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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로사비명병서

대로사비명병서(大老祠碑銘幷序)1)

정조(正祖)의 어제어필(御製御筆)이다. 천하에 큰 가르침이 다섯인데 그중에 어진 이를 제사 지내주는 것이 제일 첫째가 된다. 어진 사람은 가르침이 그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들에 모닥불을 피우고 전향(膻薌)으로서 그 정성에 보답하고 빈번(蘋蘩)과 온조(薀藻)로 그 덕을 보답하고 보개(簠簋)와 변두(籩豆)로 그 문장에 보답하고 통촉황홀(洞屬恍惚)함으로 그 공경에 보답하나니 그러한 뒤에라야 거의 신이 흠향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제사란 반드시 명분이 있어야하니 그 명분이란 안녕치 못해서는 안 된다.

주공의 사당은 동락(東洛)에 세웠고 무후(武侯 : 제갈량)의 사당은 반드시 영안(永安) 근처에 세웠으니 이것이 명분이라 할 수 있다.

우리 효종대왕은 천에 한 분의 성군으로 액운을 만나시어 상처 입은 백성들을 보전할 것을 생각하시며, 비밀리에 깊은 곳에서 정책을 논의하시었다. 때마침 덕을 함께 하려는 신하가 있어 마치 고기가 물을 만나 떨어질 수 없듯이 서로 부합되었고, 춘추를 잡아서 선후로 상소를 올려 떳떳한 교화를 널리 폈으니, 곧 선현 송 우암(尤菴)이 이미 이런 경지에 이르시었다. 저 효종이 돌아가신 다음에 선정(우암)께서 홀로 서서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으셨으며 왕의 능을 여주로 이장할 때에는 일찍이 주구(珠丘)에 가까이 하였으며 울면서 송백(松栢)을 쳐다보면서 슬피 통곡하여 잊을 수 없이 생각하였으며 지금에 이르러서는 땅을 가리켜 군신의 관계를 회상케 하시었다. 이제 우암이 죽은 지 오늘까지 백여 년이 지났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과 그가 숨어서 수행한 곳과 본래 근원이 되는 곳엔 일찍이 명사들이 모여들어 더러는 홀로 그를 제사 지내기도 하고 더러는 서원을 만들어 신주를 모시고 제사 지내기도 하며 그의 덕행을 사모하고 또 그의 실행을 천하에 밝히니 거의 은혜를 갚는데 유감이 없도다. 이 여주 땅도 그가 머물러 있던 곳이라서 을묘년간에 사당을 지었더니 조정에서 헐어야 한다고 의론이 분분하여 하는 수 없이 헐고 나서 짓지 못하였다. 대체로 사원(祠院)을 짓는 것이 본래는 학교를 짓는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원에는 반드시 사당이 따로 있어야 하니 실로 미름(米廩 : 魯나라의 학교)에서 제사를 지내던 것에서 유래되었고, 고종(瞽宗 : 殷나라의 학교)은 그 사람을 제사 지냈으니 이 땅에도 정의(精義)가 분명하다. 더구나 선정이 영릉에 대하여는 마치 주공이 성왕을 보필하듯 하였으며 무후가 소열황제를 보필하듯 하여 마치 물이 땅을 떠날 수 없는 것과 같았으니 오히려 하루라도 임금 곁을 떠나지 않고 전력으로 보필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 슬프다. 다른 사당도 영왕 곁에 세워졌거늘 여상(驪上)에 우암의 사당을 세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내가 왕위에 오른 지도 3년이 지난 지금 기해년에 길을 택하여 영능을 참배하고 여주 청심루에 머물면서 여러 선비들이 다 함께 선정의 사당을 지을 것을 주청하므로 내 즐겨듣고 허락하였더니 그 후 7년 을사에 사당이 비로소 지어지고 이에 사당에 영을 편안히 모시고 그 이름을 대로사(大老祠)라고 하였다. 그 후 3년이 지나서 선정이 태어난 세 번째 회갑일에 비석을 그 뜰에 세우고 그를 제사지내는 의를 말하였다. 사당은 고을 동헌에서 수 백보 떨어진 청심루 서쪽에 있고, 영릉에서 2리쯤 떨어진 곳에 있어 학록진과 가깝다. 그 뒤는 우뚝 우뚝 솟은 암벽이 억누르고 있고, 여강(驪江)이 못처럼 들려있어 도도히 동쪽으로 흐르고 있다. 남쪽으로는 하봉(霞峰)이 있고 앞에는 물이 공손하게 흐르고 있으며, 북으로는 연탄강이 흐르고 용문이 둘러 싸여서 아주 절승 가경을 이루고 있으니 기다림이 있는 듯 더 더욱 아름답다. 비록 그러하나 무릇 우리들이 선정의 사당을 지키고 선정의 학문을 강론하는 일에 일월성신의 뜻에 응하고 낙민(洛閩)의 학통을 관감(觀感)함이 없이 진퇴읍양에 안색은 정중하나 마음속으로는 거만하고, 학문(春詩冬禮)을 함에 처음에는 부지런하나 끝에 가서 태만하다면, 어찌 선정의 교훈을 몸으로 터득할 수 있겠으며 제사의 의미를 흐려버리는 일이 아니겠는가. 선현을 제사하는 가르침이란 그 뜻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라. 제생은 부지런히 힘써야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명(銘)에 이르기를, “훌륭한 세상이 오려면 반드시 성군이 나타나니 훌륭한 신하를 등용하여 한 조정에서 있어야 한다. 우리 임금을 돕고 우리 선생을 도왔도다. 마치 용이 구름을 일으키듯 호랑이가 바람을 일으키듯 성대하게 임금과 신하의 뜻이 빛나도다. 신경(神京)의 일을 어찌 다 말 할 수 있으리오. 만사가 울적하니 무엇으로 이를 밝히리오.”

인생은 수 십 년에 불과하니 용의 수염을 거스르지 멀라. 초구(貂裘)를 덮은 노신(老臣)도 피눈물을 흘리며 여강을 노 저어 갔네. 창오(蒼梧)가 시야에 들어오니, 빛남이 매우 가깝도다. 산도 울창하니 그 누가 그를 생각하리. 선생의 가르침이 헛되지 않아 모든 선비가 교화되노라. 선생의 행적이 그친 곳에 특별히 사당을 지었도다. 청심재(淸心齋) 밝은 달이 선생의 덕용(德容)과 비슷하여라. 학문은 자양(紫陽)과 부합되고 학맥은 율곡(栗谷)에서 이어진다. 곧아야 한다는(直字) 훈계에 제자들이 은택을 입었도다. 저 많은 군자들이 어찌 선생을 기리지 않으리오. 한 몸이 되어 선생을 기리며 백대를 끊이지 말지어다. 숙계(宿契)가 밝고 화용하니 먼 곳 가까운 곳 향기로워라. 문득 내 감격하여 일찍이 전훈(典訓)을 입었노라. 우뚝한 곳 좋은 돌에 글을 새겨 길이 보전하리라.

황명 숭정기원후 3 정미(정조 11, 1787) 겨울 11월 일에 비석을 세움.

大老祠碑銘幷序

御製御筆 天下之大敎五祀賢與居一焉賢者敎之所由起也故燔燎膻薌以報其精蘋蘩以報其德簠簋籩豆以報其文洞屬恍惚以報其敬然後庶乎其顧歆焉然祀必有義其義則不寧是也若周公之祠必建于東洛武侯之廟必隣于永安此之謂義我孝宗大王以天一之聖値百六之運懷保瘡痍之民密勿帷幄之謀而時則有同德之臣契托魚水道秉春秋用能先後疏附廸彛敎於窮宙卽先正宋尤菴是已及夫孝廟賓天先正獨立無所歸當仙寢之移奉于驪也嘗密邇珠丘泣瞻松栢以寓其烏號不忘之思人到今指點其地而想君臣之際矣 今去先正之沒且一百年其生長之鄕藏修之處淵源之所自來杖屨之所曾游或專享或配食以修以明殆無憾於崇報之典惟是驪上指點之地創祠於乙卯間旋爲朝議之橫潰毁撤而止夫祠院之設本出庠序之遺制院必有祠實取於米廩之祭瞽宗則是人之祀是地固莫不有精義存焉况先正之於寧王亦周公之相成王武侯之佐昭烈其如水在地之靈尙肯一日不在於於昭陟降之傍乎鳴呼他祠寧可已驪上之祠不可以不設也予於踐阼三年已亥諏吉袛謁于永陵駐蹕于驪之淸心樓多士齊籲以先正之祠爲請予樂聞而許之後七年乙巳祠始成乃妥靈于祠命名曰大老祠越三年丁未以先正降生之三周甲竪碑于庭具道其祀之之義祠在州治數百步淸心樓西距寧陵二里而近鶴麓鎭其背巖巖千仞之壁立驪江控其襟淊淊萬折之必東南有霞峰蓴澤拱揖以呈奇北有鷰灘龍門繚繞以爭姸地之形勝若有待而益章焉雖然凡我守先正之學者苟不能服膺乎日星之義觀感乎洛閩之統進揖退讓色莊而心慢春詩冬禮始勤而終怠則豈所以體先正之敎而祠之義不幾泯乎祀賢之所以爲敎者思其義也諸生勉乎哉遂爲之銘曰

命世之出 必待聖王 喜起明朗 自古一堂 佑我寧人 錫我宗公 雲龍風虎 蔚焉合章 勝言神京 萬事於悒 何以明之 春秋數十 龍髥莫攀 貂裘在襲 老臣血淚 驪江之楫 蒼梧入望 耿光孔邇 山榛隰笭 伊誰云思 不沫遺躅 風動多士 杖履攸止 有祠特起 淸心霽月 彷佛德容 學符紫陽 派接栗翁 直字眞訣 衣被羣蒙 凡百君子 曷不祝宗 一體明禋 百代敉文 昭融宿契 長近苾芬 偏予曠感 早服典訓 岌峙牲石 刻示無垠

皇明崇禎紀元後三丁未冬十一月 日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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