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의 비상 여주시 여주시사

HOME 주제 금석문 금석문 보제존자시선각탑...

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보제존자시선각탑명병서

보제존자 부도탑비명병서1)

현능(玄陵)2) 이 왕위에 있는지 20년 되는 경술(庚戌, 1370)년 9월 10일에 선사를 불러 서울에 들어오도록 했다. 16일에 선사가 우거하고 있는 광명사(廣明寺)에서 5교3) 에 있는 모든 절의 중들을 크게 모아 놓고 그들의 스스로 얻은 바를 시험하여 이것을 공부선(功夫選) 이라 이름하고, 임금이 친히 거둥하여 이것을 보았다. 선사는 향 피우는 일을 마치고 법좌에 올라서 말하기를, “고금에 묵은 습관을 버리고 법인과 성인의 종석과 유래도 모두 없애고, 또 승려들의 명근(命根)도 없애 버리며 중생들의 의심도 완전히 벗어버리게 되면 조종하는 것은 손아귀에 달려 있고 변화하고 융통하는 것은 기틀에 있는 것이다. 3세의 모든 부처와 역대의 조사들도 그 법은 매양 한가지이다. 여기에 모인 스님들은 청컨대 사실대로 대답하라”하였다.

이에 차례로 들어와서 대답을 하는데 몸을 굽히고 땀을 흘리며 모두 말하기를, “모르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혹은 이치에는 통하였지만 사물에 구애되는 자도 있고 혹은 지나치게 미쳐서 말을 실수하는 자도 있었다.

이리하여 한마디로 모두 물리치고 말았다. 임금은 좋아하지 않는 빛이었다. 유암수(幼菴修)선사가 뒤로 왔다. 선사는 세 구절을 물었다. 삼관회(三關會)가 끝나자 선사는 회암사(檜巖寺)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신해(辛亥, 1371)년 8월 26일에 공부상서(工部尙書) 장자온(張子溫)을 보내어 조서를 내리고 인장 법복발우(法服鉢盂)를 내렸다. 이것을 모두 갖추어 봉해서 왕사(王師)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근수목지(勤修木智) 중흥조풍(重興祖風) 복국우세(福國祐世) 보제존자(普濟尊者)로 삼고 송광사가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도량이라 해서 거기에 살도록 명했다.

임자(壬子, 1372)년 가을에 우연히 지공(指空)의 삼산우수기(三山雨水記)를 생각하고 회암사에 옮기려고 했다. 마침 부름을 받고 이 절의 법회에 오게 되었음으로 여기에 살기를 청해서 허가를 얻었다. 선사가 말하기를, “선사 지공이 일찍이 중수하기를 계획했으나 병화에 불타버렸으니 감히 그 뜻을 계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곧 여러 사람들과 상의하여 전우(殿宇)를 증축하여 넓히게 했다. 공사가 이미 끝났기 때문에 병진(丙辰, 1376)년 4월에 크게 낙성회(落成會)를 열었다.

대평(臺評)이 말하기를, “회암사는 서울과 몹시 가까워 선비와 여인들이 왕래하여 주야로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혹은 생업을 폐지하기에 이르니 이것을 금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명령을 내려 보원사(寶源寺)에 이주하게 되어 급히 길에 올랐다. 선사는 이때 마침 병이 있었다. 수레를 타고 삼문(三門)을 지나서 못 가에 이르니 수레를 인도하는 자가 열반문으로 해서 가라고 한다. 이에 모든 사람들은 모두 의심스럽게 여기고 소리쳐 울었다. 선사는 뒤를 돌아보면서 “힘써라. 힘써라. 나로 인해서 중단하지 말라. 내가 가는 길은 마땅히 여흥(驪興)에서 그칠 것이다.” 라고 하였다.

한강에 이르러 호송관 탁첨(卓簽)에게 이르기를, “내 병이 심하니 배를 타고 가도록 하라.” 라고 했다. 이에 강을 거슬러 7일 동안을 흘러가 바야흐로 여흥에 도달하였다. 이때에 또 탁첨에게 이르기를, “조금 머물렀다가 병이 조금 차도가 있기를 기다려서 가도록 하자.” 라고 하니 탁첨도 마지못해 이를 따랐다. 이래서 여흥 신륵사에서 우거했다. 5월 15일에 탁첨은 또 가자고 재촉했다. 선사가 말하기를, “이것은 어렵지 않다. 나는 의당 갈 것이다.” 하고 이날에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고을 사람들이 (신륵사를) 바라보니 오색의 채색 구름이 산마루를 덮었다고 한다. 화장을 끝내어 유골을 싣고 있는데 구름도 없는 날씨에 사방 수백보 안에만 비가 내렸다. 이에 사리155개를 얻어 기도를 드리고 사리를 나누어 558개를 만들었다. 제자들이 재속에서 사리를 찾아내어 남모르게 가져간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신령스러운 광채가 3일 동안이나 비치더니 없어졌다.

중 달여(達如)가 꿈에 용이 화장대(火葬臺) 밑에 서려 있는데 그 현상이 말과 같은 것을 보았다. 유골을 배에 싣고 다시 회암사로 돌아왔다. 이 때 비도 오지 않았는데 강물이 불으니 이것을 보고 모두들 여강의 용이 도운 것이라고 했다.

8월 15일 절 북쪽 언덕에 부도를 세우고 정골(頂骨)에서 나온 사리는 신륵사에 안치했다. 이것은 그의 마지막을 표시한 것이다. 또 그것을 석종(石鍾)으로 덮은 것은 감히 와전됨이 없도록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일이 조정에 알려짐에 시호를 선각(禪覺)이라 내리고 왕은 신 목(穆)에게 글을 짓도록 명하고 신 중화(仲和)에게는 붉은 빛으로 현판에 전자(篆字)로 쓰도록 명했다.

신이 삼가 상고해 보건 데 선사의 이름은 혜근(惠勤)이요, 호는 나옹이요, 처음 이름은 원혜(元惠)이다. 향년 57세이고 중이 된 후부터의 나이는 38세이다. 영해부(寧海府)4) 사람으로 성씨는 아(牙)씨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서(瑞)로 구선관명(具善官命)이다. 어머니는 정(鄭)씨 영산군(靈山郡) 사람이다. 정씨의 꿈에 금빛 나는 새가 날아와서 그의 머리를 쪼면서 갑자기 알 하나를 깨뜨렸다. 그리하여 오색이 찬란한 것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이로부터 태기가 있어 경신(庚申, 1320)년 5월 15일에 선사를 낳았다.

나이 겨우 갓을 쓸 때가 되어 이웃에 동료가 죽었다. 이것을 보고 이웃노인들에게 묻기를 ,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했으나 모두 모른다고 대답했다. 이에 마음으로 몹시 슬퍼하며 공덕산(功德山)으로 달려가 요연사(了然師)에게 부탁해서 머리를 깎고 나니 요연사가 말하기를, “너는 무슨 일로 집을 나왔느냐?” 하자 대답하기를, “삼계를 초월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고자 함입니다.” 라고 했다. 그리고 또 길을 열어 주기를 청했다. 요연사는 말하기를, “여기에 온 너는 대체 무슨 물건이냐?” 하니 대답하기를, “그것은 말할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는 자가 온 것입니다. 다만 수행해 나갈 길을 모릅니다.” 라고 했다. 요연사가 또 말하기를, “나도 역시 너처럼 알지 못한다. 그러니 의당 잘 아는 스승에게 가서 배우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지정(至正) 갑신(甲申, 1350)년에 회암사에 이르러 밤낮으로 홀로 앉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깨달음을 얻었다.

중국으로 가서 스승을 찾겠다는 뜻을 결정하고 무자(戊子, 1348)년 3월 연경에 도착하여 지공(指空)에게 배웠다. 이내 둘이 묻고 대답하는 것이 서로 맞았다. 이리하여 십년 경인(庚寅, 1350)년 정월에 지공이 여러 제자들을 놓고 물어 보았으나 아무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선사는 여러 사람 앞에 나가 몇 마디 말을 하고 나서 세 번 절을 하고 물러났다.

지공은 서천(西天)의 108대 조사이다. 이해 봄에 남쪽으로 강소(江蘇), 절강(浙江)을 유람하고 가을 8월에 평산(平山)에게 배웠다. 평산이 묻기를, “일찍이 어떤 사람을 보았는가?” 하자 선사는 대답하기를, “서천의 지공이 날마다 천 개의 칼을 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평산이 말하기를, “지공의 천 개의 칼을 잠깐 두어두고 너의 한 개의 칼을 가지고 오라” 라고 하였다. 선사가 방석으로 평산을 끌어 잡아당기자 평산은 선상에 쓰러지다 앉으면서 크게 소리치기를, “도둑이 나를 죽인다.” 라고 하였다. 이에 선사는 “나는 칼입니다. 능히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능히 살릴 수도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곧 붙들어 일으키자 이 설암(雪巖)전한 급암(及菴)의 옷과 불자로써 신의를 표했다.

신묘(辛卯, 1351)년 봄에 보사낙가산(寶蛇洛加山)에 닿아 관음불상에 예배했다. 임진(壬辰, 1352)년에는 복룡산(伏龍山)에 가서 천암(千巖)에게 참배했다. 천암은 이때 마침 강암(江巖)에게 참배했다. 천암은 이때 마침 강호사람 천여 명을 모아 놓고 입실할 사람을 뽑고 있었다. 천암은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자, 선사는 이에 대답했다. 또 천암이 말하기를, “부모가 낳기 전에는 어느 곳에서 왔느냐?” 하자 선사는 말하기를, “오늘 아침은 4월 초 2일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천암은 받아들였다. 이해에 북쪽으로 돌아와 거듭하여 지공에게 배웠다. 이때에 지공은 법의와 불자와 범서(梵書)를 주었다. 이리하여 연대(燕代)의 산천을 돌아다니면서 유람하니 이는 한가한 도인과 같았다. 그 이름이 대궐 안까지 들려서 을미(乙未, 1355)년 가을에 성지를 받들고 수도의 광제사(廣濟寺)에 머물렀다. 병신(丙申, 1356)년 10월 보름에 강당을 열고 법회를 개설했다. 이 때 황제가 원사(院事) 야선첩목아(也先帖木兒)를 보내서 금란가사(金欄袈裟)와 폐백을 내리고 또 황태자는 금란가사와 상아로 만든 불자를 보내왔다. 선사는 가사를 받고 무리에게 묻기를, “고요하게 비고 적적하여 본래 한 가지 물건도 없는데 이 빛나는 물건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니 무리들은 대답이 없었다. 다시 서서히 말하기를, “구중궁(九重宮)의 금구(金口)에서 나왔다.”고 했다. 이에 념향(拈香)을 피워서 성수를 축하하고 좌석에 올라가서 주장(柱杖)을 가로 만지면서 몇 마디 말씀을 하였다.

무술(戊戌, 1358)년 봄에 지공과 작별하고 수장(授杖)를 얻어 가지고 동쪽으로 돌아왔다. 오다가 멈추면서 기회 있는 대로 설법을 했다. 경자(庚子)(1360)년에 대산(臺山)에 들어가 있었고 신축(辛丑)(1361)년 겨울에 임금이 내첨사(內詹事) 방절(方節)을 보내면서 선사를 서울로 맞이하여 강설하기를 청했다. 이때 만수가사(滿繡袈裟)와 수정불자(水晶佛子)를 내렸다. 또 공주는 마노불자(瑪瑙佛子)를 바쳤고 태후는 친히 보시를 베풀었다. 신광사(神光寺)에 머무르기를 청했으나 이내 사양했다. 이어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법으로 보아 나도 역시 물러가야 하겠다.” 함으로 부득이 신광사로 들어갔다.

11월에 홍건적이 경기지방을 짓밟고 온 나라 백성이 남쪽으로 옮겨갔다. 승도들은 두려워하여 적을 피하기를 청했으나 선사는 말하기를, “오직 목숨을 보존할 뿐인데 적들이 어떻게 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런지 이틀이 지나자 더욱 급하게 청했다. 이날 밤 꿈에 얼굴에 검은 점이 있는 한 신인(神人)이 의관을 갖추고 선인에게 인사를 하면서 말하기를, “여러 사람이 흐트러지고 보면 적들이 반드시 절을 없애버릴 것이요. 그러니 스님은 본래의 뜻을 굳게 가져라.” 라고 하였다. 그 이튿날 토지신좌(土地神座)에 가서 그 모양을 보니 꿈에 본 얼굴이다. 그 뒤 과연 적들은 오지 않았다.

계묘(癸卯, 1363)년에 구월산(九月山)에 들어갔다. 임금은 내시 김중손(金仲孫)을 보내서 돌아오기를 청했다. 을사(乙巳, 1365)년 3월에 대궐에 들어가기를 청하여 비로소 평시의 소원을 풀었다. 병오(丙午, 1366)년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고, 정미(丁未, 1367)년 가을에 청평사(淸平寺)에 들어가 있었다. 그해 겨울에 예보암(猊寶巖)이 지공의 가사와 손수 쓴 편지를 가지고 와서 선사에게 주면서 지금 선사의 치명(治命)5) 이 다했다. 기유(己酉, 1369)년에 다시 대산에 들어갔고 경술(庚戌, 1370)년 봄에 사도(司徒) 달예(達叡)가 지공의 영골(靈骨)을 받들고 와서 회암사에 안치했다. 선사는 스승의 유골에 예배하고 임금의 부름에 응하여 여름을 광명사(廣明寺)에서 지내고 초가을 회암사로 돌아왔다. 구월은 바로 공부선이 있는 달이다. 선사가 거처하는 방을 강월헌(江月軒)이라고 하고 평생에 일찍이 세속 문자를 익히지 않았으나 만일 시를 청하는 자가 있을 때는 붓을 잡고 그 자리에서 써서 마치 아무생각도 하지 않고 쓰는 것 같지만 모두 이치와 취지가 깊고 원대하였다. 늙어서는 묵화를 좋아하니 산수화가의 정도와 권도에 가까웠다. 아아 도를 이미 통달했으니 다 능하다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겠다. 신 색(穡)은 삼가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려 삼가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참으로 선각 스님은 기린의 뿔처럼 귀한 존재일세. 왕자의 스승이며 인간과 하늘의 안목일세.
모든 중이 그를 종장(宗匠)으로 삼아서 마치 물이 깊은 곳으로 모이듯 했네.
진정 아는 사람 드물지만 스님이 그 높다랗게 세운 바를 꿈이 신령스럽게 빛났으니 이것이 스님의 탄생이요,
용신(龍神)이 호상(護喪)이며 그 마지막이 참으로 아름다웠네. 더구나 사리로 그 영이(靈異)함이 나타났으니, 강물에 비치는 저 달빛 깨끗하고도 밝았다.
비었다. 빛이 있다. 상하가 시원스럽게 트이고 아득히 있는 그 높으신 풍격, 길이 길이 불멸하리.

普濟尊者諡禪覺塔銘幷序

玄陵在位之二十年 庚戌秋九月十日 召師入京 十六日 就師所寓廣明寺 大會兩宗五敎諸山衲子 試期所自得號 曰 功夫選 上親幸觀焉 師拈香畢昇法座 迺言曰 破却古今之窠 臼掃盡凡聖之蹤由 割斷衲子命根 抖擻衆生疑網 操縱在握 變通在機 三世諸佛 歷代祖師 其揆一也 在會諸德 請以實答 於是 以次入對 曲躬流汗 皆曰 未會 或理通而礙於事 或狂甚而失於言 一句便退 上若不豫色然 幻菴修禪師後至 師歷問三句 三關會罷 還檜巖 辛亥八月 二十六日 遣工部尙書張子溫 賚書 降印法服鉢盂 皆具封 爲王師 大曺溪宗師 禪敎都摠攝 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 謂松廣寺 東方第一道場 迺命居之 壬子秋 偶念指空三山兩水之記 欲移錫檜巖 會以召赴是寺法會 得請居焉 師曰 先師指空 盖嘗指畵重營 而燬于兵 敢不繼其志 迺謀於衆 增廣殿宇 工旣告畢 丙辰四月 大設落成之會 臺評以謂 檜巖 密邇京邑 士女往還 晝夜絡繹 或至廢業 禁之便 於是 有旨 移住瑩源寺 逼迫上道 師適疾作 輿出三門 至池邊 自導輿者 從涅槃門出 大衆或疑 失聲號哭 師顧曰 努力努力 無以余故 中輟也 吾行 當止於驪興耳 至漢江 謂護送官卓詹曰 吾疾劇 乞舟行 泝流七日 方至驪興 又謂卓曰 欲少留 竢病間卽行 卓勉從之 寓神勒寺 五月十五日 卓又督行急 師曰 是不難 吾當逝矣 是日辰時 寂然而逝 郡人望見 五彩雲 盖山頂 旣火之洗骨 無雲而兩者 方數百步 得舍利一百五十五 粒 禱之 分爲五百五十八 四衆得之灰中 以自秘者 莫知其數 神光 照耀三日 乃已 釋達如 夢見龍盤燒臺下 其狀如馬 及以喪舟還檜巖 無雨水漲 皆驪龍之助云 八月十五日 樹浮屠於寺之北崖 頂骨舍利 厝于神勒寺示其所終也 覆以石鐘 戒其無敢訛也 事聞于朝 謚曰 禪覺 命臣穡 爲文 臣仲和 書丹篆額 臣謹按 師諱惠勤 號懶翁 初名元惠 亨年五十七 法臘三十八 寧海府人也 俗姓牙氏 考諱瑞 具膳官令 母鄭氏 靈山郡人也 鄭夢見金色隼 飛來啄其頭 忽墬卵 五彩爛然 入懷中 因而有娠 以延祐庚申 正月十五日生 年甫冠 隣友亡 問諸父老曰 死何之 皆曰所不知也 中心痛悼 走入功德山 投了然師 祝髮 師曰 汝爲何事出家 對以超三界 利群生 且請開示 曰汝之來此 是何物耶 曰此能言 能聽者 能來伈 但未知修進之術 曰吾亦如汝 猶未之知 可往求之有餘師 至正甲申 至檜巖 晝夜獨坐 忽得開悟 尋師中國之志 決矣 戊子三月 至燕都 參指空 畣問契合 十年庚寅正月 空集衆 下語 無能對者 師出衆 吐數語 三拜而出 空西天百八代祖也 是春 南游江淛 秋八月 參平山 山問曾見何人 曰西天指空 日用千劒 山云 且置指空千劒 將汝一劍來 師以坐具 提山 山倒在禪床 大呌賊煞我 師曰 吾劒也 能殺人 能活人 乃扶起 山以雪巖所傳 及菴衣拂子 表信 辛卯春 扺寶陁洛迦山 拜觀音 壬辰 至伏龍山 參千巖 適集江湖千餘 人 選入室 巖問所自 師旣答 巖云 父母 未生前 從甚處來 師曰 今朝 四月初二日 巖許之 是歲 北還 再參指空 空授以法衣拂子梵書 於是 游涉燕代山川 肅然一閑道人也 名聞于內 乙未秋 奉聖旨 住大都廣濟寺 丙申十月望 設開堂法會 帝 遣院使也先帖木兒 賜金襴袈裟幣帛 皇太子 以金襴袈裟 象牙拂子 來錫 師受袈裟 問衆曰 湛然空寂 本無一物 粲兮爛兮 從何而出 衆無對 徐曰 九重宮金口中 乃披拈香 祝聖 陞座 橫按柱杖 下數語便下 戊戌春 辭指空 得授記 東還 且行且止 隨機說法 庚子 入臺山居焉 辛丑冬 上遣內詹事方節 迎入京 請說心要 賜滿繡袈裟 水精拂子 公主 獻瑪瑙拂子 太后 親施布施 請住神光寺 因辭 上曰 於法 吾亦退矣 不得已卽行 十一月 紅賊 蹂躪京畿 擧國南徒 僧徒震惧 請避賊 師曰 唯命是保 賊何能爲 數日 請益急 是夕夢 一神人 面有黑誌 具衣冠 作禮曰 衆散 賊必滅寺 願固師志 明日 至土地神座 視其貌 則夢所見也 賊果不至 癸卯入九月山 遣內侍金仲孫 請還 乙巳三月 詣闕乞退 始得夙願 游龍門元寂諸山 丙午 入金剛山 下未秋 住淸平寺 其冬 猊寶巖 以指空袈裟手書 授師曰 治命也 己酉 再入臺山 庚戌春 司徒達叡 奉指空靈骨 來厝于檜巖 師 禮師骨 因赴召結夏廣明寺 秋初還檜巖 九月 卽功夫選也 師所居室曰 江月軒 平生 未嘗習世俗文字 有請題詠 操筆立書 若不經意 理趣深遠 晩好黑戱 山水 逼道權 鳴呼 道旣通 多能也 宜哉 臣穡 謹拜手稽首 而爲之銘 銘曰 展也禪覺 惟麟之角 王者之師 人天眼目 萬衲宗之 如水赴堅 而鮮克知 所立之卓 隼夢赫靈 在厥初生 龍神護喪 終然允臧 矧曰舍利 表其靈異 江之闊矣 皎皎明月 空耶色耶 上下洞徹 邈在高風 終古不滅

맨 위로 가기