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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 신도비명

홍진(洪進) 신도비명(神道碑銘)1)

임자(壬子, 광해군4, 1612)년에 내가 장악첨정(掌樂僉正)이 되었는데 그때에 공은 제조(提調)로 있었다. 마침 시예(試藝)하는 날이 되어 공이 친히 악장(樂章)을 들춰가면서 그 청탁(淸濁)과 고하(高下)를 매우 정밀하게 분별하는 것을 보고 그 다방면으로 심오한 식견(識見)을 가지고 있음에 나는 깊이 감복하였다. 그 뒤에 공의 자택을 방문하여 책상 위를 보니『시전(詩傳)』이 펼쳐져 있었다. 이에 나는 공이 늙어서도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음에 다시 한번 감복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죄를 얻어 외딴 섬에 안치(安置)되어 있었는데 그후 3년 뒤에 공이 작고하셨음을 듣고 내가 미처 듣지 못한 바를 영영 듣지 못하게 되었음을 깊이 한스럽게 여겨 마음속으로 안절부절 못하고 지낸지가 또 지금껏 몇 해가 되었다. 병자(丙子, 인조14, 1636)년 봄에 내가 곡림(哭臨)2)으로 인하여 서울에 몇달을 머물게 되었는데 공의 손자 정랑군(正郞君)이 공의 행장(行狀)과 지명(誌銘)을 가지고 와서 보이면서 나에게 묘도(墓道)의 명(銘)을 부탁하였다. 나는 비록 그럴만한 사람이 못되지만 공을 향모(嚮慕)하는 정성으로는 그 부탁을 헛되이 져버릴 수가 없었기에 마침내 사절하지 못하였다.

공의 성(姓)은 홍씨(洪氏)요 휘(諱)는 진(進)이며 자는 희고(希古)이니 남양인(南陽人)이다. 스스로 호(號)하기를 인재(認齋)라 하고 또 퇴촌(退村)으로도 불렀다. 당말(唐末)에 황제가 팔학사(八學士)를 보내서 동방(東邦)의 백성을 교도하게 하였는데 홍씨도 그중의 한 사람으로서 본관(本貫)을 당성(唐城)으로 하사받았다. 고려를 거쳐 국조(國朝)로 들어와서는 대대로 드러난 사람이 있었는데 휘(諱) 사서(師錫)은 장상(將相)의 재주가 있어 정서(征西)에 큰 공을 세워 벼슬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고 시호는 장양(莊襄)이니 공에게는 6대조가 된다.

증조(曾祖)의 휘는 이평(以平)이니 성균관(成均館) 사성(司成)이오 조부(祖父)의 휘는 덕연(德演)이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이며 고(考)의 휘는 인우(仁佑)3)로 생원(生員)인데 퇴도선생(退陶先生)에게 사사(師事)하여 천리(踐履)가 독실하고 학문이 정심(精深)하여 세상에서 치재선생(耻齋先生)이라 부르고 있으며 기천서원(沂川書阮)에 배향(配享)되어 있다. 뒤에 사성(司成)은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첨지중추부사는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고 생원은 의정부 영의정 당양부원군(唐陽府院君)에 증직되었는데 모두 공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부인(母夫人)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순천김씨(順天金氏)는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 승주(承霔)의 후예인 군수(郡守) 희직(希稷)의 따님인데 경상(慶祥)을 모아 어진 이와 짝하여 공을 낳으니 가정(嘉靖)4) 신축(辛丑, 중종 36, 1541) 8월 초9일이다. 공은 선대(先代)의 영광(靈光)으로 배태(胚胎)되어 천자(天資)가 단중(端重)하였고 가정에서 눈으로 보고 귀에 젖은 것이 모두 전례(典禮)에 관한 것이었기에 나이 14세 때 치재공(耻齋公)의 병세가 위독하자 공이 시탕(侍湯)을 하는데 조금도 해이함이 없이 하고 심지어 손가락에서 피를 받아 올리기까지 하였으면 이윽고 대고(大故)5)를 당해서는 마치 어른과 같이 집례(執禮)를 하였다.

갑자(甲子, 인조 2, 1624)년에는 진사시(進士詩)에 합격하고 정묘(丁卯)년에는 모부인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아우인 적(迪)과 함께 묘소 곁에 여막(廬幕)을 치고 몸소 밥을 지어 올리면서 수척한 얼굴로 곡하고 슬퍼하니 향리(鄕里)에서 모두 대견하게 여겼다. 경오(庚午, 인조 8, 1630)년에 등제(登第)하여 승문원에 뽑혀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보직되었고 얼마 후에는 예문관에 천거되어 검열(檢閱)에서 봉교(奉敎)에 이르렀으며 홍문관에 들어가 정자(正字) 저작(著作) 박사(博士)가 되었는데 공의 아우 적(迪)도 등과(登科)하여 함께 정자(正字)가 되었다. 정자(正字)는 남상(南狀)의 극선(極選)으로서 세상에서 이른바 영주(瀛州)6)의 첫째가는 인기 있는 자린인데 공의 형제가 함께 차지하니 사람들이 지목하여 연주(聯珠)라 일컬었다. 이로부터는 달마다 옮기고 해마다 올라 청현(淸顯)의 요직(要職)을 두루 거쳐 내직(內職)이고 외직(外職)이고 높고 낮고 간에 능란한 관리로서 직무를 잘 처리한다는 평판이 끊이지 않았다.

그 관력(官歷)의 서차(序次)는 한상국(韓相國)의 행장(行狀)과 이학사(李學士)의 묘지명(墓誌銘)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니 여기에서는 약(略)하고 다만 몇 가지만 간추려서 적으면 부응교(副應敎)로 있을 때에는 동료와 함께 이이(李珥, 1536~1584)를 논하다가 임금의 비위를 거슬러 용담현령(龍潭縣令)으로 쫓겨났는데 공은 용담이 산골짜기의 조잔한 고을이라고 비하(卑下)하지 않고 심력을 다하여 무휼(撫恤)하여 특이한 치적(治績)을 올리니 임금이 표리(表裏)7) 한 벌을 내려 포상하였고 백성들은 비(碑) 2개를 세워 지금까지 그 덕을 기리고 있으며 직제학(直提學)으로 있을 때에는 때마침 정여립(鄭汝立, 1546~1589)의 모역(謀逆) 옥사(獄事)가 있어 공이 문사랑(問事郞)이 되었는데 옥사가 끝나자 동부승지에 올라 우부승지로 천전(遷轉)되었다. 그때에 당론(黨論)이 한창 치열하여 진신(搢紳)으로서 연루된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 공도 지목한 속에 들어 하옥(下獄)되었으나 선조대왕께서 무왕(誣枉)임을 알고 불문에 부쳤다.

임진(壬辰)년에 해구(海寇)가 창궐(猖獗)하여 곧바로 서울로 쳐들어오니 공이 비로소 몽방(蒙放)이 되고 서용(敍用)이 되었다. 임금이 며칠 사이에 정신없이 서울을 빠져나가니 공은 군함(軍銜)을 띠고 호가(扈駕)하였다. 평양(平壤)에 이르러서야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제수되었고 누차 천전(遷轉)하여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올랐으며 의주(義州)에 이르러서는 가선(嘉善)의 품계(品階)에 올랐다. 임금의 행차가 한쪽 귀퉁이에 몰려 있으니 온갖 일이 황량하였으나 공은 예방승지(禮房承旨)로서 명장(明將)을 응접함에 변례(變禮)로써 수작(酬酌)하여 모두가 환심(歡心)을 갖도록 하고 기의(機宜)에도 합당하게 하였다.

이윽고 삼경(三京)이 회복되고 적이 남쪽 변방으로 물러나니 승여(乘輿)는 동쪽으로 돌아와 해주(海州)에 주필(駐蹕)하여 전지(傳旨)를 내리기를 “홍진(洪進)은 오래도록 시종(侍從)으로 있으면서 수고가 가장 두드러졌으므로 특별히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제수하니 먼저 서울로 들어가 진휼(賑恤)을 베풀고 모든 일에 심력(心力)을 다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공은 드디어 해로(海路)로 서울에 들어와 임금의 덕의(德義)를 선포하고 진휼(賑恤)을 많이 베풀었다.

갑오(甲午, 선조 27, 1594)년에는 역적 송유진(宋儒眞, ?~1594)의 옥사(獄事)에 참국(參鞫)하여 정헌(正憲)에 가자(加資)되었고 기해(己亥)년에는 평왜사은부사(平倭謝恩副使)로 북경(北京)에 들어가서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칙서(勅書)를 받아 가지고 옴으로써 숭정(崇政)에 가자(加資)되었으며 계묘(癸卯)년에는 『주역언해(周易諺解)』의 교정(校正)에 참여함으로써 숭록(崇祿)에 가자(加資)되었고 갑진(甲辰)년에는 급기야 호종(扈從)의 공(功)을 감정(勘定)하여 충근정량(忠勤貞亮) 효절협책(效節協策) 호성공신(扈聖功臣)의 칭호를 하사받고 보국(輔國)의 품계에 올랐으며 당흥부원군(唐興府院君)에 봉해졌는데 시론(時論)이 봉질(封秩)은 삼공(三公)과 비등(比等)한데 부이(副貳)의 자리에 있을 수는 없다 하여 겸직(兼職)을 모두 체개(遞改)하고 봉조청(奉朝請)8)의 한직(閑職)에 13년을 있다가 병진(丙辰, 광해군 8, 1616)년 12월 계묘일(癸卯日)에 정침(正寢)에서 졸(卒)하니 나이는 76세이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조정과 저자의 문을 이틀이나 닫았으며 부증(賻贈)과 조제(弔祭) 등 임금의 진념(軫念)이 두루 지극하였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영의정(領議政) 겸영경연(兼領經筵)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춘추관(春秋館) 관상감사(觀象監事) 세자사(世子師)에 증직(贈職)되었다. 이듬해 2월 기미일(己未日)에 여주(驪州)의 치소(治所) 북쪽 계림장(桂林場)의 손자(巽坐) 건향원(乾向原)에 장사지내니 선영(先塋)을 쫓은 것이다.

공은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성현(聖賢)의 『잠계편(箴戒編)』을 손수 추려서 책으로 만들고 『지지방(止止方)』이라 이름하여 항상 보고 되뇌이고 하여 본 받기에 힘썼다. 경사(經史)에도 관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특히 예서(禮書)에 조예가 깊어 질문하는 사람이 있으면 극히 정명(精明)하게 변석(辨釋)해 주었으며 여러 학설(學說)을 참고하고 연구하여 『의경(義經)』이란 책을 만들었는데 매우 터득(攄得)한 바가 많았다. 선조(宣祖)께서는 만년(晩年)에 『주역(周易)』의 강(講)을 좋아하였는데 연중(筵中)에서 공이 계발(啓發)함이 다대(多大)하여 어느 양사(良師)에 못지않았다. 평소에도 반드시 일찍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에 빗질을 하고서 서실(書室)로 나아가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한 번도 자세가 흐트러지는 일이 없었고 오직 책을 보면서 심성(心性)을 수양(修養)할 따름이었다.

대체로 내적(內的)으로 수양한 바가 이와 같았기 때문에 조정에 나와 정사(政事)에 시조(施措)한 바가 하나 같이 정제(整齊)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이 점은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겠다. 일찍이 동료인 헌납(獻納) 한 사람이 사심(私心)을 품고 선류(善類)를 모함하려고 하여 공이 정색(正色)을 하고 꺾어 버리니 결국 그 사람은 그 사람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선류는 무사하게 되었다. 세 번이나 이조판서를 지냈는데 조정의 논의(論議)는 완전히 분열이 되었다.

그때에 낭관(郎官) 한 사람이 자기와 가까운 사람을 끌어 들여 당(黨)을 만들려는 자가 있어 공이 완강히 고집하여 불가(不可)하다고 하니 낭관이 서운해 하는 기색이 있었고 공도 자리를 떠났는데 그후에 낭관이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공의 지감(識鑑)에 감복하였다. 공의 강방(剛方)하고 저앙(低昻)하지 않음은 다분히 이와 같았다. 바야흐로 대가(大駕)는 서쪽으로 파천(播遷)하고 적의 칼날은 날로 핍박하니 선조(宣祖)는 동궁(東宮)에게 분조(分朝)를 명하고 기어코 요동(遼東)으로 건너가려고 하였다.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이 왕명을 받들고 수종자(隨從者)를 모집할 적에 공에게 따라갈 것인가를 물으니 공이 당연히 대가(大駕)를 따르겠다고 답하였다.

이항복이 그 뜻을 탐색하려고 짐짓 문난(問難)하기를 “국내에 남아서 지키는 것과 국외로 떠도는 것이 무슨 경중(輕重)이 있겠습니까. 세자를 모시고 동(東)으로 가서 심력(心力)을 다하여 협찬하고 구강(舊疆)을 되찾아 대가(大駕)를 맞아들이면 이 역시 신자(臣子)의 대절(大節)이니 십분 다시 생각해 보시오.” 하여 공이 울면서 말하기를 “나는 오래도록 시종(侍從)의 자리에 있으면서 조석(朝夕)으로 모셨으니 오직 계시는 곳에서 목숨을 바칠 따름이지 어찌 딴 생각이 있겠습니까. 우졸(迂拙)한 서생(書生)은 군사(軍事)를 익히지 못하였으니 비록 국내에 남아 있다 한들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오직 임금님 곁에서 죽는 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하니 이항복이 그 말을 장하게 여겼다.

당시에 따라가기를 자원한 사람은 참의(參議) 이곽(李)과 무신(武臣) 한연(韓淵)과 공의 세 사람 뿐이었다. 그후에 훈공(勳功)을 감정할 때에 이항복이 그 일을 들어 임금에게 아뢰니 선조가 크게 감동하여 하교(下敎)하기를 “홍진의 말은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떨어뜨리게 한다.” 하였다. 오호라! 세상이 어지러운 뒤에라야 충신을 찾아볼 수 있는 법이다. 나라의 기강(紀綱)은 땅에 떨어지고 임금은 떠돌이가 되어 위급한 형세는 털끝 하나도 용납하지 못할 때를 당하여 뉘라서 후일에 환가(還駕)할 희망이 있다고 여겨서 망설이는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밤을 타서 빠져나가는 무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이외의 호종(扈從)한 뭇 신하들도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는데 공이 홀로 의분을 얼굴에 드러내고 충성은 속에서 폭발하여 잠깐 말을 주고받을 사이에 마음을 결정하여 만세(萬世)의 군신(君臣)간 의리를 세운 것은 평일에 깊이 간직하고 수양한 바가 없다면 어떻게 가능할 일이겠는가? 후세에 공을 알려고 하는 사람들은 다른데서 구하지 말고 이 일 한 가지만 보고서도 나머지 삼면(三面)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아! 어찌 한 시대의 완인(完人)이라고만 말할 수 있겠는가!

공은 파평 윤씨(坡平 尹氏) 돈녕첨정(敦寧僉正)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응규(應奎)의 따님을 선취(先娶)하였는데 부도(婦道) 이외에 문한(文翰)도 있었으나 병자(丙子)년에 공보다 먼저 졸(卒)하였다. 2남 1녀를 낳아 맏이의 여율(汝栗)은 벼슬이 군수에 그쳤는데 난리 때에 참봉(參奉)으로 있으면서 어진(御眞)을 안전하게 간수한 공으로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다음은 여비(汝棐)요 딸은 안몽필(安夢弼)에게 출가하였는데 모두 일찍 죽었다. 공은 또 울산박씨(蔚山朴氏) 사온서령(司醞暑令) 의남(宜男)의 따님을 후취(後娶)하였는데 집안을 다스리고 안살림을 맡아 함에 각기 법도가 있었고 제사를 받듦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여러 조카와 손자들을 마치 기출(己出)처럼 무양(撫養)하는 등 극히 현덕(賢德)이 있었다. 전후(前後)의 부인은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에 봉해지고 묘소는 공의 묘소 왼쪽에 있다.

참판은 사온서직장(司醞暑直長) 이안도(李安道, 1541~1584)의 따님을 취하여 2남을 낳았는데 맏이의 유환(有煥)은 전첨정(前僉正)으로 2남 2녀를 두었고, 다음의 유형(有炯)은 바로 정랑군(正郞君)인데 3남 4녀를 두어 아들로 맏이의 경기(景基)는 요절(夭折)하였고, 다음은 경증(景增) 경발(景)이며 딸로 맏이는 이섬(李暹)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박자진(朴自振)에게 출가하였으며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명(銘)하기를

홍씨가 동쪽으로 온 것은,
당나라 때부터인데,
면면(綿綿)히 계승하여,
오래일수록 더욱 번창하였다네.
열렬한 장양공(莊襄公)은,
정토(征討)로써 공을 세웠고,
사성(司成)은 경사(經史)에 통하고,
중추(中樞)는 박학하였으며,
치재(耻齋)는 더욱 훌륭하여,
퇴도(退陶)도 외경(畏敬)했다오.
여러 대(代)에 경상(慶祥)을 쌓아,
그 식보(食報) 다하지 않았는데,
공이 그 서업(緖業)을 이어,
밝은 덕 더욱 확충(擴充)하였다네.
어려서부터 단중하였는데,
커서는 더욱 닦고 신칙하여,
집에서는 더욱 닦고 신칙하여,
집에서는 효도하고,
임금은 곧은 도리로 섬겼다네.
조정에 선지 반백년에,
시종(始終)이 한결 같았고,
눈물 흘리며 난리에 종사하여,
지근(至近)에서 심력(心力)을 다했다네.
일찍 가부(可否)를 결정하여,
임금님 곁에서 죽기를 다짐했는데,
저들 관망자(觀望者)들도,
뉘라서 임금의 신하 아니었으리.
임금의 밥을 먹고 임금의 옷을 입고서도,
임금을 버리기는 모두가 일반이었으나,
논의만 하는 사이에 목숨을 바치기로 한 것은,
오직 공 한 사람뿐이었다네.
선조(宣祖)가 이르기를,
아! 그대는 충신이로다.
나의 괴로움은 그대의 괴로움이오,
나의 쓰라림은 그대의 쓰라림이다.
창황하게 파천(播遷)할 때에,
그대는 항상 따랐고,
정신없이 떠돌 때에도,
그대가 항상 지탱해줬다.
더구나 원훈(元勳)이,
아뢴 말을 들으니,
한 마디 늠름하여,
나의 눈물 떨구게 했다.
나는 그대의 충성이 갈수록,
두터움을 가상히 여겨,
그대에게 공신 회맹(會盟)을 내리고,
그대를 높은 품계에 봉하나니,
황하가 띠가 되고 태산이 숫돌이 되도록,
변함이 없고 끊임도 없으리라.
임금의 포장(褒奬)이,
날이 갈수록 두터우니,
앞으로 오래 오래 살아서,
종시토록 나라와 함께 하기 기대했는데,
어찌 늙은이 남겨두지 않고서,
우리의 원로(元老)를 앗아 갔던가.
나라가 병들고 찌드니,
사람들 슬퍼하고 걱정하네,
살아서는 삼공(三公) 못 됐으나,
죽어서는 포숭(褒崇)있고,
백료(百僚)의 우두머리였으니,
슬픔과 영광 두루 극했다네.
여강(驪江)의 북쪽,
계림(桂林)의 터전에,
빗돌 높다랗게 섰으니,
지나는 길손 숙연(肅然)하리로다.

洪進神道碑銘

歲壬子 余爲掌樂僉正 時公爲提調 見其試藝之日 親閱樂章 辨其淸濁高下甚精 余深眼其旁洽之識 其後就拜公第 見其案上 展詩傳 於是又服其老不倦書之意 未畿余獲罪拵若居海島 後三年間公捐館舍 深以未得更聞所未聞爲恨 憧憧往來于中者 有年于玆 丙子春 余以哭臨 留京師數月 公之孫正郞君 以公之行狀誌銘 來示余 仍求隧道之銘 余雖非其人 惟以嚮往之誠 不可虛負 遂不辭 公姓洪氏 諱進 字希古 南陽人 自號訒齋 又號退村 唐末帝遣入學士 敎養東人 洪其一也 賜貫唐城 歷麗入國朝 世有聞人 有諱師錫 有將相才 征西立偉功 官至知中樞 諡莊襄 於公爲六代祖 曾祖諱以平 成均司成 祖諱德演 僉知中樞府事 考諱仁祐 生員 師友退陶先生 踐履篤實 學問精深 世稱恥齋先生 從祀沂川書院 後贈司成吏曹判書 僉知議政府左贊成 生員議政府領議政唐陽府院君 皆以公之貴也 母夫人順天金氏 贈貞敬夫人 平陽府院君承霔之後郡守希稷之女也 □慶配良 是生公 卽嘉靖辛丑八月初九日也 公□胎前先 生質端重 目濡耳染 皆在典禮 年十四 耻齋公疾□ 公湯侍不懈 至血其指以進 及遭大故 執喪禮如成人 甲子中進士試 丁卯喪母夫人 與弟迪 廬墓側 躬尊□ 顔慼哭哀 鄕里嘉之 庚午登第 選補承文院權知副正字 俄薦藝文館 由檢閱至奉敎 薦入弘文館 爲正字著作博士 公弟迪亦釋□ 同爲正字 南床極選 世所謂瀛州第一地望 而公凡弟居之 人目之謂連珠 自是年除月遷 歷□淸顯 于內于外 若卑若高 能官擧職 厥聞不隕 若其歷官序次 韓相國狀文李學士誌銘詳焉 今且略之 其爲副應敎也 與同僚論李珥 忤 上旨 黜爲龍潭縣令 公不以山谷間殘邑卑之 殫心力撫字 治有異效 上賜表裡褒之 民至今樹雙石以頌德 爲直提學也 適値鄭汝立謀逆之獄 公爲問事卽 獄訖 陞同副承旨 轉右副 時黨論方熾 縉紳連累者甚衆 公亦在捃撫中下理 宣祖大王知其誣不問 壬辰海寇猖獗 直犯京師 公始得蒙叙 數日蒼皇出邠 公以西御扈駕 至平壤拜右副承旨 屢遷至左 到義州 陞嘉善 一隅天步 庶事荒草 公爲禮房 應接天將 酬酌變禮 無不得其歡心 合乎機宜 及三京克復 賊退南徹 鑾輿東還 次海州 御批曰洪進允在侍從 勤勞最著 特陞漢城府判尹 可先入京城賑恤 諸事盡心體行 公遂浮海入京 宣布德意 多所賑恤 甲午以參鞠逆賊宋儒眞獄 加正憲 己亥以平倭謝恩副使朝京師 齋辨誣敕書來 加崇政 癸卯以參校周易諺解 加崇祿 甲辰始錄扈從功 賜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號 陞階輔國 封唐興府院君 時議以封秩視三公 不當居副貳地 由是盡遞兼職 居閑奉朝請十三年 以丙辰十二月癸卯 終于正寢 年七十有六 訃聞輟朝市二日 賻贈吊祭 恩數備至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明年二月己未 葬于驪州治北桂林場巽坐乾向之原 從先兆也 公夙有志於學 手抄聖賢箴戌編爲冊 名之曰止止方 常自誦覽 以爲受用之地 於經史 無不貫通 右遽於禮書 有質問者 剖抁精明 羲經一書 參究諸說 頒有所得 宣祖晩年 喜講易 筵中啓發 無愧良師 平居必夙興盥櫛 出就書室 危坐從日 未嘗有隋容 惟看書養心而已 盖其所養於中者如是 故立乎朝 施諸政事者 無不整整齊齊 無毫髮可疑也 嘗有獻納 有一同僚 挾私意 欲搆陷善類 公正色折之 其人終不售其計 善類賴以保全 三八爲冢宰也 朝議分門 有卽官欲引相善以樹黨者 公堅執以爲不可 卽有慍色 公亦去位 其後卽果愧詘 服公藻鑑 公之剛方不俯伂 多類此 方大駕西幸 賊鋒日逼 宣祖命東宮分朝 決意渡遼 兵曹判書李恒福 受命募從者 問公所從 公曰當隨大駕 恒福欲探其意 故設難曰 居守覇□ 有何輕重 陪世子而東戮力恊贊 光復舊物 迊還大駕 此亦臣子大節 十分更思之 公泣曰 吾久居侍從 朝夕左右 惟其所在而致死焉 豈有它志 迂拙書生 不習軍旅 縱使留居 有何所爲 惟死於吾君父側 乃吾願耳 恒福壯其言 當時願從者參議李 武臣韓淵及公統三人而已 及後勘勳 恒福擧以 上聞 宣祖大感動 下敎曰 洪進之言 令人淚落 嗚呼世亂 乃見忠臣 當地維已盡君父將爲寄公 汲汲之勢 間不容髮 夫孰料有後日旋軫之慶 而不懷顧望之心哉 彼乘夜逋播之徒 固不足道 其他扈從諸臣 亦莫有應募者 而公獨義形於色 誠發於中 倚燔立談之間 樹萬世君臣之義 非其平日所存所養之深 曷能斯須辨此哉 後之欲觀公者 不待他求 觀此一事 可以得公之三隅矣 噫 豈但爲一代之完人而已乎 公先娶坡平尹氏敦寧僉正贈吏曹判書應奎之女 婦道之外 亦解文字 丙子先公卒 生二男一女 長汝栗卒官郡守 以亂時爲齋卽 護全御容 累贈吏曹參判 次汝棐 女適安夢弼 皆早夭 後娶蔚山朴氏司醞署令宜男之女 治家主饋 各有條法 奉蘋藻 致其誠 撫諸侄諸孫 如已出 有賢德甚 前後夫人 皆封貞敬 葬在公之墓左 參判娶司醞署直長李安道女 生二男 長有煥前僉正 生二男二女 次有炯 卽正郞君也 生三男四女 男長曰景基夭 次曰景增景 女長適李暹 次適朴自振 餘皆幼 銘曰

惟洪之東 奧自皇唐 承繼綿綿 愈久益昌 烈烈莊襄 征討樹績 司成通經 中樞博學 恥齋有大 退陶所畏 累世蓄慶 食報未旣 公承厥緖 紹德惟克 幼而端重 長益修筯 居家惟孝 事君以直 立朝半百 始卒一節 雪涕從亂 盡瘁邇列 早擇從違 所在欲死 彼哉觀望 孰非臣子 食君衣君 遺君皆是 立談授命 公獨一人 宣祖曰噫 汝惟藎臣 予苦汝苦 予辛汝辛 蒼皇播越 汝常隨之 顚沛覇絏 汝常持之 况聞元臣 勘啓之辭 一言凜凜 令人淚落 予嘉乃忠 久而日篤 賜汝勳盟 封汝崇秩 河帶山礪 不替不絶 惟王之褒 惟日之赫 將期大耋 終始與國 胡不憖遺 奪我元老 邦家疹瘁 士林悲懆 生不鼎台 死有褒崇 長于百僚 袁榮兩隆 驪江之北 桂林之域 螭首巋然 過者必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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