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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奎20379

1894·1896년과 1898년 結戶錢 중 상납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금액, 이유 등을 1899년 7월 여주군수 洪秉悳이 관찰사에게 보고한 문서이다. 결호전을 상납하지 못한 이유는 匪徒勒捧과 民間乾沒, 沈相禧의 歸順 義兵(나중에 官砲軍이 됨)의 경비 지출, 食費 汁物費 등의 官砲軍 경비 지출, 의병 진압차 내려온 京兵, 日兵의 放火로 인한 見失, 稅務主事 權鍾潤이 보관하다가 의병에게 見失, 1899년 4월 화재로 인한 소실, 火賊에게 見失 등이었다.

상납하지 못한 세금은 크게 (1) 관찰사가 親審하였고 前後文積이 照然한 경우, (2) 3년 내 排納充補無欠上納해야 할 경우로 나누고 있는데, 거의 대부분 (1)에 해당하는 것으로 분류하여 정리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이 자료는 1차적으로 미납 세금을 마감하기 위해 작성되었다고 보여진다. 한편 세금미납의 원인으로 의병의 戶錢 늑봉, 의병진압을 위해 설치한 관포군의 경비, 의병진압 관군(일본군 포함)의 방화로 인한 結戶錢의 소실, 의병의 結錢 탈취, 화적의 結錢 탈취, 화재로 인한 結戶錢 소실 등이 제시되고 있는데 여주 지방에서 1896년 의병운동이 매우 활발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자료는 바로 1896년 여주 의병운동에 관련된 자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의병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관포군의 경비를 結戶錢 중에서 지불한다거나 의병에게 결호전을 탈취당하는 경우는 다른 지역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의병이 戶錢을 강제로 징수하였다거나 의병진압 관군이 결호전을 불태워버린 경우는 흔하지 않은 일이다. 특히 의병의 戶錢 강제징수에 대해서는 14개 面 각면에 대해 村洞里(총 154개 촌동리)別로 금액을 정리하고 있다. 의병이 戶錢을 강제 징수한 기록도 흔하지 않거니와 面別, 村洞里別로 금액을 정리한 경우는 더욱 흔하지 않다. 이것은 1896년 여주지역 의병이 結戶錢 중에서도 특히 戶錢에 대해 반발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금액(총액)으로 보면 結錢이 훨씬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結錢에 대해서는 의병이 강제 징수에 나서지 않고(군자금으로 쓰기 위해 탈취하는 경우는 있다) 戶錢에 대해서만 강제 징수에 나서고 있는 것은 軍布(戶布)가 갖는 독특한 성격 때문이었다고 보여진다. 원래 양반은 부담하지 않았던 軍布가 갑오개혁 때 “戶錢”이라는 이름으로 양반에게도 부과되자 그동안 면세 특권을 누려 왔던 양반층이 반발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이 자료는 갑오개혁에 대해 반발하고 있는 양반의병의 모습, 1896년 초기 양반의병의 경제적 지향을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다. 또한 여주 의병장으로 알려진 沈相禧가 귀순하여 官砲軍이 된 사실을 담고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아직까지 심상희의 귀순 사실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별로 없었는데 이 자료에서는 관찰사가 선유한 이후 부하 砲軍을 이끌고 귀순하였으며, 귀순한 후 관포군이 되었고 관포군 경비까지 받았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도 1896년 6월 19일부터 8월 31일까지 관찰사의 지시에 의해 관포군 200명을 두어 의병을 방어한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1冊 11張으로 23.5×17cm의 크기의 筆寫本이다. 1990년 국사편찬위원회가 각사등록(v.47 : 경기도 보유편)으로 복제 영인하였다. 驪州郡印이 주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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