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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 공적비

김병기(金炳冀) 공적비(功績碑)1)

모든 우환에는 완급이 있고 재앙에는 대소가 있으며 액궁에도 천심이 있기 마련이다. 무릇 이를 당하는 자가 한 사람 한 몸의 어려움에 미치는 경우라면 그것은 한 가정의 그 것에 비하여는 가볍다고 볼 수 있고 그것이 한 가정에 미친다면 일린일리(一隣一里)의 그것에 비하여는 가볍다고 볼 수 있을 것이며 또 그것이 일린일리에 미친다 하더라도 일주(一州)의 그것에 비하여 볼 때는 아주 경미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재앙이 한 고을을 휩쓸었다면 그 재앙은 더욱 혹심한 것이며 이는 운수의 착착(錯着)과 관계된 일로 인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다행히 인인(仁人) 군자(君子)가 있어 온갖 힘을 다하여 이들을 위망(危亡)에서 구제하고 안도를 얻게하여 수천백 인으로 하여금 평상시와 다름없이 지내게 하였다면 그 은혜와 덕은 어떻게 보답할 것이며 또 감사하고 추앙하여 비(碑)에 각하고 하는 일을 어떻게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금사 7년 4월 12일에 화재가 발생하여 고을을 태우는데 광풍마저 크게 일어 주치(州治, 所在地) 수천백 호를 일시에 불태워 버렸다. 이네 남녀 노유가 사방으로 흩어져 갔는데 판돈령 김영근(金泳根)과 그의 아들 판돈령 병익(炳翼)이 서울에서 이 소식을 듣고 급히 사람을 내려 보내서 현장을 살펴보게 하고는 그간 저축하여 두었던 수백 석의 식량과 돈을 몽땅 풀어 다 죽어가던 사람들을 불러 모아 편안히 살게 하고는 유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이 고을에서 위급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하루 사이에 살게 하여 준 것이니 이는 실로 백년 도안에 한번 찾아볼 수 있는 은택이 아닌가? 이로써 온 고을에서는 집집마다 축문을 읽고 제사지내면서 혹시라도 이들의 공을 잊을까 저어하는 것은 사람의 고유한 인정일 것이다. 혹 후일 이 사실을 자세히 모르고 이들의 지극한 인덕과 은혜가 쇠미해진다면 이것은 우리의 바램과는 크게 어그러지는 일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연유로써 두 분의 뜻은 아닌 줄 알면서도 돌을 다듬어 여강(驪江) 위에 비를 세우니 천 백년토록 잊어서는 아니 될 사실이 여기에 있는 바이다.

함풍(咸豊) 10년(철종 11, 1860) 10월 일

金炳翼 功績碑

夫患有緩急災有小大厄有淺深而當之者或有一人一身之難而比一家則輕一家比一隣一里則鮮一隣一里比一州則徵以大難而遍一州則尤酷而實係運數之錯而有難以人力抵敵矣幸有仁人君子極氣力拯基危匡濟以得安使數千百人得以如常則其之悳宜如何而其或戴銘刻將何如世當宇七年四月二日華火燒邑狂風大起州治數千百家一時俱燼而老幼男女遑遑四逬判敦寧金公泳根及子判敦寧炳□在京聞之急命人下來視之盡傾歲殺累百石及鍾貨招諭瀕死之人使奠居不至失所則使此州危將死之人一得安實爲百年之澤而戶祝家戶不可或□者固人之情也或恐後來有未詳而使恩仁至惠或至浸徵則大非斯人之仰望故雖非二公之所欲而輒伐石刻之驪江千百年不忘故實在此

咸豊十年十月 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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