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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중종

  • 1506년(중종 1):대간이 여주목사 우윤공을 탄핵함
    • 내용 : 대간이 또 아뢰기를, “여주(驪州) 목사 우윤공(禹允功)은 성품이 본래 탐도(貪盜)하여, 지난번 광주판관(光州判官)이 되었을 적에 고을 사람이 원망을 품고 활까지 쏘아서 고을 이름을 강등하기에 이르렀으며, 그 뒤 두어 고을을 역임하면서도 모두 탐포(貪暴)하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지금 여주에 있어서도 침탈이 그침이 없어 백성이 명령을 감당하지 못하며, 장단(長湍)에서 역사를 감독하였을 적에도 군인(軍人)을 침해하고 공사를 빙자하여 자기의 일을 하니, 이와 같은 폭리(暴吏)는 다시 써서는 안 됩니다.”
    • 출전 : 『中宗實錄』 권1, 중종 1년 10월 19일 갑자.
  • 1507년(중종 2):대간이 공신 및 조계형·신은윤 등의 일을 개정하기를 청함
    • 내용 : 대간이 공신 및 조계형·신은윤 등의 일을 개정하기를 청하고, 이어 아뢰기를, “내금위장(內禁衛將) 우윤공(禹允功)은 전임 수령(守令)으로 가는 곳마다 잔인하고 탐욕한 정치를 행하다가, 여주(驪州)목사가 되어 파면을 당하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통쾌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켤코 쓸 만한 사람이 아니니 개정해 주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출전 : 『中宗實錄』 권4, 중종 2년 10월 7일 정축.
  • 1511년(중종 6):김수동이 여주의 예에 따라 광주판관의 임시 정지를 아룀
    • 내용 : 김수동(金壽童) 등이 의논드리기를, “광주(廣州)는 잔폐하기가 심하니, 여주(驪州)의 예(例)에 의하여 임시로 판관(判官)을 파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출전 : 『中宗實錄』 권13, 중종 6년 4월 24일 계묘.
  • 1512년(중종 7):헌부가 돈영 도정 우윤공을 탄핵함
    • 내용 : 대간이 전의 일을 아뢰고, 헌부가 또 아뢰기를, “우윤공(禹允功)은 본성이 잔혹한 사람으로 전에 여주목사(驪州牧使)로 있을 때, 옳지 못한 짓을 많이 하였으니, 혹 군직(軍職)을 제수하더라도 불가하거늘, 하물며 돈영 도정(敦寧都正)이겠습니까. 모두 갈아야합니다.” 하였다.
    • 출전 : 『中宗實錄』 권15, 중종 7년 3월 25일 경오.
  • 1512년(중종 7):시강관 김영이 여주 등의 이변에 대해 임금의 경계를 말함
    • 내용 : 석강에 나아갔다. 『송감(宋鑑)』 고종기(高宗紀)의 일식(日食)이 보이지 않았다는 데에 이르러, 시강관(侍講官) 김영(金瑛)이 아뢰었다. “…… 신은 근자에 한강 물이 검게 흐려서 바닥이 보이지 않는데 강변 사람들이 그 이유를 모르고 물이 뒤집힌 것이라고 여기며, 여주(驪州) 이상은 물이 피처럼 붉은데도 이런 재변을 아뢰는 사람이 없습니다. 신이 처음 듣고서 절로 놀랐습니다. 상께서는 공구 수성(恐懼修省)하여 하늘의 경계에 근신하소서.”
    • 출전 : 『中宗實錄』 권15, 중종 7년 4월 2일 병자.
  • 1512년(중종 7):경기도관찰사 이자견이 자연의 이변에 대해 말함
    • 내용 : 경기도 관찰사 이자견(李自堅)이 치계(馳啓)하였다. “여주(驪州) 이상의 물이 붉은 것과 한강 물이 검게 흐렸다는 데에 대하여 강변 노인들을 찾아 물으니, 모두들 ‘지난 2월 사이에 강물이 검게 흐렸는데 약간 붉은 색이 있으면서 검은 빛이 많았고, 4, 5일이 지난 뒤에 그전처럼 맑아졌다’ 합니다. ……”
    • 출전 : 『中宗實錄』 권15, 중종 7년 4월 16일 경인.
  • 1512년(중종 7):경세창이 여주목사 유경의 제수에 반대함
    • 내용 : 경세창이 또 아뢰기를, “여주 목사(驪州牧使) 유경(柳坰)은 늙었을 뿐만 아니라 전에 간성 군수(杆城郡守)가 되어 벼슬을 살 때 재물을 탐하고 비루한 짓을 하였으니, 수령이 될 수 없습니다.” 하였다.
    • 출전 : 『中宗實錄』 권16, 중종 7년 7월 1일 임신.
  • 1512년(중종 7):간원이 여주목사 최옥호를 탄핵함
    • 내용 : 대간이 다시 정극인·유장(柳璋)·강태수(姜台壽) 등의 일을 아뢰었다. 간원(諫院)이 아뢰기를, “여주목사(驪州牧使) 최옥호(崔玉皓)는 전일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있을 때에 벼슬살이를 삼가지 아니하여 피폐를 가져왔으니, 개정하소서.” 하였다.
    • 출전 : 『中宗實錄』 권16, 중종 7년 7월 6일 정축.
  • 1513년(중종 8):여주에 지진 발생
    • 내용 : 경기 여주(驪州) 등 읍에 지진이 있었다.
    • 출전 : 『中宗實錄』 권18, 중종 8년 5월 16일 계미.
  • 1513년(중종 8):사신이 우윤공이 여주목사로 있을 때 잘못을 이야기함
    • 내용 : 사신은 논한다. 우윤공은 …… 연산군 갑자년 여주목사(驪州牧使)로 있을 때에 연산이 장단(長湍)의 석벽(石壁)에다 별궁(別宮)을 지었는데, 윤공이 차사원(差使員)이 되어 마음대로 금품을 긁어 들이면서 밤낮으로 공정(功程)을 독촉하여 받아들인 집물(什物)이 산같이 쌓이니, 배로 경강(京江)에 운반하여 팔아서 사리(私利)로 만들었는데, 다른 일도 이와 같았다.
    • 출전 : 『中宗實錄』 권18, 중종 8년 5월 25일 임진.
  • 1514년(중종 9):충주와 경기 여주에 우박이 내림
    • 내용 : 충청도 충주(忠州)와 경기 여주(驪州)에 우박이 내렸다.
    • 출전 : 『中宗實錄』 권20, 중종 9년 4월 15일 무진.
  • 1517년(중종 12):경기의 죽산·음죽·여주와 충청도의 청양에 우박이 내림
    • 내용 : 경기의 죽산(竹山)·음죽(陰竹)·여주(驪州)와 충청도(忠淸道)의 청양(靑陽)에 우박이 내렸다.
    • 출전 : 『中宗實錄』 권28, 중종 12년 5월 2일 병자.
  • 1519년(중종 14):경기의 여주 등 여러 고을에 서리가 내리고 물이 엄
    • 내용 : 경기의 여주(驪州) 등 열일곱 고을에 서리가 내리고 물이 얼었다.
    • 출전 : 『中宗實錄』 권36, 중종 14년 8월 25일 병술.
  • 1520년(중종 15):이중이 두 차례 형신을 받고서 복초하고 이신을 다시 추문함
    • 내용 : 이중(李中)의 공초(供招)에, …… “음죽을 지나 여주(驪州)의 이름 모를 사람의 집에 갔더니 거동이 황당하다 하여 거절당하였으므로 굶고 산기슭에서 자고, 15일에 서울로 들어와 아비 이름이 이연동(李延同)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자고, 16일에 고변(告辯)하였습니다.” 하였다.
    • 출전 : 『中宗實錄』 권39, 중종 15년 4월 20일 정축.
  • 1520년(중종 15):대간이 전의 일을 논하고 헌부가 여주목사 이곤을 체직시킬 것을 아룀
    • 내용 : 대간이 전의 일을 논하고, 헌부가 또 아뢰기를, “여주목사(驪州牧使) 이곤(李坤)은 제수(除授)한 지가 이미 오랩니다. 근래 인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즉시 아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만, 지난번 듣건대 잘못한 일이 많아서 물론(物論)이 모두들 수령(守令)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속히 체직시키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 출전 : 『中宗實錄』 권41, 중종 15년 11월 21일 을해.
  • 1521년(중종 16):여주 충찬위 남영희의 아내가 죽은 남편을 따라 자결함
    • 내용 : 여주(驪州) 사는 충찬위(忠贊衛) 남영희(南永禧)가 강에서 목욕하다가 발을 잘못 디뎌 깊은 물에 빠져 죽었다. 그의 아내 유씨(庾氏)가 비명에 간 남편을 슬퍼한 나머지 드디어 목매어 죽음으로써 남편의 뒤를 따랐다.
    • 출전 : 『中宗實錄』 권41, 중종 16년 4월 27일 무신.
  • 1522년(중종 17):경기 여주에 우박이 내림
    • 내용 : 경기 여주(驪州)에 우박이 내렸다.
    • 출전 : 『中宗實錄』 권44, 중종 17년 4월 3일 기묘.
  • 1522년(중종 17):경기·강원·경상에 우박, 천둥 발생
    • 내용 : 경기(京畿)의 이천(利川)·삭녕(朔寧)·양근(楊根)·지평(砥平)·용인(龍仁)·연천(連川)·진위(振威)·여주(驪州)와 황해도의 신천(信川)·배천(白川)·문화(文化)·송화(松禾)에 우박이 내렸다.
    • 출전 : 『中宗實錄』 권44, 중종 17년 5월 3일 무신.
  • 1523년(중종 18):경기의 여주·양근에 흙비가 내림
    • 내용 : 경성(京城)에 흙비가 내리고 경기(京畿)의 여주(驪州)와 양근(楊根)에도 흙비가 내렸다.
    • 출전 : 『中宗實錄』 권47, 중종 18년 3월 1일 임인.
  • 1523년(중종 18):경기 여주 등 전국 각지에 우박 발생
    • 내용 : 경기(京畿)의 양주(楊州)·부평(富平)·이천(利川)·양지(陽智)·양천(陽川)·적성(積城)·포천(抱川)·가평(加平)·김포(金浦)·용인(龍仁)·안성(安城)·수원(水原)·풍덕(豊德)·장단(長湍)·양근(楊根)·여주(驪州)·고양(高陽)·교동(喬桐)·통진(通津)과 평안도의 영변(寧邊)·덕천(德川)·맹산(孟山)·운산(雲山)과 황해도의 연안(延安)·곡산(谷山)·배천(白川)·신계(新溪)와 강원도의 원주(原州)·금성(金城)에 우박이 내렸다.
    • 출전 : 『中宗實錄』 권47, 중종 18년 4월 24일 갑자.
  • 1524년(중종 19):경기도 용인·여주 등지에 우박이 내림
    • 내용 : 경기 용인(龍仁)·죽산(竹山)·양지(陽智)·지평(砥平)·양근(陽根)·여주(驪州)·이천(利川)에 우박이 내렸다.
    • 출전 : 『中宗實錄』 권50, 중종 19년 3월 25일 경인.
  • 1524년(중종 19):경기 양성·여주 등지에 우박이 내림
    • 내용 : 경기 양성(陽成)·수원(水原)·여주(驪州)에 우박이 내렸다.
    • 출전 : 『中宗實錄』 권50, 중종 19년 4월 7일 신축.
  • 1525년(중종 20):경기도 여주에 우박이 내림
    • 내용 : 경기 여주(驪州)에 우박이 내렸다.
    • 출전 : 『中宗實錄』 권54, 중종 20년 5월 28일 병술.
  • 1525년(중종 20):여주목사를 문관으로 할 것을 지시함
    • 내용 : 석강에 나아갔다. …… 특진관 윤은보(尹殷輔)가 아뢰기를, “조정에 있는 무신(武臣)은 과연 수가 적습니다. 또한 강릉(江陵) 같은 데는 풍속이 문학(文學)을 숭상하므로 문신을 보내지 않을 수 없고, 여주(驪州)는 또한 영릉(英陵)이 있기 때문에 이전부터 당상 문신을 보냈는데, 수가 적으므로 남행(南行)과 무신도 섞여 차임(差任)되고 있으니, 마땅히 참작해서 요량하여 차임해야 합니다.” 하였다.
    • 출전 : 『中宗實錄』 권55, 중종 20년 9월 14일 경오.
  • 1526년(중종 21):호조판서 안윤덕 등이 흉년으로 적전의 벼와 동철의 이용을 아룀
    • 내용 : 호조판서 안윤덕(安潤德)·참판 조옥곤(趙玉崑)·참의 이세정(李世貞)이 아뢰기를, “전일 경기(京畿)의 볍씨가 절핍된 것 때문에, 직전(職田)·공신전(功臣田)·별사전(別賜田)을 전부 감하였습니다. …… 또한 본도(本道)의 감사로 하여금 각 고을을 배정하여 마땅히 광주(廣州)에서 몇 석 여주(驪州)에서 몇 석을 받도록 하여, 새 벼는 종자로 쓰고 묵은 곡식은 양식으로 쓰게 한다면 동철은 모두 곡식이 되고 굶주리는 민중들이 또한 농사에 힘을 쓰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 출전 : 『中宗實錄』 권56, 중종 21년 1월 17일 경자.
  • 1526년(중종 21):경기의 마전·광주 등지와 전라도의 남원·해남 등지에 우박이 내림
    • 내용 : 경기의 마전(麻田)·광주(廣州)·여주(驪州)·이천(利川)·죽산(竹山), 전라도의 남원(南原)·해남(海南)·강진(康津)·금산(錦山)·진안(鎭安)·창평(昌平) 등의 고을에 우박이 내렸다.
    • 출전 : 『中宗實錄』 권56, 중종 21년 3월 23일 병오.
  • 1527년(중종 22):경기도 여주·양근에 우박이 내리고, 강원도 5고을에 우박이 내림
    • 내용 : 경기도 여주(驪州)와 양근(楊根)에 우박이 내렸다. 강원도 평창(平昌) 등 다섯 고을에는 3일~6일까지 우박이 내렸다. 크기는 탄환만 하였다.
    • 출전 : 『中宗實錄』 권59, 중종 22년 5월 6일 임오.
  • 1527년(중종 22):경기도 여주에 지진 발생
    • 내용 : 경기도 여주(驪州)에 지진이 발생했다.
    • 출전 : 『中宗實錄』 권59, 중종 22년 6월 15일 경신.
  • 1527년(중종 22):정부가 영산군의 일과 김안정의 복상을 금지할 것을 아룀
    • 내용 : 정부(政府)가 아뢰기를, “…… 이제 들으니 그 첩이 죽었는데 김전의 부인이 그의 집에서 계모(繼母)로 대우했다는 것으로 복상(服喪)하려 한다 하며, 여주목사(驪州牧使) 김안정(金安鼎) 역시 장손(長孫)으로서 대상(代喪)한다 합니다. ……” 하였다.
    • 출전 : 『中宗實錄』 권60, 중종 22년 12월 11일 갑인.
  • 1528년(중종 23):지평 김기 등이 왜인들의 공무역 폐단과 신래를 침학하는 것 등에 대해 의논드림
    • 내용 : 조강에 나아갔다. …… 홍숙은 아뢰기를, “…… 이 뿐만 아니라 문무관(文武官)의 당상이 또한 부족하니, 황주(黃州)·여주(驪州)와 육진(六鎭) 등의 수령에 빈자리가 난다면 누구로 의망해야 할 것입니까? 당상관은 하루아침에 졸연히 차서를 뛰어서 올릴 수 없는 법이니 미리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하였다.
    • 출전 : 『中宗實錄』 권62, 중종 23년 8월 14일 계축.
  • 1528년(중종 23):여주에서 사람을 뽑는 일을 거행하는 것에 대해 전교함
    • 내용 : 정원이 경술년에 성종이 영릉에 참배한 전례를 써서 아뢰니, 전교하기를, “다른 으레 하는 일은 다 임시하여 하겠으나 여주(驪州)에서 사람을 뽑는 일은 이번에 거행해야 할 것인데, 미리 중외(中外)에 하유(下諭)하여 사람을 뽑으면 관복(冠服) 등 여러 일도 미리 갖출 수 있을 것이다. …… 또 경기 관찰사와 여주목사(驪州牧使) 등에게 의복을 내리는 관례가 있으니, 상의원(尙衣院)을 시켜 단의(緞衣) 2영(領)과 주의(紬衣) 2영을 가져가게 하라. ……” 하매, 정원이 곧 회계하였다.
    • 출전 : 『中宗實錄』 권63, 중종 23년 9월 8일 정축.
  • 1528년(중종 23):거둥 때의 숙소로 여주는 청심루를 삼음
    • 내용 : 전교하였다. “용인과 이천은 동상방(東上房)을 숙소로 삼고 여주(驪州)는 청심루를 숙소로 삼아, 모두 성종조(成宗朝)의 옛일에 따라 하라.”
    • 출전 : 『中宗實錄』 권63, 중종 23년 9월 9일 무인.
  • 1528년(중종 23):김동난의 일과 거둥 때의 시취 등에 관해 의정부와 논의함
    • 내용 : 정부가 아뢰기를, “…… 또 여주(驪州)의 향교(鄕校)에서 친제(親祭)하시는 일을 하문(下問)하셨습니다마는, 이달에는 이미 문묘(文廟)에서 친제하려 하시는데 제사는 번거롭게 할 수 없으니,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는 것이 매우 마땅하겠습니다. 또 인물을 시취(試取)하는 일은, 각각 그 고을에서 시취하면 대가(大駕)가 멈추는 폐단이 많이 있을 것이니, 용인(龍仁)과 이천(利川)의 유생(儒生)을 여주에 모아서 시취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전에 고을마다 각각 시취하였으나【성종조(成宗朝) 경술년(1490) 영릉(英陵)에 거둥하였을 때에 이천과 여주에서 각각 생원(生員)을 시취한 것을 말하는데, 여주에서 3인이고 이천에서 1인이었다】 그 인물이 국가에서 시취한 자와 같지 않아서 감히 생원으로 자처하지 못하고 거관(居館)하지 않게 되었다 하니, 한 곳에 모아서 시취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 “인물을 시취하는 일은, 전에 성종조에 있어서는 미리 시취할 생각을 한 것이 아니고 특별히 임시하여 시취하였고 또 그 지은 글이 매우 졸렬하였으므로 생원으로 뽑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미리 약속하고 가므로 반드시 생원을 시취할 것 없으니 토착인 유생은 다 시험에 나아가는 것을 허가하되, 여주·이천·용인 등의 유생만을 시취하면 또 넓지 못할듯하니 양지(陽智)와 광주(廣州)도 지나는 고을이므로 이 다섯 고을의 유생을 다 여주에 모아서 시취하고자 한다.”
    • 출전 : 『中宗實錄』 권63, 중종 23년 9월 13일 임오.
  • 1528년(중종 23):여주(驪州) 등 고을의 향교에서 치제할 날을 가린 문서를 가지고 와서 아룀
    • 내용 : 예조(禮曹)가, 여주(驪州) 등 고을의 향교(鄕校)에서 치제(致祭)할 날을 가린 문서를 가지고 와서 아뢰었다.
    • 출전 : 『中宗實錄』 권63, 중종 23년 9월 14일 계미.
  • 1528년(중종 23):거둥 행로에 대해 포영사 안윤덕이 건의함
    • 내용 : 포영사(布營使) 안윤덕(安潤德)이 와서 아뢰기를, “…… 신이 저곳【여주(驪州) 등을 말한다】에서 경기도사(京畿都事) 박광필(朴光弼)을 만나 부교를 조치할 것을 이미 관찰사에게 알리게 하였으나, 다시 생각하니 부교를 만들어 거둥하시는 것보다는 천천히 험하기는 하나 조금 평탄하게 닦도록 하면 도리어 편이하며, 평탄하게 닦는 공역이 있기는 하나 위태로운 폐단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올 때에 천천 길을 살피며 왔습니다.” 하고, “…… 또 여주의 청심루(淸心樓)에 행영을 포치하는 그림은 알았다. 나머지 이천(利川) 등의 고을에 행영의 포치도(布置圖)는 오늘 해가 저물어서 미처 결정하지 못하였으니 뒤따라 자세히 보고 결정하겠다.”
    • 출전 : 『中宗實錄』 권63, 중종 23년 9월 15일 갑진.
  • 1528년(중종 23):여주에서의 무과시취에 대한 규칙을 정하라고 병조에 전교함
    • 내용 : 전교하였다. “여주(驪州)에서 인물을 시취할 때의 무재(武才)의 규구(規矩)는 이미 임시하여 취품(取稟)하게 하였다.”
    • 출전 : 『中宗實錄』 권63, 중종 23년 9월 17일 병술.
  • 1528년(중종 23):거둥 때 군령의 표신과 노인 공궤에 관해 교지함
    • 내용 : 정원에 전교하였다. “여느 거둥 때에는 모든 군령(軍令)을 표신(標信)으로 할 뿐 아니라 밀부(密符)로도 하유(下諭)하는데, 이번에 여주로 거둥할 때에도 이렇게 하고자 한다. …… 이번에도 여주(驪州)에 여섯 고을의 노인을 모아 능에 참배하고자 하고, 그 뒤에 막차(幕次)로 돌아와 시제(試題)를 낸 뒤에 청심루(淸心樓)에서 재상(宰相)을 공궤할 때도 함께 공궤하고자 하니 이 뜻을 미리 각 고을에 이르라고 예조에 말하라.”
    • 출전 : 『中宗實錄』 권63, 중종 23년 9월 19일 무자.
  • 1528년(중종 23):여주 등의 고을에 전세를 감하라고 전교함
    • 내용 : 좌의정 심정(沈貞)과 우의정 이행(李荇)에게 전교하기를, “…… 예전에 성종조(成宗朝)에 있어서는 영릉(英陵)에 거둥하실 때에 여주(驪州) 등 각 고을에 백성에게 전조(田租)의 반을 특별히 감하여 내리셨는데, 이것은 환궁 때에 하신 일이었다. 올해에는 농사가 조금 잘되기는 하였으나, 내가 교외의 백성으로 하여금 또한 은택을 입게 하고자 한다. 대신의 뜻에는 어떠한가?”【상이 장차 여주에 거둥하려 하므로 성종 때의 일을 인용하여 말한 것이다】하였다.
    • 출전 : 『中宗實錄』 권63, 중종 23년 9월 19일 무자.
  • 1528년(중종 23):노인 공궤에 대한 예조의 의논과 조치
    • 내용 : 예조가 아뢰기를, “양로연(養老宴)에 관한 일은, 여섯 고을 사람들을 여주(驪州)에 모아서 공궤해야 하겠으나, 여자 노인과 절부(節婦) 등을 다 여주에 모아서 공궤한다면, 천인(賤人)은 가서 참여할 수 있어도 사족의 부녀자는 갈 수 없을 것인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정원에 전교하였다. “…… 당초에 여자 노인을 여주에 모으는 것을 말하지 않았는데, 이 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물어서 아뢰라.”
    • 출전 : 『中宗實錄』 권63, 중종 23년 9월 22일 신묘.
  • 1528년(중종 23):여주향교의 치제에 관해 검상 정세호가 건의함
    • 내용 : 검상(檢詳) 정세호(鄭世虎)가 정승(政丞)의 뜻으로 아뢰기를, “여주(驪州)의 향교(鄕校)에서 친제(親祭)하시려는 일은 선성(先聖)을 위하는 것이니 본디 아름다운 뜻입니다만, 내사(內祀)와 외사(外祀)를 하루에 아울러 거행하는 것은 사체(事體)에 어그러지는 듯하고 또 그러한 예문(禮文)이 없으므로 신들이 아뢰었습니다. ……” 하니, 전교하였다. “향교에서 친제하는 일에 대해서는 대신의 뜻을 다 알았으니 할 것 없다.”
    • 출전 : 『中宗實錄』 권63, 중종 23년 10월 1일 기해.
  • 1528년(중종 23):거둥 때의 직·과거 응시자의 수를 확인하는 일 등에 관해 전교함
    • 내용 : 정원에 전교하기를, “영릉에 거둥할 때에 세 곳의 숙소【용인(龍仁)·이천(利川)·여주(驪州) 등의 고을이다】에서 병조(兵曹)·도총부(都摠府)의 당상(堂上) 전원을 써서 아뢰어 낙점(落點)받아 한 밤에 한 사람이 내금위(內禁衛)와 겸사복(兼司僕) 등을 거느리고 내장(內墻)밖에 벌여 서서 직숙(直宿)하되 허술하게 하지 말라. ……” 하고, 또 전교하였다. “여섯 고을【용인·이천·광주(廣州)·양지(陽智)·과천(果川)·여주이다】의 문사(文士)와 무사(武士)를 녹명(錄名)한 뒤에 거자(擧子)의 수를 보고자 하니, 이는 전에 하지 않던 일이기는 하나 써서 아뢰도록 하라.”
    • 출전 : 『中宗實錄』 권63, 중종 23년 10월 7일 을사.
  • 1528년(중종 23):여주에서 취재에 응한 유생 중에 규정에 어긋나는 자가 많다고 예조가 아룀
    • 내용 : 예조가 아뢰기를, “여주(驪州) 등 여섯 고을의 유생(儒生)의 수는 써서 아룁니다마는, 그 가운데에는 모록(冒錄)이 분명한 사람도 따로 뽑아 적어서 아뢰는데, 이처럼 모록한 사람이 많이 있으므로 이미 각 고을에 행이(行移)하여 9일 안으로 다시 상세히 신보(申報)하게 하였으나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출전 : 『中宗實錄』 권63, 중종 23년 10월 7일 乙巳.
  • 1528년(중종 23):여주의 파오달에 이름
    • 내용 : 대가가 여주(驪州)의 파오달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오시(午時) 초였다. 유생(儒生) 50여 명이 길가에서 지영(祗迎)하였다.
    • 출전 : 『中宗實錄』 권63, 중종 23년 10월 14일 임자.
  • 1528년(중종 23):양로연을 거행하는데 여주목사 이희보가 들어가 참여함
    • 내용 : 양로연(養老宴)을 거행하고 종재(宗宰)를 공궤(供饋)하였다. 여주목사(驪州牧使) 이희보(李希輔)가 들어가 참여하였다.
    • 출전 : 『中宗實錄』 권63, 중종 23년 10월 15일 계축.
  • 1528년(중종 23):관련자에게 비단옷과 명주옷을 내림
    • 내용 : 단의(緞衣) 3영(領)과 주의(紬衣) 4영(領)을 정원에 주고 일렀다. “…… 주의는 경기도사(京畿都事)【박광필(朴光弼)이다】·여주목사(驪州牧使)【이희보(李希輔)이다】·이천부사(利川府事)【박조(朴稠)이다】·용인현령(龍仁縣令)【윤중형(尹仲衡)이다】에게 나누어 내리는 것인데, 이것은 포영사·지응사·관찰사와 세 고을의 수령들이 요즈음 많이 근로(勤勞)하였으므로 내리는 것이다. 사은(謝恩)하지 말라.”
    • 출전 : 『中宗實錄』 권63, 중종 23년 10월 15일 계축.
  • 1528년(중종 23):조강에 나아가 최근 정사에 관해 논함
    • 내용 : 조강에 나아갔다. 대사헌 김극성(金克成)이, 문왕(文王)이 사람을 진작시켰다는 말에 따라 아뢰기를, “…… 전일 여주(驪州)에서 사람을 시취할 때에 지금 그곳에 살고 호적에 오른 자를 과거(科擧) 보이라는 영이 이미 내려졌으므로 아랫사람으로서는 이 영을 받들어 거행해야 할 것인데, 여섯 고을의 수령들이 써 넣어 주기를 바라는 자를 많이 모록(冒錄)하였습니다.” 하였다.
    • 출전 : 『中宗實錄』 권63, 중종 23년 10월 23일 신유.
  • 1528년(중종 23):방말동의 일을 다시 추고하라고 전교함
    • 내용 : 【방말동이 여주(驪州) 숙소에 있을 때에 제 병을 고치려고 동별실(東別室)에 함부로 불을 때어 불이 나게 만들어 병풍에 번져 타는 것을 겨우 끌 수 있었으므로, 상이 노하여 헌부에 내려 추고시켰는데, 헌부가 불응위 사리중 공죄 장 팔십(不應爲事理重公罪杖八十)으로 조율하여 아뢰었다.】
    • 출전 : 『中宗實錄』 권64, 중종 23년 10월 5일 계유.
  • 1529년(중종 24):조강에 나아가 인재 육성의 뜻을 논의함
    • 내용 : 조강에 나아갔다. …… 상이 이르기를, “아뢴 바가 과연 마땅하다. 요즈음 학교의 일이 흔히 예전만 못하여, 선비의 입지(立志)가 굳지 않고 사습이 아름답지 않다. 요즈음 여주(驪州)에서 능에 참배하고 별거(別擧)할 때에 외방 사람이 과거(科擧)에 나아오려 하므로 함부로 들어갈 폐단이 있을 듯하기 때문에 예조(禮曹)가 법을 세워서 그 고장에 살지 않는 사람은 과거에 나아오지 못하게 하였는데, 예조의 영(令)을 따르지 않고 은연히 몰래 들어간 자가 있으니 지극히 옳지 않다. ……” 하매, 사간(司諫) 심언경(沈彦慶)이 아뢰었다.
    • 출전 : 『中宗實錄』 권64, 중종 24년 1월 9일 병오.
  • 1530년(중종 25):정원이 금부의 뜻으로 황맹헌의 신문 과정을 보고함
    • 내용 : 정원이 금부의 뜻으로 아뢰기를, “황이헌(黃二獻)에게 그 가족 관계를 물으니 ‘황완(黃琬)의 아들이다’고 대답하였으나, 사실은 황완의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박원겸(朴元謙)이 이를 위단(違端)으로 여겨 형장(刑杖)으로 신문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주(驪州)의 종 만춘(萬春)의 집에 도착했다고 하였는데, 여주(驪州) 관아(官衙)에 그 사실을 물으니 만춘이란 사람은 전혀 그런 일이 없는 것으로 회답해 왔다고 하였습니다. ……” 하였다.
    • 출전 : 『中宗實錄』 권68, 중종 25년 5월 18일 정미.
  • 1530년(중종 25):무자년에 여주에 거둥하였을 때 부시가 허락되지 않은 유생들이 들어 온 것에 대해 추고하라고 전교함
    • 내용 : 전교하였다. “…… 무자년에 내가 여주(驪州)에 거둥하였을 때 부시(赴試)가 허락되지 않은 유생들이 많이 시장(試場)에 들어왔는데, 그중에 혹은 과거에 합격한 자도 있었으므로 그 후에 예조가 유사(有司)로 하여금 추고하도록 하라고 요청하였다. …… 내가 여주에 거둥하였을 때 부시가 허락되지 않은 유생들이 시험장에 많이 들어온 일로 본다면 과연 좋지 못하다.” 하였다.
    • 출전 : 『中宗實錄』 권68, 중종 25년 5월 24일 계축.
  • 1531년(중종 26):경기 여주에 서리가 내림
    • 내용 : 경기 여주(驪州)에 서리가 내렸다.
    • 출전 : 『中宗實錄』 권70, 중종 26년 4월 27일 신사.
  • 1533년(중종 28):여주목사 이광식이 수령에 합당치 못하다고 아룀
    • 내용 : 간원은 아뢰기를, “여주목사(驪州牧使) 이광식(李光軾)은 연소하고 무재(武才)가 있으므로 내지의 수령에는 합당치 못합니다. …… 속히 체직시키소서.” 하였다.
    • 출전 : 『中宗實錄』 권75, 중종 28년 7월 5일 병오.
  • 1535년(중종 30):경기 여주 등지에 우박이 내림
    • 내용 : 경기도 광주(廣州)·여주(驪州)·금천(衿川)·지평(砥平)에 우박이 내렸다.
    • 출전 : 『中宗實錄』 권79, 중종 30년 5월 1일 신유.
  • 1536년(중종 31):신광한이 여주에서 살면서 시를 지어 보내옴
    • 내용 : 정부와 육조가 날마다 동호(東湖)에서 연회하였다.
      …… 신광한(申光漢)이 여주(驪州) 촌마을에 살면서 시를 지어 보내 왔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아름다운 정자 새로 지었다는데
      푸른 창 붉은 난간 호반에 아른거리리
      구름 속에 솟은 산 재상의 수중에 들고
      달 아래 피리 소리 호사스러운 사람에 알맞네
      나아가나 물러가나 걱정뿐인데도 공은 낙을 간직하였고
      쓰이거나 버림받거나 마음 쓰지 않으니 나는 진심을 가졌네
      풍경 점검은 익숙해야만 하는 것인데
      누구에게 상빈을 보좌하게 할까

      구절마다 풍자가 함축되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전해 가며 읊었다. 김안로(金安老)가 처음에는 깨닫지 못하고 벽에 걸어놓았다가 뒤에 깨닫고 치워버렸다. 이 때문에 광한에게 유감을 품고 중상하려 도모하였다.
    • 출전 : 『中宗實錄』 권82, 중종 31년 10월 30일 임자.
  • 1538년(중종 33):선비들이 여주 신륵사에 투숙하다가 중들에게 봉변을 당함
    • 내용 : 석강에 나아갔다. 성균관 진사 박문수(朴文秀) 등이 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지난날 과거보러 오는 선비들이 여주(驪州) 신륵사(神勒寺)에서 투숙하였는데, 절의 모든 중들이 종을 치고 소라를 불며 활과 몽둥이를 가지고 함성을 지르면서 쳐들어와 활로 쏘기도 하고 몽둥이로 때리기도 하여 성화같이 다급하게 몰아쳤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난타당하여 전신에 부상을 입기도 했고 심지어 높은 섬돌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지고 발목이 꺾이기도 하여 피를 토하며 거의 죽게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말이 여기에 이르니 해괴하고도 경악스러워 한심스럽습니다. 전하께서 깊숙한 구중궁궐에 계시니 중들이 작당하여 폭행을 자행함이 이러하고 유생들을 해침이 이와 같은 것을 어떻게 아시겠습니까.”
    • 출전 : 『中宗實錄』 권88, 중종 33년 9월 19일 기축.
  • 1540년(중종 35):간원이 여주목사 박세영 등의 파직을 청함
    • 내용 : 간원이 아뢰기를, “여주 목사(驪州牧使) 박세영(朴世英)은 하리(下吏)에게 정사를 맡겨 민간에게 폐해를 끼치므로 민간이 원망하고 괴로워 하니 그를 파직시키소서.”
    • 출전 : 『中宗實錄』 권93, 중종 35년 9월 18일 병오.
  • 1540년(중종 35):경기의 농사가 부실하니 경창미는 내년으로 미루어 바치도록 하라고 전교함
    • 내용 : 간원이 아뢰기를, “올해 경기의 농사는 대체로 부실한데 여주(驪州)·양주(楊州)·이천(利川)·음죽(陰竹) 네 고을은 더욱 실농하였습니다.”
    • 출전 : 『中宗實錄』 권94, 중종 35년 11월 22일 기유.
  • 1541년(중종 36):양연이 한강 이남의 여주 등이 경상도처럼 실농이 매우 심하다고 아룀
    • 내용 : 조강에 나아갔다. 양연(梁淵)이 아뢰기를, “…… 경기 지방도 한강 이남의 15개 이상의 고을【과천(果川)·이천(利川)·안산(安山)·인천(仁川)·양성(陽城)·음죽(陰竹)·안성(安城)·광주(廣州)·수원(水原)·용인(龍仁)·양지(陽智)·진위(振威)·남양(南陽)·여주(驪州)·부평(富平)】이 경상도처럼 실농이 매우 심하고 충청도가 그 다음입니다.”
    • 출전 : 『中宗實錄』 권96, 중종 36년 11월 29일 신해.
  • 1543년(중종 38):경기 여주에 지진 발생
    • 내용 : 경기 여주(驪州)에 지진이 발생했다.
    • 출전 : 『中宗實錄』 권100, 중종 38년 1월 21일 병인.
  • 1543년(중종 38):간원이 여주목사 김의형을 파직시키기를 아룀
    • 내용 : 간원이 아뢰기를, “여주목사(驪州牧使) 김의형(金義亨)은 성질이 본디 탐욕스럽고 비루하여 가는 곳마다 삼가지 않은 탓으로 여러 번 무거운 논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징계되지 않고 관사(官事)를 다스리지 않은 채 탐오한 행동이 더욱 심하니, 그를 파직시켜 나머지를 징계시키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출전 : 『中宗實錄』 권100, 중종 38년 2월 24일 무술.
  • 1543년(중종 38):헌부가 여주목사 윤계의 체직시키기를 청함
    • 내용 : 헌부가 아뢰기를, “여주목사(驪州牧使) 윤계(尹溪)가 전에 연안부사(延安府使)로 있을 때 날마다 술 마시는 것으로 일을 삼고 직무를 전폐하여 폐를 끼치고 백성을 피폐하게 한 일이 자못 많았었으니, 이제 다시 목민관(牧民官)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여주는 기전(畿甸)의 큰 고을인데 근래 여러 번 적합하지 못한 사람이 목사로 부임되었기 때문에 관사(官事)가 낭패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청렴 근실하고 재간과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차임하여 보내지 않으면 장차 고을을 폐기하게 될 것이니, 윤계를 체직시키고 적격자를 택차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출전 : 『中宗實錄』 권100, 중종 38년 2월 29일 계묘.
  • 1544년(중종 39):영릉 등의 제향 등에 대하여 의논함
    • 내용 : 홍언필·윤인경·이기·성세창·권벌·허자가 의논드리기를, “조종(祖宗)의 능침(陵寢)의 제향(祭享)은 한결같이 예문(禮文)대로 해야 사실 마땅하므로 감히 가볍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마는, 여주(驪州)는 아주 잔폐(殘弊)해져서 헌관(獻官)이 왕래할 때에 지공(支供)할 것을 장만하기 어려우니, 헌관·감찰을 근년의 전례대로 차출하여 보내지 말고 목사(牧使)를 시켜 대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여주 사람의 상언(上言) 때문에 이 의논이 있었다】……”하였다.
    • 출전 : 『中宗實錄』 권104, 중종 39년 9월 28일 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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