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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 1496년(연산군 2):한치례가 종 알동을 여주에서 잡아 옴
    • 내용 : 서릉군(西陵君) 한치례(韓致禮)가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사들인 종[買奴] 알동(謁同)을 여주(驪州)에서 잡아왔는데, 목사 정성근(鄭誠謹)이 신을 도둑이라고 헐뜯었습니다. 신은 본디 재주와 덕이 없는데, 세조조(世祖朝)부터 외람되이 성상의 은혜를 입어 지위가 1품(品)에 이르렀으며, 또 외척이어서 문벌(門閥)을 더럽힘이 없고자 하였는데, 지금 신이 왕비의 아우로서 문득 도둑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으니, 마음 아프기 그지없으며, 뻔뻔스럽게 눌러 있기 어려우므로 사면을 청합니다.” 하였다.
    • 출전 : 『燕山君日記』 권14, 연산군 2년 3월 10일 정사.
  • 1496년(연산군 2):대간이 김순손·이병정·한치례의 일에 대하여 논계함
    • 내용 : 대간이 김순손·한치례·이병정의 일에 대하여 논계하니, 전교하기를, “경들이 한치례를 조정을 업신여겼다 하여 죄주기를 청하면서 유독 임금에게 오만한 순손에게는 죄를 주지 말자고 청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또 정성근은 남에게는 선상(選上)에 대신 세우는 그름을 말하고서도, 자기가 면하지 못하여 도리어 그 죄를 받고, 또 지나치게 둔전을 받았으되 이제 여주목사(驪州牧使)가 되었는데, 병정만은 쓰지 못하겠는가?”
    • 출전 : 『燕山君日記』 권15, 연산군 2년 6월 5일 경진.
  • 1497년(연산군 3):경기 여주에 큰 우박이 내림
    • 내용 : 경기 여주(驪州)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개암 알만 하였다.
    • 출전 : 『燕山君日記』 권23, 연산군 3년 5월 26일 정묘.
  • 1497년(연산군 3):예문관봉교 강덕유 등이 간관·작상의 남발 등에 대해 상소함
    • 내용 : 강덕유(姜德裕) 등이 서계(書啓)하기를, “신 등이 지칭한 어진 선비라는 것은, 대개 정성근(鄭誠謹)·조지서(趙之瑞)를 말한 것입니다. 성근은 정직하고 효렴(孝廉)하여 일찍이 해주(海州)·여주(驪州)목사가 되었을 때에 정사를 청렴하고 검박하게 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사랑하기를 부모와 같이 하고, 지서 역시 청렴 정직한 사람으로 일찍이 경주판관(慶州判官)·창원부사(昌原府使)가 되었을 때에 법을 지키고 아부하지 않으므로 간사한 이속들이 두려워하며 복종하였는데, 백성들이 역시 지금까지 사랑하고 그리워합니다. ……” 하였다.
    • 출전 : 『燕山君日記』 권24, 연산군 3년 6월 5일 을해.
  • 1497년(연산군 3):판돈녕부사 한치례가 대간들이 논박한 일에 대해 변명함
    • 내용 :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한치례(韓致禮)가 아뢰기를, “사헌부(司憲府)가 신을 탐오(貪汚)하다고 한 것은, 반드시 강음(江陰)의 관노비(官奴婢)와 여주(驪州)의 전답 등에 관한 일일 것입니다. 이미 해명되었거니와, 신은 탐오한 사실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이란 제 일은 잘 모르는 법이니, 청컨대 옥(獄)에 들어가 스스로 밝히겠습니다.” 하였다.
    • 출전 : 『燕山君日記』 권25, 연산군 3년 7월 5일 갑진.
  • 1497년(연산군 3):판중추부사 이극균 등이 경안 등의 역로·양재찰방의 피폐한 정황에 대해 논의함
    • 내용 :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극균(李克均)이 아뢰기를, “경안(慶安)의 일로(一路)는 광주(廣州) 덕풍역(德豊驛)에 원거인(元居人) 3호(戶), 경안역(慶安驛)에 원거인이 5호, 이천(利川) 아천역(阿川驛)에 원거인 3호, 오천역(五川驛)에 원거인 5호, 음죽(陰竹) 유춘역(留春驛)에 원거인 6호, 여주(驪州) 신진역(新津驛)에 원거인 8호, 양화역(楊華驛)에 운거인 5호(好), 안평역(安平驛)에 원거인 3호로, 『대전(大典)』에 으레 소로(小路)가 기록되어 있으니, 경상도(慶尙道) 안동(安東)의 도회 진상(都會進上)인 영덕(盈德)의 별진상(別進上)이 모두 이 길을 경유하며 왜인의 통행과 영릉(英陵)의 헌관(憲官)·집사(執事)가 줄을 대어 끊어지지 아니합니다. 각역에 말을 세우는 것은 적은데 겨를 없이 분치(奔馳)하니 장차는 지탱하지 못할 것입니다.” …… 지사(知事) 홍귀달(洪貴達)은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에 영릉(英陵)의 헌관(獻官)이 되어 여주(驪州)·광주(廣州) 각역을 갔다가 돌아왔는데, 그 조잔하고 피폐한 것이 정히 극균(克均)의 아뢴 바와 같았습니다. ……”
    • 출전 : 『燕山君日記』 권28, 연산군 3년 11월 9일 병오.
  • 1499년(연산군 5):권경우에게 직첩을 돌려주고 임희재를 내보내는 일을 묻음
    • 내용 : 임희재는 이목(李穆)과 친교를 맺어 서로 서신 왕래하며 이르기를, ‘조정의 어진 이가 모두 이미 갔다. 나도 이를 좇아 충주(忠州)·여주(驪州) 지방으로 내려가 살겠다’고 하였는데, 그 말은 세상을 가볍게 여기는 것 같지만 그 행하는 일을 본다면 공명에 생각이 없지도 않은 자입니다.
    • 출전 : 『燕山君日記』 권35, 연산군 5년 10월 8일 갑오.
  • 1501년(연산군 7):여주판관을 혁파하는 일을 의논드림
    • 내용 : 신녕(新寧) 고을을 회복하고 광주(光州)를 목(牧)으로 승격시켜 판관(判官)을 두고 여주(驪州)에 판관을 없애는 일에 대하여 의논하기를 명하니, 한치형(韓致亨)·성준(成俊)·이극균(李克均)·이극돈(李克墩)·이세좌(李世佐) 등이 의논드리기를, “대체로 고을을 설치하고 수령(守令)을 임명하는 것은 본래 백성들을 위한 것이므로 고을을 없애서 백성이 원망한다든지 관원을 다시 두어서 백성이 기뻐한다면, 없앤 고을을 다시 회복하고 쓸데없는 관원을 없애야 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신녕 고을은 다시 회복하고, 광산(光山)은 승격시켜 목(牧)으로 하고, 여주에는 판관을 없애도록 하라.” 하였다.
    • 출전 : 『燕山君日記』 권41, 연산군 7년 8월 12일 정사.
  • 1503년(연산군 9):감찰 신승연이 영릉의 치제관을 여주목사로 할 것을 청함
    • 내용 : 감찰 신승연(申承演)은 아뢰기를, “…… 개성부(開城府)의 제릉(齊陵) 헌관은 으레 유수(留守)가 거행하게 하고 있사오니, 지금 여주목사(驪州牧使)를 당상관(堂上官)으로 차임하여 영릉의 헌관도 제릉의 예에 따라 여주 목사로서 거행하게 하고, 다만 감찰(監察)만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 출전 : 『燕山君日記』 권48, 연산군 9년 2월 18일 을묘.
  • 1505년(연산군 11):여주 등의 거울 만드는 상의원 관원을 국문함
    • 내용 : 거울 만드는 일이 늦어진 일로 상의원(尙衣院) 관원을 국문하도록 명하였다. 왕이 용진(龍津) 강변에서 거울을 만들게 하였는데, 큰 것은 수레바퀴만 하였다. 여주(驪州)·양근(陽根)·지평(砥平)의 주민이 그 부역에 시달리어 거의 다 흩어져 도망하였다.
    • 출전 : 『燕山君日記』 권58, 연산군 11년 7월 18일 신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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