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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세종

  • 1431년(세종 13):예조에서 천령현 안육손(安六孫)의 효자 정려를 주청함
    • 내용 : 예조에서 아뢰기를, “경기도의 천령현(川寧縣)에 사는 안육손(安六孫)은 나이 11세 때에 아버지가 죽으매, 3년 동안 여막에 살았다.”
    • 출전 : 『世宗實錄』 권54, 세종 13년 10월 28일 기미.
  • 1432년(세종 14):여흥(驪興)의 사비 매읍장(每邑莊)이 한꺼번에 아들 하나 딸 둘을 낳음
    • 내용 : 여흥부(驪興府)에 사는 사비(私婢) 매읍장(每邑莊)이 한꺼번에 아들 하나 딸 둘을 낳았다.
    • 출전 : 『世宗實錄』 권55, 세종 14년 1월 13일 계유.
  • 1440년(세종 22):여흥부(驪興府) 신륵사(神勒寺)의 중수를 명함
    • 내용 : 여흥부(驪興府)의 신륵사(神勒寺)를 중수하도록 명하였으니,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의 화상(畵像)이 있기 때문이었다.
    • 출전 : 『世宗實錄』 권90, 세종 22년 8월 13일 임오.
  • 1442년(세종 24):경기도 여흥부(驪興府)에 우박이 내림
    • 내용 : 강원도 원주(原州)와 경기도 여흥부(驪興府)에 우박이 내렸다.
    • 출전 : 『世宗實錄』 권95, 세종 24년 4월 24일 갑인.
  • 1449년(세종 31):호군(護軍) 박숭경(朴崇敬)의 불효죄를 천령현(川寧縣)에 고하여 감사에게 보고함
    • 내용 : 처음에 호군(護軍) 박숭경(朴崇敬)의 어머니 유씨(兪氏)가 그 사위인 사정(司正) 원거어(元據於)를 사랑하여 재산과 노비(奴婢)를 지나치게 후하게 나누어 주고, 마침내 그 집을 옮겨서 살게 되매, 숭경이 원망하여 말하기를, “어머니가 아버지의 가재(家財)를 모두 거어(據於)의 집으로 옮기고, 사당(祠堂)과 본가(本家)를 버리고 선조(先祖)를 제사지내지 아니하니, 이로써 보면 나는 원숭경(元崇敬)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무릇 부인은 집에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가면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르는 것인데, 어머니는 우리 집이나 사당이 있는 본가에 살아야 마땅하다.”고 하니, 거어가 인하여 유씨(兪氏)에게 참소(讒訴)하고, 또 마을 사람을 부추겨서 숭경의 불효한 죄상을 꾸며 만들어서, 살고 있는 천령현(川寧縣)에 고하여 감사(監司)에게 보고해 추핵하니, 유씨가 장고(狀告)하기를, “우리 아들은 본디 불효한 일이 없으니 그만두기를 원한다.”고 하매, 감사가 추핵한지 오래도록 판결하지 못하였다.
    • 출전 : 『世宗實錄』 권123, 세종 31년 3월 27일 정미.
  • 1449(세종 31):박숭경의 옥사로 의금부 관원을 천령현(川寧縣)에 파견함
    • 내용 : 의정부·육조·의금부에서 함께 의논하여 아뢰기를, “박숭경(朴崇敬)의 옥사(獄事)는 모자(母子) 사이에 다른 증거가 없으므로, 일이 애매하여 처결하기가 어렵습니다. 한 고을의 공론(公論)이 반드시 있을 것이오니, 의금부 관원을 천령현(川寧縣)에 보내어 본도(本道) 수령관(首領官)과 함께 자세히 심문(審問)을 가하고, 그래도 오히려 실정을 찾아내지 못하거든, ‘서로가 위해서 숨겨 주는 법[相爲容隱]’을 논하지 말고 역시 국문하도록 허락함이 마땅하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출전 : 『世宗實錄』 권123, 세종 31년 3월 29일 기유.
  • 『세종실록』 지리지 경기(京畿) 및 여흥부(驪興府) 연혁 기사
    • 내용 : 우리 태조(太祖) 3년 갑술(곧 홍무 27년)에 도읍을 한양부에 정하게 되매, 그 이듬해 을해에 평주·수안·곡주·재령·서흥·신은·협계는 새 서울[新都]에 가는 길이 멀므로 도로 서해도에 붙이고, 양광도의 광주(廣州)·수원부(水原府)·양근군(楊根郡)·쌍부(雙阜)·용구(龍駒)·처인(處仁)·이천(利川)·천령(川寧)·지평현(砥平縣)을 갖다 이에 붙이고, 광주·수원의 관할인 군(郡)·현(縣)을 갈라서 좌도(左道)로 하고, 양주·부평·철원·연안의 관할인 군·현을 우도(右道)로 하고, 7년[戊寅]에 또 충청도(忠淸道)의 진위현(振威縣)을 떼어서 좌도에 붙이었다가, 태종(太宗) 2년 임오(곧 홍무 35년)에 두 도(道)를 합하여 경기 좌·우도라 하고, 성관찰사(省觀察使)·수령관(首領官) 각각 1인씩을 두었다.
      태종 13년 계사(곧 명나라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 영락(永樂) 11년)에 사방길의 멀고 가까움을 참작하여 연안(延安)·배주(白州)·우봉·강음·토산을 도로 풍해도(豊海道)에, 이천(伊川)을 도로 강원도에 붙이고, 충청도의 여흥부(驪興府)·안성군(安城郡)·양지(陽知)·양성(陽城)·음죽현(陰竹縣)과 강원도의 가평현(加平縣)을 떼어다가 이에 붙이고, 좌·우도(左右道)로 나누지 않고 다만 경기도관찰사(京畿都觀察使)라 일컫고 사(司)를 수원(水原)에 두었다. …… 대천(大川)으로 말하면, 한강(漢江)은 그 근원이 강원도 오대산(五臺山)으로부터 나와 영월군(寧越郡) 서쪽에 이르러 여러 내를 합하여 가근동진(加斤同津)이 되고, 충청도 충주(忠州)의 연천(淵遷)을 지나서 한결같이 서쪽으로 흘러 여흥(驪興)을 지나 여강(驪江)이 되고, 천령(川寧)에서 이포(梨浦)가 되며, 양근(楊根)에서 대탄(大灘)이 되고, 또 사포(蛇浦)와 용진(龍津)이 되었으며, 한 줄기는 인제현(麟蹄縣)이 이포소(伊布所)로부터 나와 춘천(春川)에 이르러 소양강(昭陽江)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가평현(加平縣) 동쪽에서 안판탄(按板灘)이 되고, 양근(楊根) 북쪽에서 입석진(立石津)이 되며, 또 양근 남쪽에서 용진도(龍津渡)가 되고, 사포(蛇浦)로 들어가서 두 물이 합하여 흘러 광주 (廣州) 경계에 이르러서 도미진(渡迷津)이 되고, 다음에 광나루[廣津]가 되었으며, 서울 남쪽에 이르러 한강도(漢江渡)가 되고, 서쪽에서 노도진(露渡津)이 되며, 서쪽에서 용산강(龍山江)이 되었는데, 경상·충청·강원도 및 경기 상류(上流)에서 배로 실어 온 곡식이 모두 이곳을 거치어 서울에 다다른다.
    • 출전 : 『世宗實錄』 권148, 지리지, 경기.
  • 『세종실록』 지리지 여흥도호부의 연혁 기사
    • 내용 : 여흥도호부(驪興都護府) 부사(府使) 1인【대개 각 부사(府使)는 모두 삼품관으로 삼고, 사품(四品)은 부사(副使)라 일컫는다】, 유학교수관(儒學敎授官) 1인. 본래 고구려의 골내근현(骨乃斤縣)인데, 신라가 황효(黃驍)로 고쳐서 소천군[泝川郡, 소천(泝川)은 곧 지금의 천령(川寧)]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에서 황려(黃驪)로 고쳐서, 현종(顯宗) 무오에 원주(原州)의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또는 황리현(黃利縣)이라고도 한다】. 충렬왕(忠烈王) 31년 을사에【곧 원(元)나라 성종(成宗) 대덕(大德) 9년】 황비(皇妃) 순경왕후(順敬王后) 김씨(金氏)의 고향이라 하여 여흥군(驪興郡)으로 승격하여 지군사(知郡事)를 두고, 명나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홍무(洪武) 21년 무진에 위주(僞主) 신우(辛禑)를 이 고을에 옮기고 황려부(黃驪府)로 승격시켰다가, 공양왕(恭讓王) 원년 기사에【곧 홍무 22년】 다시 여흥군으로 강등시켰다. 본조(本朝) 태종(太宗) 원년 신사에 중궁 정비(中宮靜妃)의 내향으로써 여흥부로 승격시켜 음죽현(陰竹縣)의 북촌(北村) 어서이처(於西伊處)를 떼어 주고, 13년 계사에 도호부(都護府)로 고치었다【곧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 영락(永樂) 11년이다. 예로부터 이르기를 계림(鷄林)과 평양(平壤) 등을 유수부(留守府)라 하고, 수원(水原)과 여흥 등의 부(府)를 단부(單府)라 해서, 명칭이 서로 혼동되므로, 단부를 고쳐 도호부로 하여 구별되게 하였다】.
      여강(驪江)【부[府治]의 북쪽에 있는데, 나룻배가 있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충주(忠州)에 이르기 31리, 서쪽으로 천령(川寧)에 이르기 10리, 남쪽으로 음죽(陰竹)에 이르기 30리, 북쪽으로 지평(砥平)에 이르기 10리요, 동서가 41리, 남북이 40리이다. 호수[戶]가 5백 38호, 인구[口]가 1천 1백 44명이요,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75명, 선군(船軍)이 1백 21명이다. 토성(土姓)이 7이니, 민(閔)·이(李)·안(安)·필(畢)·윤(尹)·한(韓)·음(陰)이요, 인물(人物)은 참지정사(參知政事) 문순공(文順公) 이규보(李奎報)와【고려 고종(高宗) 때 사람】 문하 좌정승(門下左政丞)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문도공(文度公) 민제(閔霽)이다【이가 우리 창덕 원소 열경 왕후(彰德元昭烈敬王后)를 낳았다】.
      땅은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 되며, 간전(墾田)이 6천 1백 45결이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좁쌀·팥·메밀·뽕나무·삼[麻]이요, 토공(土貢)은 물고기젓[魚醢]·느타리[眞茸]이며, 약재(藥材)는 연밥[蓮子]이다. 도기소(陶器所)가 1이니, 부(府)의 북쪽 관산(串山)에 있다【중품(中品)】.
      청심루(淸心樓)【객사 서북쪽 모퉁이에 있다. 북쪽으로 여강(驪江)을 임하였는데, 옛 어진 이들의 쓴 시(詩)와 글이 많이 있다】 역(驛)이 2이니, 신진(新津)과 안평(安平)이다【공양왕(恭讓王) 3년 신미에 새로 설치하였다】 파다수[八大藪]【여강(驪江) 북쪽에 있는데, 옛날부터 패다수(貝多藪)라 일컫는다】 신륵사(神勒寺)【부(府)의 북쪽에 있으니, 속칭 벽절[碧寺]이라 한다】.
    • 출전 : 『世宗實錄』 권148, 지리지, 경기 광주목 여흥도호부.
  • 『세종실록』 지리지 여흥(驪興) 기사
    • 내용 : 충청도(忠淸道) 본래 백제의 땅이다. …… 태종(太宗) 13년 계사에【영락 11년】 여흥(驪興)·안성(安城)·음죽(陰竹)·양성(陽城)·양지(陽智)를 갈라 경기(京畿)에 옮겨 붙였고, 경상도(慶尙道)의 옥천(沃川)·황간(黃澗)·영동(永同)·청산(靑山)·보은(報恩)을 이에(忠淸道) 내속시켰다. …… 양진명소(楊津溟所)는 그 근원이 강원도(江原道) 영서(嶺西)로부터 나와서 며촌(旀村) 방림역(芳林驛)을 지나 평창군(平昌郡) 북쪽에 이르러 용연진(龍淵津)이 되고, 영월군(寧越郡) 서쪽에 이르러 가근동진(加斤同津)이 되고, 군(郡) 남쪽에 이르러 금장강(錦障江)과 합류(合流)하여, 영춘(永春)·단양(丹陽)·청풍(靑風)을 지나 충주(忠州)에 이르러 연천(淵遷)이 되고, 경기(京畿) 여흥(驪興) 우음안포(亐音安浦)에 들어간다. …… 앙암(仰巖)은 충주(忠州) 서쪽 60리에 있으며【본주 및 단양(丹陽)·청풍(淸風)·괴산(槐山)·연풍(延豊)·제천(堤川)·영춘(永春) 등 고을은 <구실을> 모두 이곳에 바쳐서 <배로> 양진을 따라 여흥(驪興)을 지나 서울에 다 닫는데, 물길이 2백 20리이다】, 우음안포(亐音安浦)는 경기(京畿) 여흥(驪興) 동쪽 10리에 있으며【옥천(沃川)·영동(永同)·황간(黃澗)·청산(靑山)·보은(報恩)·청안(靑安) 등 고을은 <구실을> 모두 이곳에 바쳐서 <배로> 여강(驪江)을 따라 서울에 다 닫는데, 물길이 2백 10리이다】, 추호포(推乎浦)는 여흥 서쪽 1리에 있고【청안(靑安)·음죽(陰竹) 2현(縣)의 구실은 <이곳에 바쳐서> 여강을 따라 이포(梨浦)를 지나 서울에 다닫는데, 물길이 1백 94리이다】, 이포(利浦)는 경기 천령현(川寧縣) 동쪽 5리에 있다【죽산(竹山)·진천(鎭川) 2현(縣)의 구실을 이곳에 바치는데, 물길이 1백 60리이다】.
    • 출전 : 『世宗實錄』 권149, 지리지, 충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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