 뿐 실속이 없었으므로 사민(士民)들이 괴롭게 여겼다.
    • 출전 : 『宣祖修正實錄』 권29, 선조 28.
  • 1596년(선조 29):비변사에서 배신의 문제가 중요하니 안동에 있는 수상 유성룡을 속히 귀경토록 청하다
    • 내용 : 비변사가 아뢰기를, “…… 듣건대 유성룡(柳成龍)이 안동(安東)에서 이미 떠났다고 하니 머지않아 들어올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러나 여주(驪州) 등지에서 방어사(防禦使)와 더불어 군사를 모아서 습진(習陣)하고자 하니, 만약 그렇다면 필시 많은 시일을 지체할 것입니다. 속히 돌아오게 하는 일로 하서(下書)하여 알리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 하니, 상이 따랐다.
    • 출전 : 『宣祖實錄』 권73, 선조 29년 3월 19일 병술.
  • 1596년(선조 29):유성룡이 노모를 만나고 돌아오자 영남의 정세를 묻고 여러 가지 정사를 논의하다
    • 내용 :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아뢰기를, “…… 신이 내려갈 때 여주(驪州)를 지나는 도중 말에서 떨어져 물에 빠져서 중상을 입었고, 집에 돌아가서는 또 노모의 쇠약한 숨소리가 실낱같음을 보니 사정(私情)이 절박하여 속히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날 지체하여 두 번씩이나 소명을 받게 되었으며, 도중에 또 계속 비에 막히어 지금에야 비로소 들어오게 되었으니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여 대죄합니다.” 하였다.
    • 출전 : 『宣祖實錄』 권74, 선조 29년 4월 2일 무술.
  • 1596년(선조 29):윤국형에게 여주목사 관직을 제수하다
    • 내용 : 윤국형(尹國馨)을 여주 목사(驪州牧使)로 삼았다.
    • 출전 : 『宣祖實錄』 권80, 선조 29년 9월 9일 임인.
  • 1596년(선조 29):대신 및 비변사 유사당상과 함께 왜적 침입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다
    • 내용 : 유성룡이 아뢰기를, “죽령(竹嶺) 이하 원주(原州)와 여주(驪州)의 경계에서 차단하는 것이 가장 급합니다.” 하였다.
    • 출전 : 『宣祖實錄』 권82, 선조 29년 11월 7일 기해.
  • 1596년(선조 29):우부승지 우준민이 승 의엄을 첨지에 제수하는 것에 대해 아뢰다
    • 내용 : 우부승지(右副承旨) 우준민(禹俊民)이 비변사의 말에 따라 아뢰기를, “승인(僧人) 의엄(義儼)이【무뢰한 중인데, 여주(驪州)에 성을 쌓고 공무를 빙자하여 위세를 부리므로 백성들이 자못 괴로워했다】 첨지(僉知)의 실직(實職)에 제수되기까지 하였으므로, 마음에 미안한 바가 있어 상소하여 갈아주기를 청하였습니다.”
    • 출전 : 『宣祖實錄』 권82, 선조 29년 11월 19일 신해.
  • 1596년(선조 29):여주 재상 색리 장윤정의 억울함을 호소하다
    • 내용 :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이호민(李好閔)이 아뢰기를, “저번에 여주 재상색리(災傷色吏) 장윤정(張允貞)의 아우 장윤금(張允金)이 가전상언(駕前上言)하여 장윤정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전 목사(牧使) 김협(金)의 선정(善政)과 감사(監司) 홍이상(洪履祥)의【재기(才器)가 직임에 못 미친다. 경기는 중요한 곳인데 허술한 일이 많으니 어찌 근심할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과오를 극진히 말하였습니다.”
    • 출전 : 『宣祖實錄』 권82, 선조 29년 11월 21일 계축.
  • 1597년(선조 30):노직이 파사성과 용진 사이의 부용성에 망대 쌓아 적을 막는 일을 아뢰다
    • 내용 : 노직은 아뢰기를, “여주(驪州) 이하 강가에는 도체찰사(都體察使)가 작은 둔덕을 만들고 그 위에 장대를 세워, 밤에는 등을 달아 서로 응하게 하고 낮에는 깃발을 올려 서로 보이게 하였는데, 급보가 있을 때는 신속히 전달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 노직이 아뢰기를, “…… 또 파사성(婆娑城)과 용진(龍津) 사이에 부용성(芙蓉城)이 있는데 흙으로 쌓아서 망대(望臺)로 삼으려 합니다. 사궁성(舍弓城)이 또 양근군(楊根郡)에 있는데, 서쪽 성이 매우 험준하므로 사람들이 들어가 지키면서 피란의 계책을 세우려 합니다. 군 남쪽에 남산이 있고, 산에는 모래가 깔린 여울이 있는데 이곳을 높이 막으면 여주(驪州)와 충주(忠州)에서 오는 적이 반드시 마음대로 파사·용진 밖으로 침투해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물력(物力)이 궁핍하기 때문에 미처 수축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어느 고을을 순찰하고 돌아왔는가?” 하니, 노직이 아뢰기를, “신이 도체찰사와 광주(廣州)·용진·양주(楊州)·여주·파사성을 지나 신은 먼저 이천(利川)·죽산·안성·양성(陽城)으로 향했다가 수원의 습진처(習陣處)로 모였고 체찰사는 여주로부터 양지(陽智)·용인·진위(振威)를 경유했는데 신은 수군의 일 때문에 먼저 경성으로 돌아오고, 체찰사는 그대로 남양(南陽)·안산(安山)으로 향했다가 입성(入城)했습니다.” 하였다. …… 노직이 아뢰기를, “난리가 일어난 뒤에 적을 토벌하다가 죽은 자로 원호(元豪)만한【충성스럽고 용맹한 기개와 굳세고 매서운 절의는 실로 쉽게 얻을 수 없었다】 자가 없습니다. 여주(驪州) 후미포(後尾浦)의 적을 원호가 모두 섬멸했습니다.” 하였다.
    • 출전 : 『宣祖實錄』 권85, 선조 30년 2월 25일 병술.
  • 1597년(선조 30):수영 소속 여주·지평 등의 수군을 제번시켜 파사성에 속하게 하자는 건의
    • 내용 : 비변사가 아뢰기를, “…… 또 경기의 수영(水營)이 남양(南陽)에 있어서 서울과의 거리가 상당히 멀므로 위급한 일이 닥치면 제때에 전진하기가 어려울 듯하니, 수사(水使)로 하여금 바람과 파도가 높아지기 전에 강화(江華)·덕포(德浦) 등지로 가서 교동(喬洞)과 강화의 수로군(水路軍)을 모두 주사(舟師)에 소속시켜 농한기(農閑期)에 수전(水戰)을 연습시켰다가 유사시에는 그들을 거느리고 책응하게 하며, 수영에 소속된 여주(驪州)·지평(砥平) 등 먼 고을의 수군(水軍)은 제번(除番)시켜 파사성(婆娑城)에 소속되게 하여 상류(上流) 쪽을 방비하게 하는 것이 피차에 편리할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 출전 : 『宣祖實錄』 권86, 선조 30년 3월 9일 기해.
  • 1597년(선조 30):여주에 있는 지평 이심을 속히 올라오라고 하유하다
    • 내용 : 장령 권경우(權慶祐)가 와서 아뢰기를, “지평 이심이 현재 경기(京畿) 여주(驪州) 땅에 있으니 속히 올라오라고 하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유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 출전 : 『宣祖實錄』 권89, 선조 30.
  • 1597년(선조 30):왜군이 철수하는 까닭에 관해 비변사 당상들과 논의하다
    • 내용 : 홍진이 아뢰기를, “어제 저녁 비변사에서 이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이 왜적이 안성(安城)을 경유하여 곧장 여주(驪州)로 향해서 상류로 돌아 나오려는 것이 아닌가?’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렇지 않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김수(金晬)는 말하기를 ‘왜적은 필시 충주(忠州)의 길을 택하여 영남(嶺南)으로 철수해 돌아갈 것이다. 중국 장수가 상세히 정탐한 뒤이어서 절대로 그럴 리가 없으니 의심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다’ 하였고, 유성룡(柳成龍)은 역시 말하기를 ‘왜적이 바로 쳐들어 올 수 있는 세력을 갖고 있는데 무엇을 꺼려 이렇게 군사를 몰래 움직여 돌아 나오는 계책을 세우겠는가’ 하였습니다.” 하였다.
    • 출전 : 『宣祖實錄』 권92, 선조 30년 9월 15일 임인.
  • 1597년(선조 30):충주의 부족한 양곡은 여주·이천의 양곡을 수송하여 보태자고 아뢰다
    • 내용 : 호조판서 김수(金晬)가 아뢰기를, “…… 본도의 양곡이 부족하다면 양호(兩湖) 부근과 충주(忠州)에 현존한 양곡을 차차로 군전(軍前)에 수송하되, 충주의 양곡은 본도 근방의 양곡을 변통하여 옮겨다 보충하고 그러고도 부족하면 경기 인근 여주(驪州)·이천(利川)의 양곡을 잇달아 수송하여 보태는 것이 양쪽 모두에 편리할듯합니다.” 하였다.
    • 출전 : 『宣祖實錄』 권95, 선조 30년 12월 23일 기묘.
  • 1598년(선조 31):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여주목사 안진(安璡)을 처벌하기를 아뢰다
    • 내용 : 헌부(憲府)가【행 대사헌(行大司憲) 이헌국(李憲國), 집의 이함(李函), 지평 이필형(李必亨)·이이첨(李爾瞻)이다】 아뢰었다.
      “…… 여주목사(驪州牧使) 안진(安璡)은 부임한 뒤로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내는 것으로 일을 삼고 있어서 온 지역의 백성들이 사방으로 떠돌아 거의 없어졌습니다. 지난번 상께서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시어 거둥이 있자 지공(支供)한다는 핑계로 교묘한 명목(名目)을 만들어 민간에게 거두어들이면서 매질이 낭자하였는가 하면 1백여 석의 미두(米豆)를 끝내 조처한 곳이 없으니, 이와 같이 탐욕스럽고 방자한 사람은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잡아다가 국문하소서. 그의 대임(代任)은 문관(文官) 가운데서 각별히 택차하소서.”
    • 출전 : 『宣祖實錄』 권97, 선조 31년 2월 11일 병인.
  • 1598년(선조 31):복수청이 군량수송 문제를 아뢰다
    • 내용 : 복수청(復讐廳)이 아뢰기를, “…… 부근의 복수군(復讐軍)으로 여주(驪州)·원주(原州)·홍천(洪川)·횡성(橫城)은 충주(忠州)와 가깝고, 고성(高城)·간성(杆城)·양양(襄陽)·강릉(江陵)·삼척(三陟)·평해(平海)·울진(蔚珍)은 영해(寧海)와 거리가 멀지 않으며, 이상 13고을에 모여진 곡식은 330석이고, 응모한 사람의 수는 납량자(納粮者)까지 합하여 모두 850여명에 달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노약자와 여자는 제외하더라도 800명은 될 것이니, 그 인원으로 3백 석의 곡식을 운반한다면 그리 많은 힘을 들이지 않고도 쉽게 운반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 출전 : 『宣祖實錄』 권99, 선조 31년 4월 27일 신사.
  • 1598년(선조 31):비변사가 군량의 운반 문제를 건의하다
    • 내용 : 비변사가 아뢰기를, “여주(驪州) 이상은 강물이 더욱 얕고 험한 여울이 매우 많은 까닭에 배를 부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주의 물길이 고루 알맞은 곳에 참을 설치하고 양선(粮船)으로 하여금 그곳에 짐을 부리게 하면 한 달에 4~5차례 왕래할 수 있으니, 얼음이 얼기 전에 3~4만 석은 운반할 수가 있습니다. 여주에서 충주(忠州)까지의 거리는 하룻길이니, 경기의 각참에 분정(分定)한 군사가 도착하는 대로 운반하게 하면 며칠 안에 충주로 수송을 마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다시 양 안찰(梁按察)에게 품의(禀議)하여 결정해서 거행하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 출전 : 『宣祖實錄』 권104, 선조 31년 9월 1일 계미.
  • 1598년(선조 31):서 급사에게 군사·병마·군량·성곽 수선 등에 대해 회자하다
    • 내용 : 서 급사에게 회자(回咨)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현재 여주(驪州)로 운반하는 천조 및 우리나라의 소미가 모두 5,050석, 콩이 3,010석인데, 이상의 쌀과 콩은 동로와 중로의 두 길로 전송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 출전 : 『宣祖實錄』 권104, 선조 31년 9월 28일 경술.
  • 1599년(선조 32):정엽을 여주목사로 삼았다
    • 내용 : 정엽(鄭曄)을【송익필(宋翼弼)을 사사(師事)하면서 평소 하는 일마다 그의 지휘를 받았다. 송익필은 기묘(己卯) 고변인(告變人) 송사련(宋祀連)의 아들인데, 그 역시 흉패하여 분수에 지나쳤다. 정엽이 그를 존경하여 섬겼으니 그 심술이 부정한 것은 하등 괴이할 게 없다.】 여주목사(驪州牧使)로 삼았다.
    • 출전 : 『宣祖實錄』 권114, 선조 32년 6월 4일 신사.
  • 1599년(선조 32):도승지 최천건이 중국 군대의 주둔 문제에 대해 의논할 것을 청하다
    • 내용 : 도승지 최천건(崔天健)이 호조(戶曹)의 말로 아뢰기를, “…… 그리고 가을의 조세(租稅)로 말하건대 경기(京畿)의 경우는 전년의 세입(稅入)이 2,300여석(石)이었고, 갑오년에는 큰 흉년이 들었는데도 1,100여석이 되었는데, 올해는 겨우 900여석밖에 되지 않습니다. 광주(廣州)와 여주(驪州)는 기전(畿甸)의 큰 고을인데도 광주는 7석뿐이고 여주는 19석뿐이니, 이로써 미루어 보면 다른 지방의 사정은 알 만한데, 세입을 제외하고는 모두 보잘것없으니 거둬들여야 할 곡식은 거의 다 거두어 쓴 형편입니다.”
    • 출전 : 『宣祖實錄』 권119, 선조 32년 11월 6일 신해.
  • 1600년(선조 33):경기감사 한덕원이 수원부의 재실 장계에 따른 세금징수 문제로 아뢰다
    • 내용 : 경기감사 한덕원(韓德遠)이 치계(馳啓)하였다. “수원부사(水原府使) 최산립(崔山立)의 정문(呈文)에 ‘연분(年分)의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것은 국가의 중대사이다’ 그런데 여주(驪州)와 광주(廣州)의 세입(稅入)이 10석(石)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본부(本府)는 지난해의 재실(災實)을 십분 참작한 결과 세입의 숫자가 미태(米太)를 합쳐 모두 202석 6두(斗)였는데,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은 고을이라 하여 이를 개정(改正)해서 세금을 더 거두어들이고 있으니 매우 애매한 일이다.”
    • 출전 : 『宣祖實錄』 권123, 선조 33년 3월 1일 갑진.
  • 1600년(선조 33):사헌부에서 지평 박진원을 여주에서 올라오도록 아뢰다
    • 내용 : 사헌부가 잇따라 아뢰기를, “전에 아뢴 대로 황해 병사 김수남(金壽男)은 체차하소서. 지평 박진원은 지금 경기 여주(驪州)에 있으니 속히 올라오게 할 것으로 하유하소서.” 하였다.
    • 출전 : 『宣祖實錄』 卷123, 宣祖 33년 3월 26일 己巳.
  • 1600년(선조 33):경기 관찰사가 관명을 사칭한 이주부라는 사람을 치죄할 것을 아뢰다
    • 내용 : 경기관찰사가 치계하였다. “그리고 광주(廣州)의 쇄마(刷馬)와 여주(驪州)의 쇄마를 가지고 오는 나장(羅將) 2인을 전도(前導)로 삼아 여주로 달려 들어가서 공형(公兄)과 색리(色吏) 등에게 형신(刑訊)을 가하면서 술과 안주를 내오라고 독책하였다는 것입니다. 사정(事情)이 매우 수상하여 추적하게 하였더니 동대문 밖에 사는 이 주부(李主簿)라는 사람으로 전에도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접반관(接伴官)이라고 사칭하면서 폐단을 부린 사람이라고 합니다. 각별히 체포하여 정죄(定罪)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출전 : 『宣祖實錄』 권123, 선조 33년 3월 29일 임신.
  • 1601년(선조 34):대사헌 성영이 임진난 때 자신의 불효·불충을 들어 파직을 청하다
    • 내용 : 대사헌(大司憲) 성영(成泳)이 아뢰기를, “신이 임진왜란 당시 아비 상을 당하여 광주(廣州)·여주(驪州) 지역에 있다가 갑자기 대적(大賊)이 침범해 옥여(玉輿)가 서쪽으로 행했다는 소식을 듣고 길이 멀어 뒤따를 수가 없어 서쪽을 향해 두 번 절하니 눈물이 비 오듯 하였습니다. ……”
    • 출전 : 『宣祖實錄』 卷133, 宣祖 34년 1월 16일 乙卯.
  • 1601년(선조 34):헌부가 여주목사를 잘못 추고하게 한 것에 대해 아뢰다
    • 내용 : 헌부가 아뢰기를, “작년 12월에 산릉도감(山陵都監)이 정자각(丁字閣)에 쓰일 기와를 때맞추어 들여오지 못한 일로 경기 도사·차사원(差使員) 등을 추고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계사 안에 ‘도차사원(都差使員)·여주목사(驪州牧使) 이외에는 아울러 추고를 명하소서’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전지를 받들 때 외(外)자 한 자를 빠뜨려서 여주 목사를 아울러 추고하게 하여 죄 없는 사람이 같이 죄를 받게 하였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하였다.
    • 출전 : 『宣祖實錄』 卷140, 宣祖 34년 8월 21일 丙戌.
  • 1601년(선조 34):헌부가 김거병이 여주판관으로 있을 때의 일을 들어 체직을 청하다
    • 내용 : 헌부가 아뢰기를, “…… 김거병의 위인은 애당초 이렇다 할 재주나 지혜가 없을 뿐더러 지난 임진란 때에는 여주판관(驪州判官)으로 있으면서 분발하여 적을 토벌하지 않았으므로 여론이 지금까지 그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그대로 중임을 맡길 수 없으니 체차(遞差)를 명하소서.”
    • 출전 : 『宣祖實錄』 권141, 선조 34년 9월 22일 병진.
  • 1602년(선조 35):한순을 여주목사로 삼았다
    • 내용 : 한순(韓諄)을 여주목사(驪州牧師)로 삼았다.
    • 출전 : 『宣祖實錄』 권150, 선조 35년 5월 13일 갑술.
  • 1602년(선조 35):이시언을 여주목사로 삼았다
    • 내용 : 이시언(李時彦)을 여주 목사(驪州牧師)로 삼았다.
    • 출전 : 『宣祖實錄』 권150, 선조 35년 5월 20일 신사.
  • 1602년(선조 35):김홍미를 여주목사로 삼았다
    • 내용 : 이시언(李時彦)을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시언은 당시 여주(驪州)를 맡고 있었는데, 정치를 잘 한다는 칭찬이 있었기 때문에 옮겨 제수한 것이다】 홍사효(洪思斅)를 평산부사(平山府使)로, 김홍미(金弘微)를 여주목사(驪州牧使)로, 홍구상(洪龜祥)을 자산군수(慈山郡守)로 삼았다.
    • 출전 : 『宣祖實錄』 권152, 선조 35년 7월 6일 을축.
  • 1602년(선조 35):우준민를 여주목사에 제수
    • 내용 : 우준민(禹俊民)을 여주목사(驪州牧使)로 삼았다.
    • 출전 : 『宣祖實錄』 권154, 선조 35년 8월 27일 병진.
  • 1604년(선조 37):이자해를 여주교수에 제수
    • 내용 : 이자해(李自海)를 여주교수(驪州敎授)로 삼았다.
    • 출전 : 『宣祖實錄』 권175, 선조 37년 6월 26일 을사.
  • 1605년(선조 38):윤양을 여주목사에 제수
    • 내용 : 윤양(尹暘)을 여주목사(驪州牧使)로, 유대정(兪大禎)을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이경천(李慶千)을 부평부사(富平府使)로 삼았다.
    • 출전 : 『宣祖實錄』 권183, 선조 38년 1월 4일 기묘.
  • 1605년(선조 38):파사산성을 승려 영주에게 맡겨 수선·수호케 하자고 비변사가 아뢰다
    • 내용 : 비변사가 아뢰기를, “파사산성(婆娑山城)은 상류의 요충지로 용진(龍津)과 더불어 서로 의지가 되는 형세이니 기보(畿輔)의 보장(保障)이 될 만합니다. 당초에 승도(僧徒)를 모으거나 별장(別將)을 정하여 경영, 수축(修築)했던 것은 범연한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용진은 지금까지 그대로 별장을 정하여 수직하게 하였으므로 그래도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파사성은 의엄(義儼)이 역사(役事)를 파한 뒤 여주(驪州)의 관원만으로 감호(監護)하게 하고 조정에서는 잊어버린 듯 조처하지 않았으므로 성중에 모여 들었던 자들도 거의 모두 흩어지고 성첩(城堞)은 허물어지고 기계(器械)도 산망(散亡)하여 몇 년 지나지 않아 폐기될 지경이니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지금 듣자니 승려 영주(靈珠)가 제법 사려가 깊어 모든 공가(公家)의 일에 정성을 다해 봉행하는데 지난번 죽산산성(竹山山城)을 수축할 때도 공로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를 주지(住持)로 임명하여 성 안에 들어가 승도들을 널리 모집하여 함께 거처하며 수선(修繕), 수호(守護)하게 하고 다른 역(役)은 시키지 말되, 본사에서 수시로 낭청을 보내 검칙하는 것이 온당할듯합니다.”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출전 : 『宣祖實錄』 권189, 선조 38년 7월 11일 계미.
  • 1605년(선조 38):양주·여주·파주·마전·지평·포천지역의 풍수해 실상을 이정구가 보고하다
    • 내용 : 경기감사 이정구(李廷龜)가 치계하였다. “…… 여주(驪州)·파주(坡州)·마전(麻田)·지평(砥平)·포천(抱川)·양천(陽川) 등은 시냇물이 범람해서 전답이 모두 침수되어 떨어져 나가거나 모래로 뒤덮여 이미 추수의 가망이 없는 데다 20일의 대풍으로 나무가 뽑히고 기왓장이 날아가고 벼가 쓰러지고 각종 곡식의 덩쿨과 줄기까지도 모두 걷혀 소금에 절인 듯 시들어 버려 다시 호미질 할 곳이 없습니다. 풍수의 재해가 이처럼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 출전 : 『宣祖實錄』 권189, 선조 38년 7월 24일 병신.
  • 1606년(선조 39):김현성을 여주목사에 제수
    • 내용 : 김현성(金玄成)을 여주목사(驪州牧使)로 삼았다.
    • 출전 : 『宣祖實錄』 권206, 선조 39년 12월 6일 경자.
  • 1607년(선조 40):여주목사 김현성을 파직
    • 내용 : 간원이 아뢰기를, “여주목사(驪州牧使) 김현성(金玄成)은 나이도 노쇠하고 성품조차 오활하여 도임한 후로 모든 공무를 일체 아전들의 손에 위임하였으므로 백성의 원망이 극심하니 파직시키고 그 후임을 십분 가려서 보내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출전 : 『宣祖實錄』 권210, 선조 40년 4월 4일 병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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