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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옥 신도비명

윤옥(尹玉) 신도비명(神道碑銘)1)

공(公)의 휘는 옥(玉)이오 자는 자온(子溫)이니 무송인(武松人)으로 호는 동리(東里)이다. 시조는 고려의 보승별장(保勝別將) 양비(良庇)이다. 별장이 사헌부장령 의(誼)를 낳았고 장령이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등(登)을 낳았으며 간의(諫議)가 감찰(監察) 지평(持平) 제(瑅)를 낳았고 지평이 안성군사(安城郡事) 충보(忠輔)를 낳았다. 군사(郡事)가 아조(我朝)에 들어와 여주(驪州)로 물러나와 지내니 사람들이 그 의리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가 광양부원군(光陽府院君) 이무방(李茂芳, 1319~1398)의 따님을 취(娶)하여 우정언(右正言) 미견(彌堅)을 낳았으며 정언이 좌의정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 1369~1439)의 따님을 취하여 영월군수(寧越郡守) 징(徵)을 낳았고 군수가 죽산박씨(竹山朴氏) 수신(粹信)의 따님을 취하니 바로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후예로 어진 덕이 있었는데 공조판서 사익(思翼)을 낳았으며 판서가 동래정씨(東萊鄭氏) 관찰사(觀察使) 이한(而漢, ?~1453)의 손자인 세걸(世傑)의 따님을 취하여 공을 낳으니 정덕(正德)2) 신미(辛未, 중종 6, 1511)년 7월 4일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있어 네 살 적에 능히 글을 읽었고 조금 자라서는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다. 신묘(辛卯, 중종 26, 1531)년에는 사마시(司馬試)3)에 합격하고 경자(更子, 중종 35, 1540)년에는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숭문원에 뽑혀서 들어갔고 임인(壬寅, 중종 37, 1542)년에는 추천을 받아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 겸춘추관기사관(兼春秋館記事官)에 제수되었으며 대교(待敎) 봉교(奉敎)와 예조, 병조, 형조의 좌랑(佐郞)과 사간원 정언(正言) 성균관 전적(典籍) 홍문관 수찬(修撰) 지제교(知制敎) 겸경연검토관(兼經筵檢討官)을 지냈다.

을사(乙巳)년에는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였고, 복(服)을 벗자 또 수찬에 제배(除拜)되어 사헌부 지평(持平), 호조, 예조, 병조의 정랑(正郞), 헌납(獻納), 장령(掌令), 교리(校理), 응교(應敎), 전한(典翰)을 거쳐 신해(辛亥, 명종 6, 1551)년에는 직제학(直提學)에서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좌승지가 되었다. 계축(癸丑)년에는 봉양을 위하여 고을 살이를 자청하여 남양부사(南陽府使)가 되었고 호조참의, 양주목사(楊洲牧使), 부평부사(富平府使)를 거쳐 신유(辛酉, 명종 16, 1561)년에는 특별히 가선(嘉善)의 품계에 올라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가 되었으며 공조참판과 동지의금부사를 지냈다.

계해(癸亥, 명종 18, 1563)년에는 판서공(判書公)께서 졸(卒)하였고 복을 벗자 또 공조참판에 제수되었다. 병인(丙寅, 명종 21, 1566)년에는 북경(北京)에 들어갔고 돌아오자 수원부사(水原府使)에 제수되어 인천부사(仁川府使), 해주목사(海州牧使),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동지중추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지내고 갑신(甲申, 선조 17, 1584)년 2월 28일 을해(乙亥)에 자택에서 졸(卒)하니 향년 74세이다.

상께서 공이 덕빈(德嬪)4)의 아버지라 하여 특별히 우의정에 증직하였다. 그해 4월 21일 경오(庚午)에 관(官)에서 상구(喪具)를 조비(措備)하여 여주(驪州) 대송리(大松里) 자좌(子坐) 오향(午向)의 언덕에 장사지내고 부인 파평 윤씨(坡平 尹氏)를 부장(祔葬)하였다.

공은 부모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러워 분가(分家)한 뒤에 관무(官務)가 항상 폭주(輻輳)한데도 정성(定省)5)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상(喪)을 당해서는 예제(禮制)를 다하고 3년 동안 여묘(廬墓)를 하였으며 그 후에도 매양 전성(展省)6)할 때에는 불현듯 슬피 울부짖어 그 애통함이 좌우를 감동시켰다. 벼슬길에 나가서는 청근(淸謹)함이 옛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하였고 세속에서 좋아하는 바에는 담박(淡泊)하여 마음을 쓰지 않았다. 글을 좋아하고 학문을 즐겨 낮이고 밤이고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으며 남에게서 얻은 바로써 부지런히 후진(後進)들을 가르침을 마치 자기의 책무처럼 여기니 책을 들고 물으러 온 자가 문전에 줄을 지었다.

몸이 재신(宰臣)의 반열에 있었으나 능히 궁약(窮約)으로 자신을 간직하여 검박하기가 청한(淸寒)한 선비와 다름이 없었다. 작고하기에 이르러 사람들이 그 집의 곳간을 열어보니 남아있는 재물이 하나도 없고 옷도 쓸 만한 것이 없자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병이 심해지자 마치 잠꼬대하는 것처럼 말을 많이 하였으나 오직 나라 일만 걱정을 하였고 봉제사(奉祭祀)와 계자서(戒子壻) 이외의 여느 집안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함이 없었다.

부인의 아버지 휘(諱)는 봉종(奉宗)으로 상의원(尙衣院)의 직장(直長)이다. 그 조상은 신달(莘達)이니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도와 삼한공신(三韓功臣)이 되고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부인은 성품이 정정(貞靜)하고 공검(恭儉) 자효(慈孝)하였으며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어 주궤(主饋)7)에 실수가 없었다. 공보다 12년 먼저 몰(歿)하였는데 공의 직품(職品)에 따라 정경부인(貞敬夫人)의 품계가 내려졌다. 1남 3녀를 낳으니 아들은 진사(進士) 백순(百順)으로 수사(水使) 이흠례(李欽禮)의 따님을 취하여 2녀를 낳았으나 모두 어리다. 딸로서 맏이는 유학(幼學) 구사열(具思說)에게 출가하였으나 일찍 홀로 되었고 다음이 덕빈(德嬪)이니 순회세자(順懷世子, 1551~1563)8)와 짝하였으며 다음은 이안성(李安性)에게 출가하여 1남 1녀를 낳아 모두 어리다.

오호라! 공과 같이 탁월한 재주와 어진 성품을 지녔으면서도 중년 이후로는 외직(外職)에 있을 때가 거의 많았고 세상과 잘 어울리지 않아 직위가 그 덕에 걸맞지 않으니 어쩌면 하늘이 품수(稟受)는 후하게 내리고 누리기는 박하게 하였는지 모를 일이다. 아마도 축적은 후하게 하고 발복은 박하게 하였다가 앞으로 후대에 가서 그 복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나 아닐는지? 나는 진사공(進士公)을 두고 징험해 보련다. 명(銘)하기를

계고(稽古)9)의 역량으로나,
식무(識務)10)의 공부로나,
훌륭한 통유(通儒)11)였고
옛날의 유직(遺職)12)이었네.
시운(時運)이 행할 만하면,
왕정(王庭)에서 휘날렸고,
도(道)가 묻히려 하면,
초야(草野)에서 소요하였다네.
현달도 나의 영광은 아닐진대,
궁굴(窮屈)이 어찌 병이 되겠는가,
진퇴(進退)와 소장(消長)에,
한결같이 천명(天命)을 따랐다네.
청권(靑券) 손에 쥐고,
탁배기 혼자 퍼 마시면서,
세상 밖에 뜻을 부치다가,
홀가분하게 돌아가셨다네.
집안 이을 아들 있고,
희생(犧牲)13) 매어 둘 비석 있으매,
공은 잊혀지지 않을 터인데,
나 또한 무엇을 슬퍼하랴.

尹玉神道碑銘

公諱玉 字子溫 茂松人 號東里 始祖高麗保勝別將良庇 別將生司憲掌令誼 掌令生左諫議大夫登 諌議生監察持平瑅 持平生安城郡事忠輔 郡事入我朝退居驪州 人高其義 娶光陽府院君李茂芳之女 生右正言彌堅 正言娶左議政文敬公許稠之女 生寧越郡守徵 郡守娶竹山朴氏粹信之女 卽新羅始祖赫居世之裔也 有賢德 生工曹判書思翼 判書娶觀察使 東來鄭氏而漢之孫世傑之女 生公 正德辛未七月四日也 公生而聽智 四歲能讀書 稍長 受業於慕齋金安國之門 辛卯中司馬 庚子釋褐 選入承文院 壬寅以薦拜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 歷待敎奉敎禮兵刑曹佐郞司諫院正言成均館典籍弘文館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 乙巳丁內艱 服闕 又拜修撰 歷司憲府持平戶曹兵曹正郞獻納掌令校理應敎典翰 辛亥以直提學 拜承政院同副承旨 累遷爲左承旨 癸丑爲養乞郡 拜南陽府使 歷戶曹參議楊州牧師富平府使 辛酉特陞嘉善 爲同知敦寧 歷工曹參判同知義禁 癸亥判書公卒 服闕 又拜工曹參判 丙寅朝京帥 還爲水原仁川府使海州牧使 歷漢城府左尹同知中樞五衛都摠府副摠管 甲申二月二十八日乙亥卒于第 享年七十四 上以德嬪考 特贈右議政 得其年四月二十一日庚午 官庀喪具 葬于驪州大松里子坐向午之原 夫人坡平尹氏祔焉 公事父母至孝 雖異宮之後 仕務常劇 而定省不怠 居喪盡制 廬墓三年 每當展謁 輒繞樹悲號 哀動左右 當官淸謹 不愧古人 世俗所好 泊然無所用其心 耽書嗜學 日夜手不釋卷 所得於人 惓惓以訓後進爲己責 執經而疑者 踵于門 身居宰列 而能窮約自持 儉與寒士並 及沒 人見其庫 無餘財 衣無長物 後益信之 寢疾 諄諄如夢中語 惟以國事爲念 奉祭祀戒子壻之外 無一言及于家 夫人考諱奉宗 尙衣院直長 其先曰莘達 佐高麗太祖 爲三韓功臣門下侍中平章事 夫人性行貞靜 恭儉慈孝 治家有度 主饋無□ 先公十二年而殂 從公職贈貞敬夫人 生一男三女 男曰進士百順 娶水使李欽禮之女 生二女皆幼 女長適幼學具思說 早寡 次德嬪 配順懷世子 次適李安性 生一男一女皆幼 嗚呼以公之才之賢 中年以後 補外居多 與時齟齬 位不滿其德 何天之界之厚而享之偏耶 將多積而薄發 以食其報耶 余以進士公卜之 銘曰

稽古之力 識務之學 允矣通儒 古之遺直 時乎可行 振策王庭 道之將廢 婆娑林坰 達匪吾榮 窮豈吾病 進退消長 一聽於命 靑編在手 濁醪獨揮 寄情事外 然而歸 克家有子 牲繫有碑 公爲不忘 余又何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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