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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헌공 박준원 신도비명

충헌공(忠獻公) 박준원(朴準源) 신도비명(神道碑銘)1)

순조(純祖) 임금이 비문을 친히 짓고(御製) 전액(篆額)도 썼다.

조선국 보국숭록대부 행판돈녕부사겸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정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감사 시(諡) 충헌 박공 신도비명 병서

증영의정 충헌 박공은 나의 외조부이다. 소자가 공의 가르침을 받으니 정은 마치 친할아버지와 손자 같이 친하고, 겸하여 스승과 제자의 의리도 깊었도다. 어릴 적부터 장성하기까지 한 가지 선물을 알게 된 지혜와 한 글자를 익히게 된 것이 모두가 공의 공로가 아니라고 할 수 없으며, 공도 이에 몸과 마음을 다하여 면려하여 나를 대도로 인도하시고, 성인의 가르침으로서 훈계하시었도다.

일찍이 나에게 일러 말하시되 만일 학문을 전심하여 하지 아니하면, 장차 유명무실의 한스러움을 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성(誠)이란 실리이니 책을 읽지 아니하면 모르려니와 읽는다면 극진히 하시어 지루함을 참으시고 고통을 견디시어, 어떻게 해서라도 책임이나 면하려는 생각을 버리시고 겉으로 드날려 타물이나 쫓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이것은 곧 성이오니 즉 대학의 성의장(誠意章)에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단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데 만 그런 것이 아니오라 한마디 말을 할 때나 한 가지 일을 행할 적에도 모두 이와 같이 하며 조금이라도 허위가 없고 잠시라도 틀림이 없으면, 비록 이로 인하여 성인의 경제에 이르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중용에 스스로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혼자 있을 적에 삼가 독공(篤恭)에 이르면 천하가 태평하다고 한 것이 다른 도가 아니오라, 다만 이 한 개의 성(誠)자뿐이옵니다 라고 하시었다.

슬프다! 내가 그때에 나이가 어려서 능히 그 이치를 알지 못하였으니 어찌 듣기를 싫어하는 바가 없었으리요. 지금에 이르러 고요히 생각해보니 만약 다시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다면 감회가 일어나 그칠 줄 몰랐으리라. 돌이켜 생각하여 가슴 깊이 새기노니 이것이 내가 말한 친조부와 손자 같고, 사제와 같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도다.

공의 휘는 준원(準源)이고, 자는 평숙(平叔)이며 반남 사람이다.

시조는 신라 사로왕이고, 그 후에 절의가 고려조에 드러났으니 문정공 휘는 상충(尙衷)이고, 아조에 들어 와서는 좌의정 평도공 은(訔)이 있었으니, 훈업(勳業)을 일으키고 사간을 드러내었으며, 증영의정 문강종 소(紹)는 김안로를 적극 배척함으로서 그의 무리에게 견제된바 되었으나, 도학이 순일하고 올바라서 정암 조문정과 더불어 명성이 비등하였다. 호는 야천. 선생으로부터 4대를 전해 내려와 휘 세□(世□)에 이르러서 좌부승지 심(深)이 윤선도와 권사직을 배척하니 그의 굳은 절개와 청아한 모습은 당시의 명신이었다.

이조판서에 증직되시나 공의 고조부이시다. 증조부되시는 목사 태원은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고 할아버지 필리는 이조판서에 증직 받았으며, 아버지 휘 사석은 진사에 급제하여 여러 번 군수와 현감을 지냈고 집안에 ……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어머니 숙인은 기계 유씨로서 이조참판에 추증된 수기(受基)의 딸이다. 정경부인에 추증되니 둘째 아들이 공이다. 공이 귀히 됨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미루어 목사공 이하 모두 벼슬을 받았다. 공은 영종 기미 5월 20일에 한양마을 집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한 기질이 있고, 골격이 청아 수려하여 순수하게 생겼다. 부모가 매우 귀여워하였으며, 아주 나이 어릴 적부터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모시는 도리가 지극하고 정성스러웠으며, 행실이 예절에 어긋남이 없었다. 성품 또한 독서를 좋아하더니, 점차 자람에 뜻이 독실해지고, 옛 법을 좋아하며 육경과 백가를 모아서 열심히 읽고, 스스로 총력을 기울여 모르는 것이 있으면 자주 그의 백형 근제에게 문의하였다. 근제는 큰 선비였는데 문득 칭찬하여 이르기를 “동생의 식견이 정밀하고 민첩하여 내 도저히 따를 수 없다.”고 하였다.

신사년에 이르러 유부인의 병이 위독하여지자 친히 팔을 찔러 피를 내어 어머니를 먹이며 조금 병이 나은듯하더니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심에 안색이 초췌하고 너무 슬퍼하며 우는 모습이 처절하여 조문간 사람들이 모두 슬픔을 견디지 못해 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지 14년이 지나서 찬성공이 병들어 눕자 공은 곁에서 시중을 들면서 한 번도 띠를 풀은 적이 없더니, 병이 점점 위독해지자 아버지의 똥을 맛보아 길흉을 점치기도 하였으며, 밤에는 하늘에 기도를 하기도 하였다. 찬성공이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시니 슬퍼함이 어머님 돌아가셨을 적과 다름이 없었다. 백형을 섬기기를 마치 어버이 섬긴듯하니 사람들이 칭찬하여 말하되 “백강(伯康)의 우애를 오늘에야 다시 보는 것 같다.”고 하였다.

병오년에 사마시에 급제하니 공을 아는 자들은 모두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이 늦게야 뜻을 굽혀 조금 성취하였으나 그의 포부를 다 펴지 못하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리오.” 라고 하였다.

정미년에 건원능참봉에 기용되니 자궁(慈宮)의 부친으로서 처음으로 직책을 받은 것이다. 질급을 뛰어 넘어 사복시 주부가 되었다가, 다시 공조좌랑에 임명되었다. 처음에 우리 선왕께서 널리 저사(儲嗣)를 위하며 이름 있는 집안에서 간택할 때, 자궁께서 피선되었으니 공의 셋째 따님이시다. 2월에 가례를 치렀는데 상께서 그가 사는 곳이 협착하여 보잘 것 없음을 아시고 특별히 집 한 채를 하사하시어 살도록 하니 공은 황공하여 스스로 편안치 않아 하였다. 유사에서 옷과 그릇 등을 공에게 드리니 공이 모두 간략하게 살기를 원해서 끝끝내 사양하고 받지 않거늘, 상이 그 말을 들으시고 아름답게 여기시어 마침내 시종을 따라가서 보시고 교칙하여 이르시되 “박공은 바로 우리 동방의 훌륭한 족속으로 대대로 맑은 덕을 지켜내려 왔으니 오늘날 국혼은 진실로 다행한 일이로다.” 하시고 시종하던 신하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벼슬은 비록 낮으나 나의 대접은 여러 대신들과 같이 하리로다. 그의 품의를 보니 실로 참다운 재상이로다.” 하시고, 보은 현감에 임명하시니 공이 부임하시어 크게 정치의 바탕을 얻으시고 법률을 지켜서 위엄과 은혜가 아울러 베풀어지니 관리는 그를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감복하였다. 공사간 임금을 뵘에 상이 세자의 잉태가 늦음을 공에게 말하니 공이 말하되 “곤전의 춘추 아직은 …… ” 하거늘 상이 그의 잘못이 없음으로 면대하여 주청하는 말을 칭찬하시었다.

경술년에 자궁이 임신을 하여 달이 거의 참에 상이 공을 명하여 중궁에 숙직토록 하였다. 조금 후 소자가 태어나니 호를 정하여 원자라 하고, 공을 발탁하여 통정의 직급에 올리시고, 호조참의에 임명하시고, 또 원자의 외조부라 하여 의례히 한 계급 품직을 올리셨다. 상께서 공이 굳게 사양할 마음이 있음을 아시고 공에게 강력하게 명하시었다. 공이 이미 원자를 보양하라고 명을 받은즉 강보로부터 시작해서 철이 날 때까지 항상 쉴 새 없이 따라다니며, 음식을 먹을 때니 기거동정을 항시 살피고 조석으로 노고를 아낌이 없어, 행여나 조금이라도 게을리 함이 없으셨다.

계축년에 공이 숙선옹주의 출산을 잘 보호한 공으로 마땅히 직급을 올려 주었으나 공은 또 굳게 사양하시니, 대신 말을 하사하시었다.

병진년에 숙선옹주가 마마병을 앓아서 상께서는 소자와 함께 이문원(文院)에 피신하였다. 공이 혼자서 간호하시어 병을 다스림에 때를 잃음이 없으시니 병이 완전히 낫게 되었다. 이달에 형조참의에 임명하시었는데, 기미년에 백형근제가 죽으니 공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이해가 바로 공의 회갑이 되던 해인데 찬송과 어머님을 생각하시고 또 근제를 생각하시어 술과 반찬을 잡수시지 않으셨다. 상께서 일찍이 교지를 내려 이르시되 “어린 세자를 보호함이 경의 한 몸에 달렸으며 겸하여 보필하고 인도하는 책임이 주어졌도다. 나라에서 원래는 보양관을 두는 것이거니와 내 그 관직을 갖추지 않는 것은 따로이 생각이 있음이로다. 또 책봉 후에 비록 사부를 둔다하나 천만사람 인도함이 경만 같지 못하리니 경은 스스로 권면 고과하라.” 공이 황공하여 대답하되 “원자궁이 점점 자라니 빨리 올바른 사람을 가려서 조석으로 보필토록 하여야 하옵니다. 또 성상께서 몸소 가르친다면 훌륭한 학문을 성취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으리다.”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내가 공의 학문이 높음을 알았고 점점 자람에 경전으로서 가르쳐줌에 그 과정이 매우 준엄하고, 겸하여 정주의 잠명(箴銘)에 통하니 공이 친히 스스로 손수 추하신 것이다. 이로부터 날마다 노력하여 거의 물러가 밥 먹을 여가도 없으셨다. 상께서 공이 점점 늙어감을 민망히 여기시어 진귀한 보약을 하사하시었다. 공은 직소에서 물러나 처하면 오리려 공복을 입고 꿇어앉아 책을 대하되, 여름날 극심한 더위에도 한 번도 폐하는 날이 없었다. 성께서 일찍이 사람을 시켜 살피도록 하시고 그 증상을 아시고는 말씀하시되 “이 사람이야말로 신독(愼獨)하는 공부가 훌륭하다”고 하시었다. 근제의 학문과 덕행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남에 상께서 연신(筵臣)을 일러 말씀하시되 “이 사람은 내 진실로 잘 알고 있노라. 내 그 동생을 봄에 역시 학자의 기품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항상 몸가짐과 행동을 삼감에 탄복하지 않음이 없으셨다 또 경전의 뜻에 밝고 익히 알아서 유선(諭善)의 재주에 가합하나, 하필 관직으로써 얽어매어 원자를 보호하고 인도하도록 하시오. 그의 공이 이미 많고 많으나 내 또 경신년에 상이 병환이 있으시자, 공은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나타나고 부모의 병환을 만난 것과 다름이 없으셨다. 슬프도다! 마침내 하늘이 무너지는 비통함을 만나서 공 또한 애통하여 호곡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나를 붙들고 우시며 힘써 울음을 억제하며 나를 달래었다. 처음에 상이 내 나이 유충함으로 부친의 병환을 간호함에 민망히 여기시어 물러갈 것을 명하시니, 이때에 내가 몸 둘 바를 몰라 궁전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강경하게 만류하니, 다행히도 공이 대신에게 말하여 전궁에 고하여 임금의 병환이 매우 심각해질 즈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니 슬프다! 공의 말이 없었다면 내 종천(終天)의 한을 면할 길이 없었으리라. 이날로 정순성후께서 공을 임명하여 총융사로 삼으시었다가, 다시 어영대장을 제수하시고, 인하여 숙직토록 며하시고 다시 공조참판을 제수하시었다. 7월에 대신들이 공을 발착하여 자헌의 직급을 줄 것을 청하니 후께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오늘날 이 지경을 당하여 주상께 어리고 나라의 형편 또한 외롭고 위태로우니 장차 누구를 믿을고?” 하시고 공조판서를 명하시고 총하시니 직책을 담당토록 하시었다. 다시 옮겨 장용사를 임명하니 대신들이 혼전도감 당상을 임명할 것을 주청하였다. 정순성후께서 수령청정을 하심에 세 대신과 공, 영돈녕을 불러서 국사에 힘써 달라 당부하니, 공이 여러 번 선왕의 조서를 받들어 경계하였다. 이에 이르러 사양하고 명을 받들지 않았으나 현궁의 명정을 쓴 공으로서 정헌에 승급시키고, 특별히 차출하여 효원전 향관으로 임명하고, 형조판서를 제수하였다. 정순성후가 지성으로 보호하여 품계를 올려줌이 합당하다하여 공을 숭정 판의금 직에 탁용하고, 또 판돈령을 제수하시었다. 임술년에 금위대장에 임명하고, 십일월에 나의 병이 회복되지 숭록으로 직급을 올리니, 대개 숙직을 한 공로이다. 을축년에 내가 다시 마마를 앓았는데 공의 노고가 매우 많고 시종여일하였다. 내 이미 병이 나아서 보국으로 질급을 높여주고, 겸하여 공조판서를 임명하니, 공이 매양 임명장을 받들고 두려워하며 반드시 사양하였다.

그가 매우 늙고 또 병들었다 핑계하여 관직을 쉬고 휴양할 뜻이 있어, 이해 가을에 사제에 물러나 있을 것을 굳게 요청하므로 내 부득이 윤허하여 퇴거토록 하였다. 병인년 겨울에 갑자기 품질을 앓더니 정묘한 봄에 병이 심하여지거늘 내 놀라고 염려되어 내시를 보내어 병을 살피도록 하니, 공이 말을 못하고 손으로 글쓰기를 임금께서 병을 탐문하시면 신하는 대례복과 띠를 갖추어야 한다고 써서 보여주니 임금께서 그 얘기를 듣고 울며 실성하셨다. 그는 비록 병이 들었으나 예의와 공경을 잃은 적이 없었다. 이같이 하다가 2월 7일 정침에서 돌아가시니 향년이 69세이다. 내가 백관을 거느리고 조의를 표하고 그날로 은졸(隱卒)의 교지를 내리고 상상(上相)에 추증하고 충헌의 시호를 하사하였다. 성복일에 직접 가서 조문하려하니 여러 신하들의 차문(箚文)이 있었으며, 또 자궁의 간곡한 교시를 받들어서 마침내 갈 것을 중지하고, 승지를 보내어 친히 조문을 지으시고 장례와 제사를 대신의 예로하고 또 내수사에 명하여 모든 비공을 제공토록 하였다.

4월 십쭛일에 여주 황금평 부인의 묘 남쪽 언덕에 장례하니, 합장하려 하였으나 지세가 불편하여 다른 곳에 장례를 치루고, 다음해 9월 20일에 소문리 묘좌 언덕에 이장하니, 남으로 부인의 묘와는 거리가 수백 보 사이라. 서로 바라보인다.

슬프다! 공의 큰 공은과 위대한 업적은 나 소자가 비록 무슨 일 등이라고 지적하여 말할 수는 없으나, 평일에 보고 듣는 것을 대략 말하면,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누가 착하고 어진 일을 하기 싫어 하리오마는 매양 문채로 장식하여 허위만을 일삼으니 고전에 이르되 “그 사치스러운 것 보다는 차라리 검소한 것이 낫다”고 함이 대개 공부자께서 당시 세속의 폐단을 깊이 탄식한 것이로다. 해와 달이 하늘에 떠 있어서 쳐다볼 수는 있어도 굽어보기 어려우며, 모든 물체가 땅에 드러나 있어서 볼 수 있어 제어하기 쉽도다. 저것이 바로 멀어서 알기 어렵고 가까운 것은 살피기 쉬운 이치이다. 만일 능히 학문하는 자의 남음과 부족한 점을 참고할 수 있다면 모두 예의에 벗어나지 않고, 행실에 돈독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은 실로 그러한 사람이었다. 무릇 삼가 일을 하고 정성을 다하고, 신용이 두터웠으며 간절하였으니, 오직 공의 언어가 그러하였고, 검소하여 공경을 숭상하고 사치하지 않으니 오직 공의 공검(恭儉)이로다. 성실하고 한결같아 마치 영만(盈滿) 함을 잡은 듯 함은 오직 공의 충효이다. 유순하고 화목하며, 남의 잘못을 덮어주고 거친 것을 포용함은 오직 공의 너그러움이다.

상이 일찍이 공을 돌아보고 말하되 “서적에 능통하고 이치를 깨달은 자가 올바른 선비라 할 수 있다. 한 세상을 도도하게 지낸다 하니 과연 그런 사람이 있는가. 내 조정에 임하여 탄식하고 인하여 시사에 대하여 언급한다.” 공이 답하여 시전에 이르기를 “문왕이 오래도록 편안하시었으니 어찌 인재를 양성하지 않았으리요. 능히 인재를 양성하여 어진 신하 열 명이 있다.”고 하셨으니 전하께서 문왕과 같은 덕이 있으시고, 수명도 또한 문왕과 같으신 즉 인재를 양성하는 교화를 어찌 주나라에 사양하시고 이와 같이 인재가 없는 한탄을 하시나이까? 오직 인군만이 진퇴소장(進退消長)의 기미를 깊이 살피시어 조정을 바로 잡으소서, 그 근본이 천리를 따르고 인간의 사욕을 막는데 있사오니 우선 인군의 마음이 올바라야 하나이다.” 하니, 상이 아름답게 여기시어 가납하시니 이로부터 공의 언어가 진실하고 믿음직스러움을 아시었다고 한 것이 이를 두고 하신 말씀이시다. 성품이 본시 담박하고 기용은 진귀한 것을 구하시지 않으시니 비록 문방의 도구를 갖추었으나, 오히려 그 모두가 질박하였으며, 그것을 자손에게 보이셨다. 일찍이 직로(直蘆, 蘆墓)에 계실 적에 상이 소자로 하여금 가서 보도록 하시었는데 좌처에 자리 하사와 서책 너 댓 권이 있었으며, 먼지가 그 가운데 가득 쌓여있었다. 상이 명하여 그것을 고쳐주시니 일찍이 고량진미나 사치함을 싫어하였다. 어머님께서 그 뜻을 받들어 담백한 음식을 드리니 상께서 그것을 보시고 찬탄하시었다. 내 또다시 살펴보니 입은 옷은 다 떨어지고 좌석도 모두 떨어졌는데 손으로 책을 잡으시어 오직 책 읽는 일을 그치지 않으셨다. 처음부터 의복과 음식의 절도가 있고, 벼슬에 뜻이 없으므로 공의 검소함을 알 수 있으니, 공경을 숭상하고 사치스러움을 버렸다 함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집에 있을 적에 효도를 독실하게 하고, 다시 임금에 옮겨 극진히 섬기며, 그 엄숙하고 공경함을 극진히 하여 진퇴행지에 모두 일정한 장소가 있어서 좌우측근 신하가 혹은 이름조차 모르며 연한(燕閑)에 가까이 모시고 경적(經籍)을 토론하기로 하였다.

상께서 특히 시정의 득실을 물으시면 다만 묻는 말에만 대답할 뿐 한 번도 국가 대사에 간여하지 않으셨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세도 형정(刑政)을 일컫지 아니하고, 이르되 형정이란 인주의 권병입니다. 신이 어찌 감히 우롱할 수 있겠습니까? 또 오직 임금이라야 위엄도 지으시며, 오직 임금이라야 복도 짓는다는 글에 세 번 네 번 외우시며 탄복하시었다. 국가 형편이 급한 때를 당하여서는 보호하고 도와 안정시키시어 일찍이 옛 헌신 양보에 지나칠만 하시었으나, 조금도 스스로 자만하는 일이 없으셨고, 항상 겸손하고 자상하시며, 삼가 공경하고 또 두려워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공의 충효를 알 수 있으니 영만을 잡은 듯하다 함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사방에 곤궁함을 돌보시고 사람을 대하고 물건을 접할 적마다 어려운 속에서도 충후한 뜻이 있으시며, 남의 잘못을 보면 못 본 듯이 하시고, 남의 선행을 들으면 기뻐하고 소문을 내시었다. 백성을 다스리고 하인을 부림에 채찍을 휘두르는 위엄을 가하지 아니하고, 너그럽고 어진 덕으로서 다스리니, 일찍이 호남의 목민관으로 있을 적에 인자하기 어버이와 같다는 칭송아 자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공의 마음이 넓어 사람을 포용하고 용서함은 바로 이를 말함이로다. 무릇 이 여러 가지 아름다움이 문질이 갖추어진데서 나오지 아니함이 없으셨도다. 그러함에도 오히려 열 눈이 보고 열 손가락이 손가락질하는 듯이 두려워하고, 조심하고 조심하시었으니 어찌 혹시라도 공에게 사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아! 공의 천분이 본래 소박하고 고상하시며 또 일찍이 경사를 완미하시고 그 가르친 뜻을 강구하시어 체험의 방법으로 삼으시고, 존양의 공에 가하시며 깊숙이 혼자 있는 가운데에서 살피시고 경계하시며 주선의 즈음에 착한 행실과 아름다운 덕이 현재의 법이 되며, 나라에 충성하고 집안에 효도함이 당시에 뛰어 나시었으니 그 중심에 성실함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면 능히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인군에게 고할 적에 반드시 그 본원으로서 주장하시었고, 나를 경계하실 적에 실리로서 힘쓰셨도다. 공의 사적을 기록하고 공의 일을 기록함에 다만 이 한 개의 성(誠)자 뿐이로다. 다만 소자가 힘을 입었을 분만 아니라, 실로 국가도 힘을 입어 편안하였는데, 향년이 80도 미치지 못하고 돌아가시니 슬프고도 슬프도다. 공이 시문을 짓는 재주는 풍부하고 아름다우며, 글 쓰는 솜씨 또한 고상하고 아담하여 글의 척도가 있었다.

그의 평생 업적을 모아둔 몇 권의 책이 집에 간직되어 있다. 부인의 성은 원씨이니 원주가 고향이다. 이조참판에 증직된 경유(景游)의 딸이고, 목사 영의정에 추증된 명구(命龜)의 손녀이며, 흥평위 몽인의 증손이다. 원평부원군 두표의 5대손으로 일찍이 부친을 잃고, 스스로 시와 예의로 소일하였으며 여중 군자의 칭찬을 들었다. 공보다 24년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으니 장삼 종보는 음서로 판서를 지냈고, 그 다음 종경은 문과에 합격, 참판을 지내고, 종익은 일찍 죽었다. 다음 종희는 감역, 신광해와 어영장 이요헌이 두 따님의 남편이며, 측실에서 2남 2녀가 살았으니 모두 어렸다.

종보는 군수 서광수의 딸을 아내로 맞아 3남 3녀를 낳으니, 장남 주수는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이 되었고, 차남 기주는 종경(宗慶)에게 양자로 갔다. 다음 호수는 종익의 뒤를 이었고 딸은 진사 김병구에게 출가했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종경은 현령 이술모의 딸을 맞았고, 종익은 사인 유언우(兪彦宇)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종희는 첨추 이언찬의 딸을 아내로 맞아 1남을 낳으니 어리다. 이요헌은 3남 1녀를 낳으니 장남은 정신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딸은 남수헌에게 출가했다.

슬프다! 나 소자가 삼가 이 글을 지었는데 공의 아들 종경이 공의 유사(遺事)를 찬술하였다는 소리를 듣고 그걸 취하여 상고하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은 참고하여 공의 지성을 기록하는데 불과할 뿐이니 아아! 훌륭하여라! 내 마침내 비명을 지으니 비명에 이르기를 크도다! 충헌이시여! 조상의 선풍(先風)을 이으셨도다. 총민하시고 박물하시어 사물에 통하지 않음이 없으시네. 검약하시고 간절 준엄하시며 후덕하시고 겸손하시네. 옥같이 온화하시며 금과같이 정밀하시었다. 공은 우리나라에 태어나시어 그 뜻과 기상이 맑고도 넓으셨다. 마치 강하의 물을 터놓은 듯 충효 가히 본받을 만 하였다. 예의는 바로 법이 되었으며, 매사에 반드시 조심하시었네. 매사를 행함에 삼가시며 언앙굴신(偃仰屈伸)에 먹줄을 따르듯 여하하시었도다. 공은 항상 근면을 숭상하고 질박하여 허황됨이 없으셨다. 서적으로 스승을 삼고 성현의 말씀을 따르셨네. 利義에 밝으시니 학문의 근본이로다. 공더러 마음이 가을 물처럼 맑고 깨끗한 때문일세. 정직한 군자라고 오직 공의 칭찬이 자자하다. 대대로 공의 집안에 경사가 끊어지질 않았으니 우리 자궁을 탄생시키셨으며, 녹을 받은 것도 매우 많도다.

소자가 경술년에 태어나니 공의 책임 더 더욱 중해졌다. 심신을 다하여 보호하시었고, 처음부터 지금껏 공의 마음 여일하셨네. 명을 받들어 나를 가르치고 인도하시었으나 공께선 그 공을 자랑치 않으셨다. 부지런히 나의 독서를 고과하시고 나에게 진실을 권면하시었네. 정성으로 자신을 속임이 없으시니 이로부터 성역에 들어가셨다. 황왕의 대도를 강론하는 자리에서 독송하시고 말씀하시며. 18년 동안 가르치심이 오직 정직뿐이셨다. 선조에게 지식을 인정받으시어 더욱 더 깊고 깊어졌다. 목을 돌려 돌아보고 묻기도 하였으며, 궁정에 음덕을 옮겨 심으셨다. 공은 본래 단정하기를 요청하고 국왕의 마음을 기쁘게 하시었다. 경언에 임하여 아름다움을 포상하시고, 학문이 무성해지기를 기원하셨다. 왕의 말은 사사로움이 없어야 한다하니 진실로 공의 스스로의 본심이로다. 천붕을 만나서 내 나이 유충하였는데 다만 그분의 공이 아니었다면 무엇을 힘입어 성취하였으리오? 때는 암업한 시기를 만나서 주초, 동량과 같으셨다. 마음을 맹서하여 스스로 정숙하셨네. 선왕께서 등용하여 공로 깊고 깊으셨네. 청렴하시어 없는 것과 같으시고, 경적을 열어 보시었다. □□하고, 남은 시간에는 고기와 비단옷을 금하셨고 오직 소박하고 청조하시었다. 그의 공덕은 책으로는 다말하기 힘들도다. 이에 비석에 새겨 길이 멸하지 않게 하노라.

순조(純祖) 임금이 전액(篆額)을 어필(御筆)하였다.

둘째 아들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실록성균관사 규장각 직제학 지제교 오위도총부부총관 신 박종경 교지를 받자와 씀.

숭정기원후 4 기사(순조 8, 1808) 5월 일 세움.

忠獻公朴準源神道碑銘

御製御筆 朝鮮國輔國崇祿大夫行判敦寧府事兼工曺判書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謚忠獻朴公神道碑銘幷序

贈領議政忠獻朴公予外祖也小子受公之敎情有祖孫之親兼有師弟之義自幼至長凡一物之知一字之通莫非公之功之誠則公乃殫竭勉勵鞠躬盡瘁導我以大道戒我以聖訓嘗謂豫曰若不專一學問則將未免有名無實之歎誠者實理也不讀則至旣讀惟當眞實讀之不做則已旣做惟當眞實做之番番留其心字致其思耐遲久耐辛苦無略綽塞責底意無飛揚逐物之念此便是誠卽大學誠意章之無自欺也不但讀做爲然發一言行一事皆如此無一毫虛僞叅錯於其間則雖由是開至於聖人不難中庸之自戒懼謹獨至篤恭而天下平無他道只是一箇誠噫豫其時年幼而未能識理豈無所厭聞到今靜思若有再聞者興感不至追思服膺此豫所而祖孫而師弟云者其斯歟公諱準源字平叔潘南人鼻祖斯盧王其後有以節義顯于麗文正公諱尙衷入我朝左議政平度公諱訔勳業茂著司諫贈領議政文康公諱紹力斥金安老爲無黨所擠道學純正與靜菴趙文正齊名號冶川先生四傳至諱世□左副承旨深斥尹君道權諰直節雅望爲時名臣 贈吏曹叅判公高祖也曾祖考牧使諱泰遠贈吏曹參判祖考諱弼履贈吏曹判書考諱師錫中進士屢經郡縣家無遺□贈左贊成妣淑人杞溪兪氏贈吏曹參判受基之女贈貞敬夫人生二男公其次由公之貴推恩於牧使公以下國典也公以 英宗己未五月二十日生于漢陽里第生而有異質氣宇淸秀骨格俊爽父母鍾愛自在髫齡愛親事長之道出於至誠動靜事爲合於禮節性又好讀書及長篤志好古取六經百家之文而讀之益自刻勵質疑問難於伯兄近齋近齋大儒輒稱日識解精敏有吾所不及辛巳兪夫人病篤親刺臂出血以進得以少延乃喪顔曾之慽器泣之哀吊者亦悲越十四年贊成公寢疾公左右扶將衣不解帶疾革嘗糞驗其吉凶夜禱於天贊成公章不起哀毁之節若初事伯兄如事嚴父人稱伯康之愛復見於今日丙午中司馬知公者皆歎曰此人晩屈小成未展所抱豈非天也丁未 除拜 健元陵參奉以 慈宮父親初授職任也超陞司僕寺主簿移 除工曺佐郞初惟我 先王爲廣儲嗣揀擇名闕 慈宮被選 慈宮公之第三女也二月行 嘉禮 上知其所居狹 特賜第以居公惶蹙不自安有司以服飾器用質公公皆願省約終始辭拒 上聞而嘉之遂從之賜見敎曰朴是我東盛族世守淸德今有國婚誠多幸顧謂侍臣曰官雖卑予之待之與大臣等耳見其風儀眞宰相也 除報恩縣監公蒞任大得治體守法律而威惠並施吏畏民服公私覿 上以儲嗣晼晩語及於公公對曰 坤殿春秋尙有□斯之□ 上以不失奏對稱之康戌 慈宮有娠旣彌月 上命公直宿禁中小子生定號元子 擢公通政拜戶曺參議又以元子之外祖例加一資 上知公有固辭之心許以置之公旣受 命保養則始自襁褓至于衣成起居常隨飮食必察晨夕勤勞靡或少懈癸丑公以淑善翁主護産之勞當陞資公又辭之代以錫馬丙辰淑善患痘 上與小子避御擒文院公獨自看護治不失時得以順經是月 除刑曺叅議己未伯兄近齋卒公悲慟不勝是歲爲公之回甲思贊成公與母氏又思近齋不食酒饌 上嘗敎曰保護中子在卿一身而兼有輔導之責 國朝置輔養官而予所以不備其官有意存焉且冊封後雖有師傳諭善不如卿自內勸課公惶恐對曰元子宮衣尺漸長丞選正人朝夕左右且 聖上以身敎誨則成就睿學莫過於化也先是予學語公已曉以文字稍長授以經傳程課甚嚴兼通程朱箴銘公親自手抄也自是日益勞幾無退食之暇 上悶公且老時 賜珍劑公退處直所則猶著公服跪坐對書不以劇暑而廢之 上嘗使人視之知其狀曰此人愼獨之工多矣及近齋以學行選僚屬 上謂筵臣曰此人予固知之以予觀之其弟亦學者禁直多年操躬飭行無不歎服且明習經義可合諭善之材然何必以官職縻元輔導之子勞勩已多予以亦文賴其力庚申 上有癤侯違豫公憂形於色無異父母之疾嗚呼竟遭天崩之痛公亦哀號飮泣扶我勉抑寬我初上悶予冲年侍疾 命退此時予罔措欲入 殿宮强挽之幸公言于大臣告于 殿宮入訣于 大漸之際嗚呼徵公之言予不免終了之恨是日 貞純聖后拜公爲摠戎使旋除御營大將仍 命直宿拜工曺參判七月大臣請擢公資憲 后歎曰當今日此境主上幼冲國勢孤危將誰恃之乎 除工曺書義禁提擧摠管之職移拜壯勇使大臣啓差 魂殿都監堂上 貞純聖后垂簾召三大臣及公領敦寧勉以國事公以屢承 先王詔戒之意辭不承命以 玄宮銘旌書寫之勞陞正憲特差 孝元殿享官拜刑曺判書 貞純聖后以保護至誠正合陞品 擢公崇政判義禁職又拜判敦寧壬戌除拜禁衛大將十一月以予疹候平後陞崇祿盖直宿勞也乙丑予患痘公爲勞甚多終始一予旣愈加輔國拜兼工曹判書公每承除旨兢蹙必辭及其篤老且病有休官靜養之意是年秋請命退居予不得已許之以時起居丙寅冬猝患風痰至丁卯春疾益危予驚慮遣中使視疾公□訥語不能以手書疾君視之加朝服拖紳示傍人必加朝服聞予言泣失聖雖病不失敬禮如此二月七日終于正寢享年六十有九予率百官擧哀卽日下隱卒之敎贈上相謚忠獻成服日欲臨吊有諸臣之箚又承 慈宮懇敎遂止之遣承旨親撰文吊祭葬以大臣禮亦命內需司供辦四月十□日葬于驪州黃金坪夫人墓南岡將欲合祔以地勢不便更卜他兆翌年九月二十日移葬于蘇文里負卯之原距夫人墓爲數百步許封域左右相望嗚呼公之大功偉績予小子雖不敢指的某事而言然平日所覩所聞者略言之人生於世孰不願爲善爲賢每多崇文飾虛僞攻傳云與其奢也寧儉盖夫子深嘆時俗之弊也日月麗天可瞻而難附群物著地可見而易制夫遠不可識之之觀也近而易察質之用也若能參於文者之有餘質者之不足則皆中於禮篤於行公實有焉凡翼翼訴訴誠信懇惻惟公之言語也兢兢休休崇敬去奢惟公 之恭儉也洞洞屬屬如執盈滿惟公之忠孝也柔柔和和包荒隱過惟公之寬恕也 上嘗顧謂公曰識書識理自是士類滔滔一世果有其人乎予所以臨朝發歎仍語及時事公對曰詩云文王壽考何不作人能作人乃有十亂 殿下有文王之德而壽考如文王則作人之化何讓於公周家而有此無人之歎乎惟人君深察於進退消長之機以正朝廷其本在於存天理遏人慾先正君之心 上嘉納之由是知公之言語誠信懇惻此之謂也性素澹泊器用不畜珍玩雖文房之具尙其質朴以示子孫嘗在直廬 上使小子往見樸陋坐處一席而書帙四積塵滿其中 上命改葺之嘗厭膏梁 慈宮承其志具淡味以奉 上見之嘆焉 予又見之所衣皆弊坐席皆落手執書惟不輟焉初不留意□衣服飮食之節冠帶搢紳以禮服也公必整肅端束由是知公之恭儉崇敬去奢此之謂也在家篤孝移以事君盡其嚴敬進退行止皆有常所左右近恃或不知名昵侍 燕閒討論經籍 上或問時政得失只對其所 詢之事一不干於國家大事至今未嘗稱世道刑政者人主之柄也臣豈敢弄之哉又誦惟辟作威惟辟作福三復咏嘆當國勢岌嶪之時扶翊保定殆過於古之賢臣良輔未嘗自滿謙遜詳謹戒愼敬懼由是知公之忠孝如執盈滿此之謂也周給困窮無厭薄之色待人接物由其悃愊藹然有忠厚之意見人之過若不見焉聞人之善喜而揚焉治民御下不加鞭朴之威御以寬仁之德曾在湖邑稱以慈父由是知公之寬恕包荒隱過此之謂也凡此衆美無不出於文質之俱尙十目之視十手之指豈或有私於公者哉嗚呼公天分素高又嘗耽玩經史講究旨義資以體儉之方加其存養之工省察乎幽獨之中□□乎周旋之際善行懿德動法賢聖忠國孝家卓於當時其非誠於中者發於外則能如是乎故告 君也必主其本原戒予也勉之以實理紀公之蹟記公之事只是一箇誠字非但小子之有賴實國家賴安而享年未及大耋音容永閟慟哉慟哉公詞藻富麗爲文古雅典重有作家尺度其平生述作□集爲畿券藏于家夫人姓元氏系出原州 贈吏曺叅判景遊女牧使贈領議政命龜孫興平尉夢鱗曾孫原平府院君斗杓五世孫也早失嚴訓自閒詩禮端莊靜肅婦德甚備有女中君子之稱歿先公二十四年生四男三女男長宗輔蔭判書次宗慶文科叅判次宗翊早死次宗喜監役申光誨御將李堯憲其兩女婿側出二子二女皆幼宗輔娶郡守徐廣修女生三男三女一男周壽文科翰林次岐壽宗慶取以爲子次鎬壽爲后於宗翊女適進士金炳球餘幼宗慶娶縣令李述模女宗翊娶士人兪彦宇女宗喜娶僉樞李彦燦女生一男幼李堯憲三男一女長鼎臣餘幼女適南壽獻噫予小子謹述此文聞公子宗慶撰公遺事取以者之參以目見而耳聞不過記公之至誠而已嗚呼盛哉遂爲之銘銘曰 大哉忠獻承祖先風聰敏博物物無不通儉約簡嚴重厚謙恭玉溫金精公生我邦志氣淸濶如決河江忠孝爲法禮義爲規每事必謹每行愼微偃仰屈伸繩墨自如公所崇勉質而不虛書以爲師聖賢之言明於利義資學而然謂公方寸秋水澄淸正直君子惟公之稱毓愛鍾詳于公之家誕我 慈宮受祿禮多小子以降歲惟庚戌公任保護鞠躬殫竭自始至公心則一承 命輔導公功不伐勤我課讀勉我眞實誠無自欺由是聖域皇王大道誦說前席十八年敎其敎也直受知 先朝眷契彌深引經顧向宮庭移陰公請端本有喜 宸心臨筵褒嘉諭以學茂王言無松公固自有惟庚 天崩予在冲幼非直寡躬賴以成就時値岌嶪柱石棟樑矢心自靖獻于 先王以若勳勞歛却若無看閱經籍勤課之餘禁臠綺紈儒素淸操事爲功德書不勝道迺銘斯碑永詔來許

二男嘉善大夫吏曺叅判兼同知 經筵義禁府 春秋舘 實錄成均館事 奎章閣直提學知製敎五衛摠府副摠管臣朴宗慶奉 敎謹書

崇禎紀元後四己巳五月日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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